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산수기천하(桂林山水欺天下) (2)

“그럼 담온은 마을 사람들이 귀주 사건에···.”
꿀꺽.
화원이 낮은 소리를 내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사아의 의심이 사실이라면-
“공범이거나 방관자겠지.”
고저 없는 한 마디가 화원의 귀에 박혔다.
마교에 이웃과 가족을 팔아먹다니,
끔찍하고 참담한 일이 아닌가.
“···설마, 아무리 그래도 어찌 마교와···!”
화원은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사아는 그런 벗을 보며 씁쓸히 헛웃음을 흘렸다.
“사람은 한없이 이기적이고 간사한 존재지.
한 번 득을 보기 시작하면 멈출 줄을 모르거든.”
나도 마찬가지고.
늘어진 입꼬리 뒤로 삼켜진 말은
끝내 사아의 입술을 넘어가지 못했다.
“신중히 접근해야 할 문제입니다.
아직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 지켜봅시다.”
끄덕.
화원의 곧은 눈동자를 마주한 사아가
흐트러진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철컥.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가라앉은 공기를 갈랐다.
“허허허, 나를 찾으셨다고?”
인자한 얼굴의 노부가 지팡이를 짚은 채 다가왔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노부인의 얼굴이 익숙하니,
화원과 사아는 곧 노부가 촌장임을 알아차렸다.
“촌장님이십니까? 저는 화원이라 합니다.
이 친구는 담온이라고 저와 함께 유람 중이고요.”
본디 숙이지 않는 사아의 몫까지
화원이 대신하여 소개하며 인사를 건넸다.
“귀한 집 자제분들 같은데
어찌 이런 촌구석까지 오셨어, 그래.”
허허로이 웃으며 반겨주는 촌장을 보자니,
화원은 의심을 품은 것에 죄책감이 들 지경이었다.
“계림의 산수가 워낙 유명하지 않나.
내 벗과 함께 걷다 보니 이리 깊이 와버렸더군.”
그런 화원을 알기에,
좀처럼 나서지 않던 사아가 말을 대신 받았다.
“그렇구만. 예서 며칠 묵어가려는 모양이지?”
“그래, 방을 내어주면 사례는 충분히 하겠다.”
촌장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사례는 무슨! 편한 대로 머물다 가시게.
여보 부인, 손님들 방으로 모셔주오.”
“그러지요, 따라들 오셔요.”
화원과 사아가 노부인의 안내에 따라
사랑채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각자 쓰시려오?”
노부인의 물음에 사아가 고개를 저었다.
“하나면 충분해.”
어차피 광서에서는 천마에게 연락할 필요도 없으니,
수상한 공간에 벗을 홀로 둘 이유가 없는 탓이었다.
“호호, 사이 좋은 벗님들이시네.
방에서 쉬고들 있어요, 저녁 다 되면 부를게.”
탁.
노부인은 말을 마친 뒤,
방문을 닫고 유유히 사랑채를 나섰다.
하아.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화원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저분들이 마교와 한 패일까요?”
친절이 당연한 세상에서 살아온 화원이라,
처음 품게 된 의심에 울상을 지었다.
“사람은 겉만 봐서는 모르는 법이야.”
저들이 어떤 짓을 일삼으며 살아온 줄 알고.
이미 전부를 아는 사아의 눈이 싸늘히 가라앉았다.
덥썩.
사아의 큰 손이 봉투를 열고
하나뿐이 안 남은 찐빵을 집어 들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것들이,
알고 보면 가장 끔찍한 것일 수도 있지.”
크게 물어 삼킨 찐빵에서는
광서 특유의 고기 맛이 진하게 배어났다.
“그러니 겉모습에 속지 말라는 거다.”
사아의 남은 손이 툭,
화원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예, 조심하겠습니다.”
화원의 얼굴에는 일견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제가 경계해야 할 것이
이미 제 속에 들어앉은 것도 모른 채.
“그래, 꼭 그리하도록 해.”
사아의 얇고 붉은 입술이
흡족함을 담아 한없이 말려올랐다.
***
달이 져가는 늦은 밤.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기와 아래로 은밀하게 숨어들었다.
“···은 왜······그래요?”
노부인의 낮은 말소리가
창 너머로 따문따문 새어 나는 중이었다.
“답답하긴! 도령···전부······우리···.”
둘 뿐인데도 무엇이 불안한지,
노부부는 자꾸만 말소리를 죽였다.
힐끗.
두 검은 그림자가 시선을 주고받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
다음 날 아침,
노부인이 사랑채를 찾았다.
