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만 모르는 벗 (3)

사아가 덩치의 목을 꺾으려던 순간-
“끄흐윽-!”
사아의 뒤를 치려던 또 다른 사내가
주인 모를 검에 의해 몸이 꿰뚫렸다.
투둑.
누군가 있음을 알아챈 사아가
재빠르게 덩치의 목을 꺾어 죽였다.
“괜찮으십니까?”
저를 도운 이를 확인한
사아의 눈이 드물게도 크게 뜨였다.
‘화원?’
제가 잠시 담온이란 가명을 쓰던 때,
호기심에 벗을 자처했던 어린 도사였다.
“···아, 나는 괜찮다.”
사아의 답이 얼핏 수상할 만큼 느렸으나,
첫 살인에 경황이 없던 화원은 가슴만 쓸어내렸다.
“다행입니다. 헌데 저 소년은···.”
안타까움이 가득한 화원의 눈이
심장이 파인 소년의 시체를 살폈다.
“춘생, 봄에 태어나 그 이름이었다.”
사아의 말에 화원이 탄식했다.
“저 마교 놈들 손에 당한 겁니까?”
“···내가 너무 늦었다.”
사아가 입고 있던 백색 장포를 벗어
소년의 시체를 감싼 뒤 안아 들었다.
귀하고 고운 백색의 비단이
검붉은 피로 순식간에 얼룩이 졌다.
“일단은, 이 아이부터 데려다주지.”
화원이 이곳에 온 이유를 묻는 것은,
춘생의 일을 마무리 지은 다음의 일일 것이다.
똑똑.
사아가 춘생의 집 앞에 멈춰서자,
뒤따르던 화원이 앞으로 와 문을 두드렸다.
“나가요~!”
곧이어 춘생의 어미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아유, 나으리! 춘생이 보러 오셨어요?”
익숙한 듯 반갑게 맞아주는 여인 앞에,
사아가 조용히 품에 든 춘생을 내밀었다.
“···춘생이 변을 당했다.”
그제야 여인의 시선이
온통 붉게 물든 장포로 향했다.
“그, 그게···그게 무슨···!”
덜덜 떨리는 손이 장포를 살짝 걷어내자,
마침내 시퍼렇게 변한 춘생의 낯이 보였다.
“아···아아···! 아아악-!”
어미는 그렇게 죽은 아들을 끌어안고
날이 새도록 울부짖었다.
***
사아는 흘깃 제 옆에 앉은 화원을 보았다.
그와는 달리 화원은 춘생과 모르는 사이였지만,
춘생의 장례부터 입관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더니
마지막 날에는 제까지 올려 주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따라 형제들이 묻힌 봉분까지
함께 와서 자리를 지키고 앉은 것이었다.
“···고맙다.”
“많이 아끼는 아이셨나 봅니다.”
끄덕.
사아의 짧은 끄덕임에 화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이런 일들이 다 처음이라,
아직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습니다.”
“처음 치고는 한 번에 깔끔하게 죽이던데.”
사아의 칭찬 아닌 칭찬에
화원이 볼을 긁적이며 머쓱하게 말했다.
“그냥, 워낙 급박한 때라 그런지
몸이 저절로 휙 나가더라고요.”
“하긴, 그 유명한 청성진룡이니.”
사아의 말에 화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ㅈ, 저를 아십니까?!”
그 반응에 사아가 뭘 그리 놀라냐는 듯,
픽 웃으며 답했다.
“지금 강호에 몸 좀 담갔다 하는 이들 중에
청성진룡을 모르는 자도 있나?”
그 심드렁한 대꾸에 화원이 푹,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부끄러우면 귀가 빨개지는군.’
겉보기에는 꽤나 잘 자란 것 같은데,
알맹이는 9년 전의 꼬맹이가 그대로였다.
“이곳에는 왜 온 거지?”
화제도 돌릴 겸 궁금증도 풀어야지 싶어
가벼운 척 던진 질문에 화원이 반응했다.
“···제가 태어나던 해,
감숙에 큰 변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3년간 감숙 곳곳을 다니시며
마교에게 피해를 입은 이들을 도우셨고요.”
화원의 말에 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성이 이 마을을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만들었더군.”
제 기억 속의 마을은
결코 사람이 살아갈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청성의 손을 거쳐 복구된 마을은
이전과 달리 웃음이 넘치게 흘렀다.
