준비

새벽 4시 30분.
집에 도착한 우리는 아무 소음 없는 조용한 거실에 앉아 서로를 응시했다.
얼마 안 있어 녀석의 배꼽 시계가 울림으로 적막함이 사라졌다.
케이지 안에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의 얼굴이 빨개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녀석이 부끄러운 듯 말했다.
“이.. 이건 가끔 배에서 그냥 소리가 나는거다.. 멍! 배고픈게 아니다 멍!”
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녀석은 민망한지 케이지 안에서 돌아앉아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혼자 웅얼거렸다.
“아지는 멍청이.. 아지 배는 멍청이.. 아지 배는 눈새.. 멍..”
밥먹은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배고플만도 하다.
녀석에게 물었다.
“꺼내주면 공격할건가?”
녀석이 내 쪽으로 돌아앉으며 앙칼지게 말했다.
“당연하지 멍! 삼일 안에 너를 하회한테 데려가고 말거다 멍!”
“무슨 수로?”
“그건 알려줄 수 없다 멍! 적한테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려주겠냐 멍!”
녀석의 반응을 보니 별 대책은 없어 보였다.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듯 나를 째려보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어볼게 있다.”
“대답 안해줄 거다 멍! 그리고 이상한 기계로 내 과거도 다 봐 놓고 뭘 더 물어보겠다는 거냐 멍!”
“도움 되는 내용은 하나도 없더만.”
“뭐야 멍?!”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할 말을 이어갔다.
“네가 머물렀던 층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나?”
“내가 그걸 왜 말해줘야 되는거냐 멍?”
“말해주면 풀어주도록 하지.”
“흥! 그걸로는 어림도 없다 멍!”
“그럼 밥도 주겠다.”
밥 얘기에 녀석의 왼쪽 귀가 움찔했지만 녀석은 완강했다.
“흐..흥! 내가 밥 같은걸로 회유되는 멍청이로 보이..”
“플러스 개껌 하나.”
“...”
“개껌 두 개.”
“..다른 사람.. 음.. 비슷한건 있었다 멍.”
단순한 녀석.
이어서 녀석에게 질문을 했다.
“사람 비슷한거라니?”
“우리를 감시하던 백정들이 대부분 그 층에 살았었다 멍.”
“백정?”
“백정도 모르냐 멍? 하회일가에서 만든 AI 인간형 로봇 아니냐 멍!”
“AI 인간형 로봇이 있다고?”
녀석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하회일가에는 네가 상상도 못 할 엄청난 것들이 가득해 멍! 넌 절대 이길 수 없을거다 멍! 그러니까 얌전히 나한테 머리나 내놔라 멍!”
“하회일가가 없어져야 너한테 이득인거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하회일가가 어떻게 없어지냐 멍? 진입부터가 어렵지 않냐 멍!”
“그건 해봐야 아는거지.”
녀석은 말이 안통한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직 말 안끝났네. 녀석들 특성이 있을거 아닌가? 순찰 시간은 어떻게 되지? 약점은? 그리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둥 소리와 같은 꼬르륵 소리가 오피스텔 방을 가득 매웠다.
나 참. 번거롭구만.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일전에 사놨던 소고기를 냉장고에서 꺼낸 후,
녀석의 머리를 가볍게(?) 내려쳤던 방탄 후라이팬을 달궈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고기 굽는 냄새와 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할 때, 녀석이 있는 쪽을 돌아보자 녀석은 침을 흘리며 두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이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부끄러워 하기는.
적당히 잘 익은 소고기를 그릇에 담아 녀석에게 다가갔다.
안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케이지 뚜껑에 달라붙어 넋을 놓고 소고기에서 시선을 때지 못하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퍽 귀엽다.
“먹고 싶나?”
“아.. 아니다 멍.. 먹고 싶.. 츄릅.. 아니 먹고 싶지 않.. 헥헥 먹고 싶다 멍.”
“먹고 난 뒤에 질문에 대한 답을 성실히 해줘야 하네. 알겠나?”
“알.. 알았다 멍!”
케이지 문을 열자 녀석이 쏜살같이 나와 고기를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고기를 먹고 있는 녀석을 뒤로하고 나는 무기를 챙기기 시작했다.
