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무림대회(中原武林大會) (5)

16강 대련이 있기 이틀 전,
호남성(湖南省) 악양현(岳阳县) 몽유루(夢留樓).
사아는 한낮의 햇볕 아래 차를 즐기는 중이었다.
“담온님, 부친께서 보내신 서찰입니다.”
공손히 들어선 홍가가 천마의 서신을 전했고,
사아는 즉시 서신을 펼쳐 읽었다.
‘일전의 일은 처리하였다.
잘 먹고, 잘 놀고, 잘 쉬다 오너라.’
몇 자 안 되는 짧은 서신 속 가득 담긴 애정에
사아의 입꼬리가 한껏 늘어졌다.
이내 서신을 곱게 접어 품에 넣은 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잠시 나갔다 올 테니, 너는 쉬어라.”
“네, 담온님.”
사아는 그대로 객실을 나와 저잣거리로 향했다.
저마다 즐거운 모습의 사람들을 보니 묘한 만족감이
심장 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듯했다.
“이번에 청성의 어린 도사님과 붙는 상대가
그 문파 없는 검은 무복이라지?”
“아아, 그 담온이라는 자?
나는 그자가 우승했으면 좋겠네!”
멈칫.
여유로이 걷던 중 들려온 행인들의 대화에
사아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러한가? 나는 청성이 이겼으면 한다네.”
“응? 의외로군.
자네, 청성이랑 딱히 연고도 없지 않은가?”
청성을 응원한다던 사내가
물음에 쭈뼛거리다가 이내 말문을 열었다.
“···내 처가가 감숙에 있었네.
처가가 9년 전에 그 난리에 휘말려서···.”
사내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그러자 상대가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은 채로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저런, 어찌 그런 일이···!”
“우리 집이 멀다 보니,
일이 있고 몇 달이 지나서야 소식을 들었네.
부모님 댁에 애들 맡기고
아내랑 둘이 급히 처가로 가보았는데···.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
아내가 어찌나 괴로워하던지,
난 꼼짝없이 아내까지 잃는 줄 알았네.”
문득 사아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형제들의 시체가 떠올랐다.
‘형이 나오라고 할 때까지 절대 나오면 안 돼!’
큰형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소리는 여전히 선명했다.
“그때 청성 분들이 와주시지 않았으면
내 정말 아내까지 그 자리에서 잃었을 걸세.
그분들이 그 끔찍한 시신들을
하나하나 옮겨서 닦아주시고, 수습해 주시고···.
크게 봉분도 만들고 죽은 이들 이름까지
하나하나 비석에 새겨 제까지 올려 주셨어.”
사아는 이름 없이 죽어간 형제들을 떠올렸다.
큰형 하생을 빼면 불릴 이름조차 없던 그들은,
청성이 만들었다는 봉분에 묻혔을까.
묻혔다면 비석에는 무어라 새겨졌을까.
“난리통에 무너지고 부서진 집들을
돈 한 푼도 안 받고 전부 고치시기까지 했지.
내내 넋이 나갔던 아내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웃더라고.”
사내의 말에 형제들과 함께 부서진
대문과 담장이 떠올랐다.
제 몸을 숨겼던 부엌은,
누이가 심장을 뜯겼던 창고는,
아홉째가 목이 꺾였던 곁방은 여전할까.
제 부모가 바르작대다 죽었던 안방조차
청성의 제자들은 말끔히 고쳐 두었을까.
‘막내야, 이거 빨리 먹어!’
‘우리 막내, 형아가 뭐 가져왔게?’
사아의 눈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잊고 있던 다정한 이들이 떠오른 탓이다.
“···흥륭산, 이었던가.”
마음 깊이 묻어 두었던 그리움을 따라,
사아의 발걸음이 빠르게 움직였다.
***
사아는 떠나기 전,
몽유루에 들러 홍가를 불렀다.
“잠시 어딜 다녀오려 한다.
너는 무공을 못 해 데려가기 번거로우니,
예서 기다리고 있으면 내 일을 마치고 오마.”
사아의 통보에 홍가가 드물게 물었다.
“담온님, 이틀 뒤가 대련인데
갑자기 어디를 다녀오신다는 거예요?”
홍가의 물음에 담온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더 하기엔 너무 이목을 끌었다.
다녀와서 저들의 무공이나 더 살피려 하니,
너는 방이나 잘 지키고 있거라.”
“예, 담온님. 조심히 다녀오셔요.”
예를 갖추는 홍가를 뒤로한 채,
사아는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
감숙(甘肅) 흥륭산(兴隆山).
산속 깊이 자리한 작은 마을에
흔치 않게 소란한 분위기가 흘렀다.
“와, 형아! 형아도 청성에서 왔어요?”
