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同床異夢) (2)

밤이 깊을수록 화려히 빛나는 높은 주루에
짐꾼 하나가 조용히 들었다.
그가 익숙한 듯 발걸음을 옮긴 곳에는
화려한 차림의 기녀 하나가 앉아있었다.
“일은 잘 끝냈니?”
기녀의 물음에 짐꾼이 공손히 답했다.
“예, 말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찰그락.
두둑한 돈주머니 하나가
짐꾼의 발 앞으로 떨어졌다.
“이거면 네 어린 딸은 살겠구나.”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내가 눈물을 흘리며 돈을 품에 안았다.
폐병에 걸려 치료도 못 받고 죽어가는
어린 딸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 하랴.
“그 어린 것이 아비 없이도 괜찮을까?”
기녀가 걱정하는 듯 묻자,
짐꾼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함뿍 웃으며 답했다.
“제가 없어도 아내가 잘 키울 겁니다.”
현명하고 다정한 아내이니,
무능한 제가 없어도 잘 살아가리라.
“저는 이것이면 됩니다.
딸아이만 무사히 낫는다면 다 괜찮아요.”
짐꾼의 다짐 같은 말에
기녀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부모를 두었네, 그 아이는.
가봐, 너무 고통스럽지는 않길 바랄게.”
마지막을 바라보는 인사에
짐꾼이 공손히 절을 올리고 주루를 나섰다.
“영아, 게 있니?”
홀로 남은 기녀의 부름에
숨어있던 그림자 하나가 나와서는 답했다.
“하명하십시오.”
“방금 나간 사내, 아마 의원을 찾아갈 거야.
네가 가서 살펴주렴.”
아비가 죽고 나서 의원이 모른 체 하면 어쩌니.
덧붙은 기녀의 걱정에
그림자가 조용히 사라져 사내의 뒤를 따랐다.
***
한편, 들려온 비명에 달려간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감히, 감히···!”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노령의 여인은
당가에 평생을 충성해 온 하녀장 유금이었다.
그녀의 시체를 본 당선욱이 크게 분노했다.
“어떤 잡놈이 감히 당가의 사람을 건드려!!”
유금의 손을 타지 않은 당가의 직계가 없기에,
당가 핏줄이 아님에도 그 죽음은 파장이 컸다.
“···! 아정이, 아정이가 없어요!”
유금의 시체를 보고 눈물을 흘리던 당해란이
문득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아정은 올해로 고작 5살이 된 어린 여아로,
유금의 하나뿐인 손녀였다.
아들이 사고로 죽고 며느리는 산고로 죽어,
유금이 손녀를 당가에 들여 키웠던 것이다.
“너! 너 아정이 못 봤어?”
당해문이 유금의 시체를 처음 발견한
하녀의 어깨를 붙들고 물었다.
“모, 못 봤어요···!
제가 왔을 땐 하녀장님만 여기 이, 이렇게···.”
“젠장···! 대체 어떤 새끼가!”
당해문이 분을 이기지 못해 바들거리는데,
모여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시종 하나가 외쳤다.
“방호! 방호가 안 보입니다!”
그 말에 모두의 눈동자가 시종에게 향했다.
당가 모든 식솔들의 분노가 사라졌다는
방호에게 쏠리던 순간-
“그자가 이 자리에 없으면 안 됩니까?”
화원의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 말에 당가 식솔들의 이성이 돌아왔다.
“그 방호라는 자가 무엇을 하는 자입니까?”
“···짐꾼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여기에 있는데,
그자만 보이지를 않아서···!”
제게로 의심이 쏠리는 듯하자,
초조해진 시종이 두서없이 답했다.
“짐꾼이면 오가는 일이 많을 터이니,
범인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군요.”
화원의 말에 시종이 반색하며 덥썩,
미끼를 물었다.
“그렇지요! 그자가 범인일 겁니다!”
화원이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헌데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짐꾼이
그 방호라는 자 하나뿐입니까?”
“그, 그것이···.”
시종이 우물쭈물 답을 하지 못하자,
당청헌이 매서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저자를 포박하고 방호라는 자를 잡아 오너라!”
당가의 무사들이 빠르게 시종을 포박했고,
몇몇은 방호를 찾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고맙네, 청성진룡.
자네가 아니었다면 저놈은 잡지 못 했을 게야.”
