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폭파의 충격으로 떨어져나온 엘리베이터 문에 맞기 전, 몸을 급히 틀어 등으로 충격을 흡수했다.
생각했던 것 보다 큰 충격에, 폭파가 일어난 반대편 벽까지 몸이 밀려 날아갔다.
엘리베이터 문과 벽 사이에 끼어 몸이 완전히 찌그러지기 직전, 몸을 최대한 구부려 녀 석들에게 충격이 최소화가 되도록 버텼다.
‘콰직!’
벽에 닿은 팔과 다리,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에 맞은 등이 바스러질 듯 아팠다.
“크윽..!”
“괜찮냐 멍?!”
상식적으로 괜찮겠냐..
다행히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네.
“..안다쳤나?”
“나는 괜찮다 멍!”
그럼 그걸로 됐다.
엘리베이터 줄에 간신히 매달려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수류탄의 충격을 가까스로 피한 백정들이 하나 둘 다가오는게 눈에 들어왔다.
앞 쪽에 서 있던 백정 두 명의 미간에 총구를 조준하고
‘탕! 탕!’
총을 발사하며 아지에게 말했다.
“엄호 부탁한다.”
“알겠다 멍!”
엘리베이터 줄을 잡고 올라가는 동안 아지가 내 다리 쪽으로 내려갔다.
본인 앞발 발톱을 하나 뽑더니 백정들을 향해 던졌다.
발톱은 이내 빨간 LED 빛을 뿜어내더니 백색빛을 발산하며 복도에 있던 백정들을 흔적도 없이 없애버렸다.
별 일 아니라는 듯 내 어깨로 다시 올라오는 아지를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게.. 뭔가..?”
“무탄이다 멍!”
“무탄..?”
“반경 500m 내로 빛에 닿는 생명체는 아예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탄이다 멍!”
“그런게 있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아..?”
“..일 끝나고 보자. 설마 이 고생을 했는데 로프 같은거 있는건 아니겠지..?”
“그런건 없다 멍. 나는 점프를 잘하니까 그런거 필요 없다 멍.”
“..너 잘났다.”
마음 속으로 참을 인 자를 계속 되뇌이며 50층을 향해 나아갔다.
***
오후 11시 59분.
하회가 있는 50층에 도착했다.
아지에게 물었다.
“철문 열만한 물건 있나?”
아지가 손을 변형하여 총을 만들고 말했다.
“이거면 되지 않을까 멍?”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지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향해 동그란 모양으로 총을 쐈다.
다리를 앞뒤로 움직여 벽쪽 끝까지 갔다가 이내 발차기를 하며 50층 엘리베이터 문을 힘차게 찼다.
균열이 간 부분이 부서지며 하회방에 앞구르기를 하며 들어갔다.
발이 하회방에 닿자마자 권총에 총탄을 갈아끼우고 하회가 앉아 있을 거라 예상한 의자를 향해 총을 한 방 날렸다.
이상하다.
총을 쐈는데 무언가 맞는 느낌이 없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것 같이 너무 고요하다.
쎄한 느낌에 책상으로 다가가 금색 의자를 내 쪽으로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이 고생을 했는데 아무도 없다고..? 장난하나?!
한창 열이 받고 있는 그 때, 책상에 놓여 있던 노트북 모니터가 켜지며 하회가 기분 나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어서오십시오 라온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딱 12시군요..?”
“업계에서 내노라고 하는 근무지 중 하나면서 ‘약속’을 이렇게 안지켜도 되는건가? 업계에서 약속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거야?!”
“빨리 나와라 멍! 어딨냐 멍!”
하회가 본인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 그렇죠.. ‘작은 근무지’면 약속의 의미가 확실히 크겠지만.. 저희 하회일가 정도 되면.. 그 리스크를 근무지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까 상관없습니다.. 하하 열이 많이 받으셨나보죠..?
잠시 숨을 고르던 하회가 말을 이었다.
”그 많은 백정들과 미사일을 다 뚫고 오시다니.. 솔직히 놀랐습니다..? 이 정도이실 줄이야.. 제가 확실히 사람 보는 눈이 좋긴 한가봅니다..? 그럼.. 사과의 말을 한 번 들어볼까요..?”