“우와! 청성 도사님이에요?”
가난한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질 좋은 비단으로 만든 검은 무복 차림에
마을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든 것이었다.
“···너희는, 이름이 있나?”
검은 무복, 사아가 앞에 선 아이에게 물었다.
“저는 춘생이에요! 봄에 태어나서요.”
“춘생, 춘생이라···.”
사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죽은 제 큰형은 여름에 태어나 하생이었다.
“허면 혹시 하생이란 자가 살던 집을 아느냐?”
“아, 그 집이요? 저기! 쭉 가면 나와요.”
별 기대 없이 물었건만,
춘생은 거침없이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너, 하생을 알아?”
“당연하죠! 얼마 전엔 제가 청소도 했는걸요?”
춘생의 말에 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네가 왜 그 집을 청소했지?”
사아의 물음에 춘생이 가슴을 쭉 펴고 말했다.
“어라? 청성 분이 그걸 모르세요?
그 집이 막내만 빼고 전부 죽었는데,
살아남은 막내는 사라지고 찾지 못했대요.
그래서 도사님들이 언제든 막내가 돌아오면
마음 편히 살 수 있게 집을 돌봐달라고 했댔어요!”
“···그랬구나.”
사아는 춘생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작은 산골 마을이라 작고 또 좁아서
몇 걸음 걷지도 않았건만 익숙한 대문이 보였다.
끼익-
사아가 망설임 없이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우리 막내, 이제 잘 뛰네!’
‘막내야~! 우리 이쁜 막내가 어디 있지~?’
어린 기억에는 마당이 조금 더 컸던 것 같은데,
이제 와 둘러보니 마당이라 하기에도 민망했다.
‘혹시 형이 너무 오래 아무 말이 없으면···
내일 아침까지 나오란 소리를 안 하면, 그때 나와.’
큰형이 저를 숨기느라 주방에 잔뜩 쌓였던 집기들은
아담한 주방 곳곳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놓여 있었다.
‘에이씨, 애새끼잖아?’
아홉째의 목이 꺾였던 곁방은 아담하지만 포근했고,
‘하아, 역시 어린 것들이 맛나다니까!’
어린 누이의 심장이 파먹혔던 창고는 텅 비었지만
거미줄 하나 없이 깔끔한 모양새였다.
‘어때? 만족스러워?’
제 아비가 버러지 같던 부모를 죽여준 안방은
사람이 사는 방처럼 아늑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
천마궁 태건전의 복도만도 못한 집을
한참 눈에 새기던 사아가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차근히 걸음을 옮긴 사아가 당도한 곳은,
마을 뒤편에 자리한 거대한 봉분 앞이었다.
“이게 그 비석인가.”
거대한 봉분 앞에는
그만큼이나 커다란 비석이 곧게 세워져 있었다.
‘순애, 동형, 연상,······하생.’
비석을 훑던 사아의 시선이 멈추었다.
‘하생, 무명(男), 무명(男), 무명(男), 무명(女).’
하생의 아래로 쭉 나열된 무명인 넷,
그건 분명 틀림없는 제 형제들과 누이의 것이었다.
“···형들, 누이. 막내가 왔습니다.”
툭.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비석을 받친 흙을 적셨다.
이제 저에게는 이름이 생겼건만,
죽은 제 형제들은 죽어서도 이름이 없었다.
털썩.
간신히 몸을 지탱했던 무릎이 한없이 고꾸라졌다.
“흐으윽···!”
필사적으로 다물어진 치아 사이로
차마 막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불행한 과거는
다정했던 형제들과 함께 이곳에 묻혀있을 뿐이었다.
“···우리 생을 망친 부모에게는 이미 복수했으니,
우릴 죽음으로 내몬 자들을 지옥으로 보낼 겁니다.”
그 정도는 아버지도 무어라 하시지 않을 터였다.
작금의 사아에게 사냥개 몇 마리를 처리하는 것은
천마에게 미리 허락을 구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벌떡.
사아는 주저앉았던 무릎을 일으켜 일어선 뒤,
거대한 봉분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또 올게요, 다음에 봅시다.”
···죽어서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테니까.
밑바닥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말을 삼킨 채,
사아는 발길을 돌렸다.
***
한편, 호남(湖南) 동정호(洞庭湖).
“담온의 불출석 기권으로 청성의 화원, 승(勝)이오!”
사아의 불참으로 인해
화원은 부전승이나 다름 없는 승을 얻었다.
“에이, 이게 뭐야!”
“우승 후보로 꼽히던 자가 불참이라니!”
잔뜩 몰려든 관중들이 잔뜩 실망하여 외쳤지만,
그렇다고 한들 달라질 것은 없는 일이었다.
“아쉽긴 하나 잘된 일이다.