“그래서 와보고 싶었습니다.
이곳에서라면 제가 이루고자 하는 바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리 눈을 빛내며 결심하더니,
아직도 이루고자 하는 바를 찾지 못하였나.
사아의 눈동자에 작은 안타까움이 스몄다.
“헌데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이루고자 검을 드는지···.”
사아가 화원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였다.
“꼭 검으로 무엇을 이룰 필요는 없지 않나.”
사아의 말에 화원의 고개가 설핏 기울었다.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든,
검은 그저 수단일 뿐이니 말이야.
이루는 과정에서 검이 필요하면 검을 쓰고,
붓이 필요하면 붓을 들면 되는 게 아닌가.”
“아···.”
화원이 멍한 표정을 하자,
새삼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 사아가 웃음을 흘렸다.
“검으로 이뤄야만 하는 뜻은 없다.
그러니 그저 그대의 마음이 원하는 바를 살펴봐.”
끄덕끄덕.
화원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나 지금이나 꼭 사람 좋아하는 강아지 같군.’
화원은 듣지 못할 감상을 떠올린 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이 다음 목적지는 정했나?”
그러자 화원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저었다.
“뭐, 정처 없이 떠도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지.”
“···이제 가시려는 겁니까?”
사아의 태도에서 떠나려는 기색을 읽었는지
화원이 애처로운 눈으로 물었다.
“이래 봬도 꽤 바쁜 몸이라서.”
무슨 사내가 눈을 저리 애처로이 뜨나.
화원의 눈을 마주한 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연이 닿으면 또 만날 수 있겠지.”
이곳에서 다시 만난 것처럼.
뒷말을 삼킨 사아가 그저 미소만 띄웠다.
“일단은 사천으로 돌아가서
당가의 가주님을 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헤어짐이 아쉬웠던 화원이
급하게 자신의 일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제가 유람을 한다는 소식에
당가의 가주님께서 한번 들리라 하셔서요.
그다음엔 귀주와 강서를 거쳐서
해남으로 갈 것입니다.”
당가야 같은 사천에 있고,
당가의 가주와 청성의 태상장문이 벗이니
방문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해남은 왜 가는 거지?
딱히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의외의 목적지에 사아가 묻자,
화원의 귀 끝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 제가 바다를 본 적이 없어서요.”
화원의 말에 사아의 날렵한 눈매가
땡그랗게 커졌다.
“바다를 본 적이 없다고? 한 번도?”
끄덕끄덕.
말 없는 고갯짓에 사아가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도사들이라지만,
키우는 아이를 산속에만 처박아 두다니···.’
사아의 반응에 화원이 슬쩍 물었다.
“···바다, 가보셨습니까···?”
사아는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가보기만 했겠어?
바다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았을걸.”
사아의 답에 화원의 눈이 초롱해졌다.
***
‘사람이 이리 반짝일 수 있을까?’
사아는 몰랐겠지만,
화원이 흥륭산에 남은 이유는 그저 사아였다.
춘생이 살해당하던 순간,
심상찮은 기운에 달려오던 화원은 전부 보았다.
사아가 장검을 던져 마교 여인의 목을 꿰뚫고,
단숨에 거리를 좁혀 덩치 큰 마교 놈의 목을
한 손에 틀어쥐던 모습을.
사아는 남은 마교 하나를 화원이 처리했다며
공을 넘겨주었지만, 화원은 보았다.
사아의 남은 손이 슬쩍 단도를 쥐던 것을.
‘내가 아니어도 홀로 처리하고도 남았을 거야.’
게다가 낯선 자신의 등장에
바로 덩치의 목을 꺾고는 경계를 갖추었다.
게다가 흥륭산에 함께 머물며 지켜본 그는
춘생의 장례와 입관까지 챙겨줄 만큼 다정했다.
머무는 내내 죽은 이들의 봉분을
매일 와서 살피는 모습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놓치고 싶지 않아.’
하여 화원은 사아를 이대로 놓치기 싫었다.
“···바다, 가보셨습니까···?”
바다에 가본 적 없다는 말에
사아의 눈에 스며든 안쓰러움을 읽었다.
“가보기만 했겠어?
바다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았을걸.”
퉁명한 대답이 화원의 생각에 확신을 더했다.
‘당장은 어쨌든 가셔야 하는 거겠지?
바쁜 일이 있다고 하셨으니까···.’