사과? 기도 안차는군.
말도 안되는 말을 하고 있는 하회에게 말했다.
“약속을 어긴 사람에겐 할 말 없네.”
“약속을 어겼다니요?”
“12시, 본가에서 만나기로 하지 않았나.”
“아~ 그렇죠.. 하지만.. 제가 본가에 있을거라고 말씀드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닌가요..?”
“말장난 하자는건가?”
“라온님이야 말로 저와 말장난 하자는건가요..? 이곳에 왜 오셨습니까..? ‘가게’와 남은 사람들을 지키려고 오신거 아닌가요..? 그런 힘이 있는 제게 대들다니요..? 제정신이십니까..?”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하회가 말을 이었다.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모든 걸 다 눈감아드리겠습니다.. 저희 쪽으로 오시면..”
“하,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약속은 저희같은 큰 근무지에서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지만 ‘계약’은 다르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계약? 나와 계약하겠다는 건가? 이미 ‘횟집’에 소속되어 있는 나와 어떻게 계약하겠다는건가?”
“아~ 그건 간단합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회의 책상 우측이 열리더니 물 한 컵과 알약 한 알이 올라왔다.
“이게 뭐지?”
“그 알약을 드시면 ‘횟집’과의 인연이 끊어질 겁니다.. 당연히 ‘계약’도 해지되는거지요..”
“네 말을 어떻게 믿냐 멍!”
하회가 몸을 뒤로 기대며 대답했다.
“알약 안에는 작은 나노봇들이 들어있습니다.. 기존에 있던 횟집의 나노봇들을 없애고 저희 쪽의 나노봇으로 채워질겁니다.. 듣자하니 라온님의 은퇴가 얼마 안남았다고 들었는데.. 그 욕심많은 점장이 자기 자리를 라온님께 넘길 것 같습니까..? 손해볼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가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말을 이었다.
“뭐..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당신과 계약하지 못하면 폐점하면 되니까요.. 그리고 당신과 조금이라도 연이 닿아있는 존재들 모두를 없애면 되니 제 입장에서는 손해볼게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알고 있겠지만 지금 당신이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거.. 알고 계시지요..?”
잠깐의 침묵 후, 하회가 손목을 보며 말했다.
“제가 시간이 많지는 않아서.. 어쩌실겁니까..?”
부점장이 없는 지금, 가게에 미련은 없다.
다만..
아무 말 없이 녀석들을 바라봤다.
“라온, 계약할거냐 멍? 이 녀석들 나쁜 녀석들이다 멍!”
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회를 바라보며 말했다.
“계약하지. 대신 조건이 있네.”
“..지금 저한테 조건을 거시는겁니까..?”
“약속 장소에 안나타났으니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하회가 내 말에 기가 차다는 듯 기분 나쁜 웃음 소리를 내며 말했다.
“하하하하! 내 평생 이리 당돌한 사람은 처음입니다..! 오히려 더 마음에 드는군요..! 그래, 무슨 조건인지 들어나봅시다..!”
양이를 보여주며 말했다.
“치료해줘.”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짐승을 뭐하러 치료합니까..?”
“양이 치료. 이거면 돼.”
총을 하회에게 보이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당신한테 손해될 조건은 아닌 것 같은데?”
하회가 몸을 뒤로 기대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계약하시죠..”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알약을 삼키시면, 계약하시는 겁니다..”
아지의 우려 섞인 눈빛을 뒤로 하고 알약을 거리낌없이 삼켰다.
그 모습을 본 그가 박수를 치며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이제야 제 식구가 되셨군요..! 참 길었습니다.. 참 길었어..”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그럼 첫 번째 임무를 드리겠습니..”
“그 전에. 계약 조건은 지켜야하지 않나? 양이 치료. 그게 먼저야.”
“흠.. 알겠습니다.. 45층에 가시면 양이를 치료할 수 있을 겁니다..”
“첫 번째 임무는 뭐지?”
하회가 손가락 깍지를 끼고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말했다.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점장의 머리를 들고 오세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하겠습니다..”
하회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내려가시는 김에 라온님 몸도 치료하게끔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불편하시겠지만 49층까지는 라온님이 올라오신데로 내려가셔야겠습니다..”