필요한 무기들을 캐리어에 넣고 본격적인 근무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피 묻은 셔츠를 벗었다.
내가 옷을 벗자 녀석이 흠칫 놀래면서 물었다.
“몸에 상처가 왜 그렇게 많냐 멍? 너는 로봇 스킨 안쓰냐 멍?”
“안 쓴다.”
“왜 안 쓰냐 멍? 또 상처나면 아프지 않냐 멍?”
옷장에서 셔츠와 근무복을 꺼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녀석이 발끈하며 말했다.
“아 왜 대답 안해주냐 멍! 지금 나 무시하는거냐 멍?”
“대답할 의무는 없지 않나?”
녀석이 심통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대답 안해주면 나도 대답 안 할 거다 멍!”
검정 셔츠에 근무복인 방탄 소재의 양복을 갖춰입은 난, 주방으로 가서 개껌 두 개를 꺼내 녀석을 향해 흔들어보였다.
“이래도?”
“그걸로 내가 쉽게 회유될거라 생각했냐 멍?!”
말은 그렇게 하지만 녀석은 이미 재빠르게 내 몸에 올라타 개껌을 낚아채 씹고 있었다.
민망해하는 녀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가도 받았는데, 대답은 해야하지 않나?”
녀석이 분해하며 말했다.
“이익..! 난 하회일가에 들어간지 얼마 안되서 AI 인간형 로봇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멍..”
“약점은?”
“모른다 멍.”
“순찰 주기는?”
“외부 업무 위주로 했어서 내부 순찰 주기는 모른다 멍.”
계속 모른다고 말하는 녀석을 향해 다가가 리볼버 총구를 머리에 겨누며 싸늘하게 말했다.
“진짜 모르나? 편의를 봐주고 있다는 걸 모르진 않을텐데?”
“진짜 몰라 멍! 죽일거면 죽여라 멍! 그래도 바뀌는건 없다 멍!”
흠..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은데..
한동안의 신경 전 끝에 총구를 거두며 말했다.
“기다리는 가족이 있는데 목숨을 너무 가벼히 여기는거 아닌가?”
아무 대꾸를 안하는 녀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하회를 손질하러 하회일가로 갈거다. 갈거면 따라와라. 발목 붙잡거나 거슬릴거면 여기 있던가.”
“거기 뭐가 있는지 너는 몰라서 그래 멍! 하회를 죽이는건 불가능하다니까 멍? 방범 시스템이 얼마나..”
“신체개조 안하고 업계 1위되는건 가능하고? 내 목을 가져간다고 하회가 가족을 놔줄 것 같나? 신뢰가 꽤 두터운가보지?”
바닥에 눕혀있는 철제 캐리어를 들어올려 밖으로 나갔다.
지하주차장에 내려가 차를 타려고 할 때, 조수석 쪽 문이 열리며 녀석이 차에 탔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녀석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민망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녀석이 소리쳤다.
“왜! 뭐! 멍! 네가 하회 죽일 수 있다고 하니까 양이 구하러 가는거다 멍! 없는 것 보다는 낫지 않겠냐 멍!”
기특하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자
“뭐하는 거냐 멍! 하.. 하지 마 멍!”
라고 말하며 기분은 나쁘지 않은지 꼬리는 연신 헬리콥터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엑셀을 밟고 지상으로 올라가 주차차단기 앞에 섰다.
경비가 물었다.
“어디 가실 예정이십니까~?”
“휴가.”
“휴가를 얻으셨군요! 언제 오실 예정이십니까~?”
“오늘.”
“반려동물이 생기셨군요~?”
경비의 말에 녀석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내밀며 대꾸했다.
“난 반려동물 아니다 멍! 강아지다 멍!”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나와 녀석을 번갈아 보던 경비가 웃으면서 말했다.
“씩씩하니 보기 좋네요~. 안전한 휴가 다녀오세요~.”
올라가는 주차차단기를 지나쳐 도로로 나갔다.
으레 떠오르던 태양 대신 우중충한 먹구름이 새벽 하늘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
적막한 차 안.
녀석이 심심한지 자동차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창문을 완전히 열고 창문 밖에 얼굴을 내밀어 바람을 느꼈다.
입을 벌리고 바람을 느끼고 있는 녀석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것 같은 하얀 솜사탕 같았다.