당청헌이 건넨 말에 화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야 돌아가신 분을 잘 모르니까요.
다만 그 아정이라는 아이가 걱정입니다.”
“···찾아야지. 범인도, 아정이도 모두.”
당청헌의 눈동자가 밤을 담아 가라앉았다.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수는 뼈에 새기는 것.
당가의 핏줄을 타고난 이라면 모두가 그러했다.
“흐으아아악-!”
달이 지고 해가 지고 또 달이 지는 동안에도
당가는 복수를 멈추지 않았다.
***
유금이 죽은지 일주일이 되는 날,
당가에서는 시종과 방호의 고문이 한창이었다.
“흐아악-!! 죽여!! 차라리 죽여-!!”
“끄으윽···!”
시종은 더 아는 것이 없어서,
방호는 지켜야 할 것이 있어서 입을 열지 못했다.
“말해!! 아정이 어디 있어?!”
당해문이 방호의 멱살을 쥐고 흔들자,
뒤에서 지켜보던 당해란이 그를 떼어내며 말했다.
“해문아, 고문에도 열리지 않던 입이야.
고작 멱살잡이에 열리겠니?”
당해란의 길고 뾰족한 손톱이
방호의 턱선을 느릿하게 따라 그었다.
“어린 딸이 있다지? 우리 아정이랑 동갑인.”
“···!”
당해란의 말에 방호의 눈이 홉뜨였다.
“너도 잘 알잖니, 당가가 어떤 곳인지.”
당해란의 얇은 손가락이
방호의 턱을 거칠게 잡아 쥐었다.
“유금만 죽였으면 그래,
그래도 네 선에서 끝이 났을 거야. 그렇지?”
당해란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왜 아정이를 건드렸니, 응?
불쌍한 네 딸년만 괴로워지게.”
쐐기를 박는 당해란의 한마디에,
온갖 고문에도 굳게 다물렸던 입이 열렸다.
“안 됩니다!! 그, 그애는, 제 딸은···!
제가 아닙니다,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제발, 제발 제 딸아이는 살려주십시오, 제발···.”
방호는 쉴 새 없이 제가 아는 모든 것을 고했다.
***
지하에서 빠져나온 당해문이
당해란의 손에 묻은 피를 닦아주며 물었다.
“그 딸 얘기는 왜 지금껏 하지 말랬던 거야?
딸 얘기 나오니까 바로 굽히는데.”
당해란이 제 핏줄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진짜 그 애를 죽이기라도 할 거야?
아니라면, 처음부터 꺼내는 건 효과 없어.
제정신이라면 우리가 안 그럴 걸 알 테니까.”
아무리 당가가 은원이 명확하다지만,
죄인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아이를 죽이지는 않았다.
방호는 당가에서 일하던 자이니,
고문 초반의 제정신인 상태였다면
당해란의 이야기가 허수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역시 내 누이는 총명하네.”
“당연한 거 아니야? 가자, 보고해야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보고하러 가는 두 남매 뒤로,
긴 그림자 하나가 심란하게 늘어졌다.
***
하아.
화원이 홀로 처소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심란한 마음에 일주일 내내 울리던 비명이 담겼다.
‘그 시종은 진짜 더 아는 게 없어 보였는데···.’
차라리 죽여달라는 울부짖음이 어찌나 끔찍한지
밥은 커녕 차 한 모금 삼키기가 힘들었다.
“···너무 심한 거 아닌가.”
하지만 그리 심하게 굴지 않았더라면,
그 방호라는 자의 입을 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라진 아이를 찾는 게 중하긴 하지만···.’
사람을 저렇게 고문해도 되는가 싶었다.
입을 열지 않았던 방호라면 모를까,
처음에 잡힌 시종은 애초에 아는 게 없었다.
‘방호가 부탁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거든
제가 없다고 사람들에게 알리라고요!’
처음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걱정했는데,
유금이 죽고 아정이 사라졌다니 아차 싶었단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고 울부짖는데도,
당가의 사람들은 고문을 멈추지 않았다.
“우욱!”
그 모습을 떠올리니 토기가 올라,
화원이 급히 창문을 열었다.
“하아···.”
사라진 아이를 찾는 것은 분명 응당한 일이다.
그 목적은 정의와 도덕에 어긋남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 이런 방식은···.’