똑똑.
“일어들 났어요?”
방문을 두드리고 물어도 답이 없자,
노부인이 스스럼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유, 젊어서들 그런가 잘들도 자네.
일어나서 아침들 먹어요.”
노부인은 늦잠 자는 아들들을 깨우듯
화원과 사아의 어깨를 살살 두드려 주었다.
“으응···, 아침···?”
비몽사몽한 화원의 목소리에
노부인이 귀엽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아유, 화원 도령은 일어나셨네.
담온 도령도 어서 일어나요, 아침 먹어야지.”
스윽.
조용히 눈을 뜬 사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눈을 비비며 잠을 쫓는 화원을 확인하고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술을 그리 마셨는데 부인은 멀쩡하군.”
전날 밤 노부부는 술을 물처럼 마셨더랬다.
환영한다며 잔을 채워주는 통에 덩달아 한껏 마신
사아와 화원은 숙취에 잔뜩 시달린 얼굴이었다.
“아이구, 아직 한창인데 술이 약하시네.
탕 끓여 두었으니 나와서 먹고 해장들 해요.”
아으으.
화원이 이마를 짚으며 비척비척 일어섰다.
해장이 간절한 모양이라 노부인이 피식 웃었다.
“후우, 가지.”
사아까지 일어서는 것을 확인한 노부인이
두 사람을 이끌고 본채로 향했다.
“허허허, 잘들 주무셨는가?”
먹음직하게 차려진 아침상 앞에는
역시나 멀쩡한 낯의 촌장이 앉아 두 사람을 반겼다.
“이런, 꼴들이 영 말이 아닐세 그려.
어여들 앉아서 탕 좀 드시게나.”
털썩.
의자에 주저앉은 화원이
잘 차려진 아침상을 보고는 화색을 띠었다.
“어제 저녁부터 느낀 것이지만,
존부인께서 음식 솜씨가 정말 훌륭하십니다.”
화원의 생글한 칭찬에
노부인이 기분 좋게 웃으며 탕을 떠주었다.
“고기 많이 넣고 푹 끓였으니 많이들 드세요.”
끄덕.
사아가 노부인이 건넨 탕을
스스럼없이 받아서는 순식간에 그릇째로 비웠다.
“이제 좀 살겠군.”
탕을 들이켜고 나니 정신이 나는 모양이라,
촌장이 먹성 좋은 두 청년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촌장님, 마을 구경을 하고 싶은데
돌아볼 만한 곳이 있겠습니까?”
화원의 물음에 촌장이 턱을 매만졌다.
“글쎄, 워낙 보잘것없는 마을인지라···.
길 따라서 한 바퀴 둘러보면 그게 다일 걸세.”
“그럼 길 따라 한 바퀴 둘러보면 되겠군.”
사아가 무상하게 건넨 말에
화원이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유, 사이가 좋으니 참 보기도 좋으네.
어려서부터 이리 친했어요?”
흐뭇한 노부인의 물음에
화원이 고개를 피식 웃으며 답했다.
“어렸을 때 벗이 되긴 했습니다.”
“그래요? 고향 친구인가? 어디 출신이에요?”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질문에
사아의 나른한 눈동자가 슬쩍 가라앉았다.
“고향 친구는 아닙니다.
저는 사천 출신이고, 담온은 감숙 출신이라서요.”
“고향도 다른데 어떻게 만났을까?
두 도령의 인연이 참 깊은가 보네.”
그러나 화원은 여전히 생글한 낯으로
노부인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을 해주었다.
“음···. 일종의 교류회 같은 게 있었는데,
거기에서 서로 처음 만나 벗이 되자 하였습니다.”
“호호호, 귀한 집 도령들 다우네.”
노부인이 사람 좋게 웃으며
옆에 앉은 촌장에게 힐끗 눈짓하였다.
“아이고, 나는 이만 일어나야겠네.
마저들 먹고 구경들 재미있게 하시게나.”
노부인의 눈빛을 받은 촌장이
허허로이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유, 저 양반도 참.
신경 쓰지 말고들 편히 먹어요.”
피식.
“그러지.”
사아가 한가로이 식사를 마저 이었다.
먹음직한 음식 냄새 틈으로
청성의 추적향이 바람에 실려 들었다.
‘의외로 능글맞은 구석이 있었군.’
제게 닿는 시선을 눈치챈 화원이
사아를 향해 보란 듯 미소를 지었다.
***
헉. 허억.
흑의인 하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쉴 새 없이 발을 구르고 달렸다.
‘에이씨, 뭔 늙은이가···!’