터널 구간이 나오자 녀석의 목뒷덜미를 잡아 자리에 앉히고 창문을 닫았다.
녀석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눈치를 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뭔가 불공평하다 멍!”
내가 눈길조차 주지 않자 녀석이 서운하다는 듯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너한테 내 과거를 보여줬다 멍! 그럼! 적어도! 묻는 말에 대답해줄 수 있는거 아니냐 멍?”
“뭘?”
“로봇 스킨 왜 안쓰는지 멍!”
“그럴 의무는 없지 않나?”
“또 그 대답이냐 멍!”
“왜?”
“궁금해서 그렇다 멍! 로봇 스킨 안쓰면 업계에서 쉽게 죽을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안쓰는 건지 궁금하다 멍! 그리고 나한테 왜 잘해주는건지도 궁금하고 멍!”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런 녀석의 시선을 외면하며 운전을 계속하려 했지만 녀석이 갑자기 내 다리로 뛰어올라와 밑에서 나를 계속 쳐다보는 탓에 그 올망똘망한 눈빛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한숨을 푹 쉬고 녀석의 목뒷덜미를 잡아 옆좌석에 내려놨다.
녀석이 다시 내게 달려들려고 해서 손으로 녀석의 얼굴을 막으며 말했다.
“..다 말하긴 그렇고 하나. 딱 하나만 말해주겠다. 됐나?”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왜 나한테 잘해주냐 멍?”
“후라이팬으로 기절시키고, 마음대로 기억을 봤는데 잘해주는건가?”
“그.. 그건 그렇지만 멍.. 맛있는 것도 많이 주고.. 그리고 안죽였잖냐 멍! 사실 몇 번이나 기회는 있었는데 안죽였다 멍! 왜 그런거냐 멍?”
“..닮아서.”
“닮아 멍? 누구랑 닮았냐 멍?”
“딱 하나라고 했을텐데?”
“아니 그래도 더 말해줄 수 있는거 아니냐 멍! 나같은 친구가 있었냐 멍? 더 자세히...”
그 때 부점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전화를 받자 부점장이 말했다.
“오빠~. 나 정말 힘들었어~. 시스템 뚫기 너~무 힘들더라~!”
“실패했나?”
“어머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그래도 성.공.했.지~! 오빠는 가고 있어?”
“그래.”
“오케이~. 시스템 셧다운 시키면 15분 동안은 건물 안에서 마음대로 움직여도 될거야.”
“15분? 최선인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 정도 되니까 하회일가 시스템에 개입이라도 할 수 있는거야!”
하여튼 저 자신감은.
“알았네. 시간을 넘기면?”
“옥상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상 못 나와~. 일단 건물 내부 폰으로 보내줄게 도착해서 확인해봐~.”
“특이사항은 없나?”
부점장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음.. 건물 내부에 사람이 없던데?”
“사람이 없다니?”
“로봇으로 개조된 사람이거나 로봇밖에 없다는 얘기지~.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아. 15분 동안 오빠랑 그 사나운 고양이만 움직일 수 있다는 얘기니까~. 더 궁금한 건 없고?”
“건물 내부 보고 다시 연락하겠다.”
“OK~. 아 맞아 그리고..”
다음에 이어진 부점장의 말을 듣고 녀석을 힐끗 쳐다봤다.
이윽고 부점장에게 내가 말했다.
“..알았다. 유념하도록 하지.”
“그럼 무사히 잘 갔다 와! 올 때 내 선물 챙겨오는거 잊지 말고!”
부점장과의 통화가 끝나자 녀석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물었다.
“무슨 내용 주고 받았냐 멍? 뭔데 멍?”
“질문은 하나만..”
“아 진짜! 완전 치사하다 멍!”
녀석은 잔뜩 삐친 상태로 턱을 괴고 엎드려 고개를 돌려버렸다.
성난 뒤통수를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하회일가를 향해 끝없이 펼쳐진 고속도로를 달렸다.
한참 후, 우회전을 하기 위해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자 일반 빌딩들 사이로 유리로 된 높은 고층 건물이 보였다.
녀석은 건물을 멍하니 바라보며 내게 말했다.
“저기가 하회일가 본가다 멍. 꼭대기층에 하회가 있을거다 멍.”
오전 7시.
하늘에서 작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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