무언가 어긋났다.
그렇다고 당가를 비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평생을 가족처럼 함께한 이가 살해당했고,
그의 유일한 핏줄은 사라졌다.
그 와중에도 방호의 가족은 건들지 않았으니,
당가의 입장에서는 또 할 만큼 한 것이었다.
“의로운 것은 그저 의롭고,
이로운 것은 그저 이롭고,
해로운 것은 그저 해롭게만 여겼건만···.”
청성 안에서는 단순했던 모든 것들이
밖으로 나오는 복잡하게 섥혀 어지러웠다.
“옳음에도 그름이 있던가···.”
화원이 복잡한 머리를 창에 기댔다.
바람은 산뜻하게 뺨을 스치고 가건만,
마음은 그를 따라 경쾌하지 못했다.
“화원 형님, 가주전으로 와달라세요.”
어느새 창 너머로 다가온 당해진이
불쑥, 창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해진 소협, 그러다 창 내려오면
고개가 꺾일 겁니다.”
복잡한 심경을 감추려 화원이 건넨 농에
아무것도 모르는 해진이 킥킥 웃었다.
“고작 창 따위에 제 목은 안 꺾입니다.
제 목에 요 창틀이 꺾이겠지요!”
그 해맑음에 화원이 그린 듯 미소 지었다.
“예, 과연 그렇겠습니다.”
저보다도 어린 당해진이 시종의 손톱 사이로
독침을 박아 넣는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어서 갑시다, 화원 형님!”
해맑게 웃는 제 앞의 소년도
부정할 수 없는 당가의 핏줄이었다.
“앞장서시지요, 소협.”
화원은 껄끄러운 속을 삼킨 채,
해진을 따라 맑은 얼굴로 뒤따랐다.
***
천마궁(天魔宮) 태건전(迨健殿).
사아의 무감한 눈동자가
제 앞에 놓인 아이들을 훑었다.
“지난번보다 어리군.”
사아의 말에 무상이 공손히 답했다.
“마독(魔毒)이 퍼지는 속도가 빨라지고 계십니다.”
그 말에 사아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아직도 내가 중화하는 건 허락지 않으시고?”
“···송구합니다.”
무상의 답변에 사아의 눈동자에 근심이 깃들었다.
“되었다. 그게 어디 무상이 네 잘못이더냐?
내 일이라면 유독 걱정이 많은 분인 것을···.”
마공은 빠르게 쌓이면서도 그 위력이 강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을 좀먹는 힘이기도 했다.
‘온갖 찌꺼기를 한 번에 들이키는 셈이니···.’
마공을 쌓을수록 몸이 감당해야 하는
사기(邪氣)의 양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일정 수준이 되면 자체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생기(生氣)를 흡수하여 기운 자체를 상쇄해야 했다.
그런 이유로 사아는 제 심법의 특성을 활용하여
천마의 사기를 제 몸으로 끌어와 중화시키는 방식을
몇 년째 건의하는 중이었으나-
“교주님께서 걱정하실 만한 사안입니다.
새로운 방법을 시도한다고 그분께 무리는 없겠으나,
사아님께는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모르는 일입니다.”
사아에게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이유로
천마는 완고하게 거부하는 중이었다.
“너는 이 와중에도 아버지 편이구나.”
무상은 천마가 나아지기를 바라면서도
그가 아들인 사아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기에
제대로 사아의 편에 서 주지 않았다.
“되었으니 이만 가보거라.
아버지를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야 되겠느냐?”
체념한 듯 내려진 사아의 축객령에
무상이 예를 갖춘 뒤 아이들을 끌고 사라졌다.
홀로 남은 사아가 침상에 털썩 몸을 뉘였다.
“열흘이라 하였던가···.”
홀로 남은 사아가 화원과의 약속을 떠올렸다.
약속한 열흘이 되기까지 사흘도 남지 않은 때였다.
“담온을 기억할지 모르겠군.”
어느덧 근심을 덜어낸 사아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떠올랐다.
“···벗, 벗이라···.”
화원을 보고 있자면 아버지인 천마가
제게 보여준 애정이 이해되는 듯했다.
왜 나를 아끼시는가 늘 궁금했건만,
아끼는 마음에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아의 밤이 또 하루 깊어 갔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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