경공으로는 모자람이 없는 실력이건만,
죽어라 달리는데도 뒤따라오는 노인 하나를
여태 따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놈아, 거기 서보라는 데도?”
심지어 숨이 차 말도 못하는 흑의인과는 달리,
쫓아오는 노인은 여유가 만만한 채였다.
“허억···젠, 장···!”
다리에 힘이 자꾸만 풀려간다.
붙잡히는 순간 모든 게 끝이라는 걸 아는데도
나약한 정신은 자꾸만 포기하라 권해 왔다.
“기어이 스스로는 멈추지 않을 셈이더냐?”
냉랭하게 불어오는 노인의 목소리에
흑의인은 저도 모르게 찌릿 몸서리를 쳤다.
‘이런 우라질! 독기가 가득한데 어떻게 멈춰?’
잡히면 반드시 죽는다.
독살스러운 기운을 느낀 흑의인이
둔해지려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려는데-
푸욱.
“끄아아아악-!!”
운문이 음각된 늘씬한 검 한 자루가
소리 없이 날아와 흑의인의 오른 다리를 꿰뚫었다.
“쯧쯧, 그러게 멈추라지 않았느냐.”
쑤욱.
어느새 성큼 다가온 노인이
흑의인의 다리에 꽂혔던 제 검을 거침없이 뽑아냈다.
“흐아아악-!! 흐으으···.”
흑의인이 다리를 부여잡고 몸서리를 치건만,
바라보는 노인의 눈동자에는 한 줌 동정조차 없었다.
“‘흑오(黑五)’. 네 놈들을 그리 부른다지?”
검에 묻은 피를 산뜻이 털어내며
노인, 홍류가 무심한 투로 말을 이었다.
“마교의 견자(犬者)들이 어찌 내공을 쓰는고?”
“···!”
홍류의 물음에 흑의인의 눈이 사정없이 커졌다.
‘저 늙은이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온 거지?’
주륵.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검에 꿰뚫린 다리의 고통조차 잊혀질 지경이었다.
“네가 개중에 셋째이니···,
삼영이 네놈의 이름이겠구나.”
흉살스럽다.
아무리 마교도를 마주했다 하나,
도사의 눈이 저리 흉살스러울 수 있는가?
삼영이 마른 입에도 꿀꺽 침을 삼켰다.
“어떠냐? 네 이제 무엇을 해야할지 알겠더냐?”
끄덕끄덕.
삼영의 고개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의리니 무엇이니 자신들에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 하문하십시오!
제가 아는 것은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부요···!”
엎드려 생을 구걸하는 삼영을 보며
홍류가 비웃음을 삼키지 않고 터뜨렸다.
‘인피(人皮)를 뒤집어쓴 버러지로구나.’
홍류가 쪼그려 앉아 엎드린 삼영의
어깨를 토닥이며 따스하기 그지없는 투로 말했다.
“오냐, 내 너를 필히 살려줄 것이다.”
너 같은 버러지들이 죽음으로 편해져야 쓰나.
인자로운 가면 뒤로 삼켜진
홍류의 지독한 속내도 모른 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주의 일이 궁금하십니까? 아니면 점창?”
삼영이 필사적으로 바르작거렸다.
***
천마궁(天魔宮) 천마전(天魔殿).
한갓지게 침상에 드러누운 천마의 앞에
무상이 굳은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무상아, 이번엔 어디까지 잘라야 좋겠느냐?”
심각한 낯의 무상과는 달리
천마의 목소리에는 귀찮음만이 잔뜩 묻어났다.
“···흑오는 소교주님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들의 윗선을 타고 올라온다면,
소교주님의 호위군까지는 드러날 것입니다.”
하아.
천마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흑오라면 흑살대(黑殺隊)의 소속이겠구나.”
“네, 그렇습니다.”
톡, 톡.
천마의 손가락이 까딱까딱 침상을 건드렸다.
곧 고요를 깨고 여지없이 나른한 목소리가 흘렀다.
“처리하거라.”
천마의 명에 무상이 부복했다.
“예, 교주님.”
훠이.
천마의 손짓에 무상이 군소리 없이 물러났다.
“흑살대를 집결시켜라.”
충실한 개들은 영문도 모른 채 명령에 따랐고-
“크억···!”
“살려···줘···.”
“어, 째서···저희를···?”
충직의 대가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유를 묻지 않는 충정에 걸맞는 종말이리라.
수많은 죽음으로 쌓아 올린 십만대산이
새로 쌓은 죄인들의 피륙만큼 높이를 더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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