다음을 확실히 기약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스스로 관계를 만든 적이 없는 탓이었다.
‘원래 벗끼리는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거다.’
문득, 지난날 멋대로 저를 흔들고
재회를 기약하더니 사라진 벗이 떠올랐다.
벗이면 되겠다.
허면 나를 만나러 와 달라고도,
내가 만나러 가겠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화원이 해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만큼 빛나는 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내 그대를 벗이라 여기어도 되겠습니까?”
이를 마주한 사아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대는 참 맑은 사람이군.
좋아, 그리하지.”
됐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화안이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미 벗인 줄도 모르고 벗이 되자니,
감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군.’
그런 사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안이 신이 난 듯 말을 붙였다.
“지금은 바쁜 일이 있다고 하셨고,
저도 어차피 당가에 가야 하니까···.
열흘 뒤, 노주(瀘州)로 와주실 수 있습니까?”
그 당당한 요청에 사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벗께서 명하시는데,
이 몸이 따라야지 별수 있겠는가.”
귀검대에 이번 일의 책임만 물으면 되니,
열흘이면 시간이야 차고 넘친다.
화원이 못내 걸렸던 사아는
그리 생각하며 흔쾌히 약속한 것이었다.
“그럼 노주에서 다시 보는 것으로 하지.”
이제는 진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확약을 받아낸 화안은 미련없이 그를 놓아주었다.
“예, 노주에서 꼭 다시 뵙지요!”
뒤를 향해 휘휘 손을 내저으며,
사아가 날아가듯 빠르게 사라져갔다.
“나도 이제 사천으로 가야겠다.”
사천으로 향하는 화원의 발걸음이
여느 때보다도 가볍고 또 쾌활하였다.
***
천마궁(天魔宮) 지하 감옥.
사아가 싸늘한 눈동자로 옥사를 훑었다.
“저것들인가?”
꿀꺽.
사아의 곁에 선 악소가 마른침을 삼켰다.
옥사에 묶여 있는 것이 제 부하들인 탓이었다.
“고작 교대 시간 하나를 못 지켜서
내가 흥륭산에서 피를 보게 만들었다라···.”
악소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얼핏 한없이 나른해 보이는 저 얼굴은,
사아가 여느 때보다 잔혹한 순간에 드러나는 것임을.
‘괜히 부하랍시고 편들면 나부터 죽는다.’
이곳은 마교였다.
정파의 무림인들처럼 의리니 뭐니 찾았다가는,
그냥 무능하고 쓸데없는 인간으로 찍힐 뿐이었다.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악소가 입에 재갈을 무느라 소리도 못 내고
끙끙거리는 제 부하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시간도 가늠을 못 하는 눈깔은 뽑아 버리고,
보고도 안 하는 혀는 잘라 버려라.”
“예, 군단장.”
말을 마치고 감옥에서 나서려던 사아가
끝내 한마디를 더했다.
“쓸데도 없는 다리는 짐승들 먹이로 주면 되겠군.”
쾅.
사아는 대답조차 듣지 않고 감옥을 빠져나갔다.
“에휴, 그러게 이놈들아.
내가 잘 좀 하자고 할 때 잘들 좀 하지.”
악소가 혀를 끌끌 차며
산 채로 눈이 뽑히고 혀가 잘린 채
들짐승 먹이로 던져질 부하들을 애도했다.
***
천마궁(天魔宮) 태건전(迨健殿).
천마가 침상에 누운 사아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일은 잘 처리하였느냐?”
끄덕.
아비의 나긋한 음성에 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다 큰 녀석이 귀엽게 구는구나.”
천마가 언제나 사아를 어린아이처럼 아껴서일까.
사아는 그의 앞에서만은 항상 어리고 사랑스러웠다.
“아끼던 아이가 죽었다지.”
사아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미주알고주알 떠들지 않아도 천마는 모든 걸 알았다.
“나의 사아가 속이 많이 상한 모양이구나.”
사아가 팔을 뻗어 아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천마는 제 품에 묻힌 아들의 머리를
자상하게 쓰다듬을 뿐이었다.
“어여쁜 것.”
그렇게 사아는 아비의 품에 안겨
못내 털어내지 못한 슬픔을 흘려보냈다.
***
한편, 그 시각.
“오, 청성진룡! 어서 오시게!”
“오랜만에 뵙습니다, 당 가주님.”
당가(唐家)에서는 청성진룡 맞이하기에 한창이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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