다음 대련까지 몸을 회복할 시간을 번 셈이니.”
“···네, 사부님.”
녹황의 독려에 화원이 아쉬움을 감추고 답했다.
***
그로부터 열흘 뒤.
화원은 4강에서 남궁(南宮) 소가주에 패하여
무당(武當)의 제자와 3위 결정전이 예정된 상태였다.
“송풍검(松風劍) 제3식, 송자양···으앗!”
“원아! 괜찮으냐?”
대련을 앞두고 송풍검을 수련하던 화원이
진법을 밟다 발이 엉켜 넘어질 뻔하였다.
놀란 녹황이 달려와 화원을 살폈다.
“발목이 아프지는 않고?”
“예, 괜찮습니다···.”
시무룩한 원을 보며 녹황이 한숨을 쉬었다.
“남궁 소가주에게 진 것이 그리 신경이 쓰이더냐?”
도리도리.
녹황의 넌짓한 물음에 화원이 고개를 저었다.
“···부담스러워서 그렇습니다.”
주어 없는 짧은 토로에도
녹황은 제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사람들의 기대와 응원이 무거운 모양이구나.”
끄덕.
어린 제자의 자그마한 긍정에
녹황이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원아, 일전에 몽유루에서 한 말을 기억하느냐?”
녹황의 물음에 화원이 고개를 들었다.
“내 그날 너에게 그런 말을 했었지.
우리는 훗날 장문의 자리를 이을 제자이기에,
점점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그제야 화원은 기억을 떠올린 듯,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지켜야 할 것들을 전부 합치면
무엇이 되는지, 무어라 불리는지 아느냐?”
녹황의 질문에 고민하던 화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녹황이 화원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기며
답을 알려주었다.
“책임, 책임이라고 하는 것이다.
장문인께서, 내 사부님께서, 내가, ···그리고
앞으로는 너 또한 짊어져야만 하는 것이지.”
그리 말하는 그의 눈동자에 옅은 슬픔이 담겼다.
어린 제자에게 최대한 늦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을,
이제는 이를지라도 가르쳐야만 할 때였다.
“우리는 청성을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다.
모두가 너를 보며 청성의 미래를 가늠할 것이다.
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앞으로의 청성을 대표하게 될 것이니라.”
녹황의 말에 화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하여, 나는 너에게서 부담을 덜어 줄 수 없다.
되려 더 크고 무거운 짐을 네게 얹을 것이다.
···무겁고 힘겨워도, 이제부터는 원이 네가
스스로 감당해야만 하는 것들이니라.”
녹황은 말을 마치고 뒤로 물러났다.
“다시 해보아라.”
“···네, 사부님.”
화원은 손에 든 검을 바로 잡고는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그날, 어린 제자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도
스승은 더는 달려와 제자를 받아주지 않았다.
***
“···승자는 청성의 화원! 화원이오!”
“와아아-!!”
그로부터 이틀 뒤,
청성의 대제자 화원이 무당의 대제자를 꺾고
중원무림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였다.
“이거, 몇 년만 지나서 저 도사가 자라면
청성이 천하제일이 되는 것 아니오?”
“아직 어리니 더 두고 보아야지!”
“청성이 늘 제자리걸음만 하였는데,
저 어린 도사가 이런 성취를 보이다니!”
화원의 활약에 구경꾼들이 저마다 입을 모았다.
“이런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냥 어린 도사라고 불러야 쓰나.”
질 좋은 비단옷을 갖춰 입은 소년의 말에,
구경꾼들이 옳다꾸나 말을 얹었다.
“맞소! 요즘 개나 소나 별호를 달고 다니는데,
저런 천재야말로 별호가 필요하지 않겠소?”
“청성신동(靑成神童)?”
피식.
비단옷의 소년이 비웃자,
청성신동을 제안했던 사내가 버럭 소리쳤다.
“아, 비웃을 거면 괜찮은 거 말이나 하던가!”
그 말에 소년의 눈이 갸름하게 좁혀졌다.
곧, 소년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청성신풍(靑成新風). 지금은 이 정도가 적당해.”
“뭐야, 발음만 조금 다르구만.”
청성신동을 제안했던 사내가 투덜거렸다.
“청성신풍이라···. 좋은 것 같소!”
“맞아, 그간 정체되었던 청성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니 딱이오!”
그러나 주변 구경꾼들은 좋다고 외쳤고,
그날로 화원의 별호는 청성신풍이 되었다.
‘이 정도면 지난 무례의 사죄로는 충분하겠군.’
청성신풍을 외치며 열광하는 이들을 뒤로하고
비단옷의 소년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정갈한 복장을 한 시녀가
소년의 뒤로 익숙한 듯 따라 붙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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