“점장 머리는 어디로 가져가면 되나?”
“제가 어디 있는지 궁금하신 모양이죠..? 이곳으로 가져오시면 됩니다.. 그럼 나중에 뵙도록 하죠..”
노트북 화면이 꺼지고 검은 화면에 나와 아지의 모습이 비춰졌다.
아지가 내게 소리쳤다.
“뭐 하는거냐 멍! 하회랑 계약해서 어쩌겠다는거냐 멍! 나랑 아지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안드냐 멍?”
“..하회가 어딨는지 아나?”
“모른다 멍!”
“하회가 누군지는 아나?”
“그것도 모..모른다 멍..”
“양이를 네가 지금 당장 치료할 수 있나?”
“..그것도.. 아니다..”
“..가자.”
아지를 머리에 올리고 엘리베이터 줄을 잡았다.
49층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아지가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거냐 멍? 점장을 진짜 죽일거냐 멍?”
“속박도 없어졌으니 죽여야지.”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냐 멍? 그럼 너한테 아버지..”
“그런 애비 둔 적 없어.”
차가운 반응에 아지는 곧 입을 다물었다.
***
얼마 후, 수류탄 폭발로 엉망이 된 엘리베이터 입구 복도로 몸을 기울여 가볍게 안착했다.
아지가 머리에 매달린채로 안절부절해하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괜찮겠냐 멍?”
“뭐 말인가?”
“부점장 죽었을 때 네 표정이 안좋았다 멍. 점장은 괜찮겠냐 멍?”
“부점장과 점장은 다르다.”
널부러져 있는 백정 시체를 밟고 지나가며 비상구를 열었다.
“뭐가 다르냐 멍?”
“부점장은.. 좀 귀찮긴 했어도 나와 같은 처지였지. 점장은.. 본인의 이익이 가장 우선인 업주일 뿐이야. 문제는..”
“문제는?”
45층 비상구 문을 열어 아지의 안내에 따라 수술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그 괴물 목을 어떻게 따느냐가 문제지.”
“?칼로 그으면 되는거 아니냐 멍?”
“..이 업계에서 점장의 의미를 모르나보네.”
양이를 수술대에 올려놓으며 아지에게 말했다.
“점장은 내가 이길 수 없는 유일한 인물이다.”
“엥? 네가 이 업계 1위 아니냐 멍?”
“업계 1위여도 점장한테는 못 당해. 아까 내 은퇴가 얼마 안남았다고 들었지?”
“들었다 멍!”
수술대 우측의 버튼을 누르자 진행할 수술이 무엇인지 묻는 홀로그램 창이 떴다. 해당 홀로그램 창에서 ‘머리 찰과상 / 뇌진탕 수술’을 누르자 부점장의 작업실에서 봤던 스캔봇이 수술대 천장에서 내려와 양이의 상태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기억이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점장은 계속 점장으로 존재했다. 못해도 40년 이상의 기간동안 점장으로 있었다는 얘기지. 그 사이에 은퇴하는 근무자가 없었을 것 같아?”
“그 말은..?”
“다른 근무지는 몰라도 우리 근무지의 경우, 은퇴자는 점장이 되지 못하면 그 즉시 ‘폐기 처분’된다. 그리고 점장이 되려면 이전 점장과의 싸움에서 이겨야하지.”
스캔봇의 진찰이 완료된 후, 양이의 치료가 시작되었다.
“여태까지 점장을 이긴 은퇴 근무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말이야.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런..”
근심으로 가득차 울상이 된 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서 나 혼자서는 좀 어려울 것 같고.. 네 도움이 좀 필요한데. 어때? 도와줄 수 있겠나?”
“내 도움? 당연히 도와줄 수 있다 멍!”
“그럼 일단 무기 구할 곳으로 안내해줘.”
“알았다 멍! 근데 너는 치료 안해도 되냐 멍?”
“음.. 이거면 될거다.”
수술대 옆에 있던 붕대로 어깨의 총상을 가볍게 처치한 뒤, 아지를 따라 무기고로 향했다.
- 작가의말
근무지에서 약속을 어길 경우, 대부분의 근무지에서 '근무자 50명을 퇴사 처리'합니다. 퇴사자는 '즉시 폐기 처분'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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