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산수기천하(桂林山水欺天下) (3)

마을을 걷던 화원과 사아는
어느새 마을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였다.
“와! 이 형아 사천 사람이래!”
“나중에 사천에 놀러 오렴.”
“형아! 감숙은 어디에 있어요?”
“···멀리.”
아이들은 왁자지껄 저마다 떠들었고,
화원은 물론 사아까지도 나름 성실하게 답해주었다.
“근데 왜 형아들은 다른 손님들이랑 따로 왔어요?”
개중 가장 어린 아이의 물음에
화원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내었다.
“야! 손님들 얘기 함부로 하면 큰일 나!”
“왜? 이 형아들도 손님 아니야?”
“그 손님들이랑 다른 손님이라던데?”
아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화원이
은근슬쩍 끼어들어 물었다.
“손님들? 우리 말고 누가 왔었니?”
“형아들은 그 손님들이랑 다른 손님이에요?
그럼 말하면 안 돼요!”
처음 말을 꺼냈던 아이가 입을 다물려 하자,
지켜보던 사아가 화원을 거들었다.
“아, 먼저 보낸 이들 말인가?”
난데없는 말에 화원이 그를 힐끔이자,
사아가 고개를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이번 달에 앞서 보냈던 이들을 말하는 것 같은데.”
아하.
그제야 뜻을 알아챈 화원이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아, 그자들 말입니까? 난 또 뭐라고.”
화원과 사아가 능청을 부리자,
순진한 아이들이 그대로 속아 넘어갔다.
“어라? 형아들도 그 손님들이랑 같은 손님이에요?”
“따지자면 그자들보다야 더 높다.”
“와아-! 그분들보다 더 높대!”
피식.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말하는 사아를 보며
화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혹시 그 손님들이 평소 와서 뭘 하는지,
어디를 다니는지 아는 사람 있니?”
화원의 물음에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왜요? 같은 편인데 몰라요?”
한 아이의 똘똘한 물음에
화원이 손가락을 곧게 펴 제 입술에 대었다.
“쉿, 비밀 작전이라 들키면 안 돼.”
“헙! 비밀 작전?”
비밀 작전이란 소리에 솔깃한 아이들이
저마다 눈을 초롱이며 화원을 바라보았다.
“응, 지난번 손님들이 거짓말을 했거든.
우리가 몰래 조사해서 진실을 밝혀내려고 온 거야.”
끄덕끄덕.
아이들의 자그마한 고개가 열성적으로 움직였고,
어린 눈동자들이 비장하게 화원을 향했다.
“비밀, 지킬 수 있어? 엄마랑 아빠한테도?
사람들이 알게 되면
나쁜 손님들이 마을 사람들을 해칠 거야.”
화원이 자그마한 소리로 얘기하자,
아이들도 덩달아 작은 소리로 다짐했다.
“네! 저 아무 말도 안 할게요!”
“저도, 저도 말 안 할 수 있어요!”
그 순진한 모습들에
화원이 앞에 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마워.
이제 순서대로 ‘손님’에 관해 아는 걸 말해줄래?”
화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앞다투어 제가 아는 것들을 늘어놓았다.
“손님들은 어느 달에는 오고, 어느 달에는 안 와요.”
“손님들이 오면 항상 촌장님 댁으로 가요!”
손님의 생김새와 같은 것부터
무엇을 먹고, 어디서 머무르고, 어떤 말을 했는지.
“매번 빈 수레를 잔뜩 끌고 와서,
마을에서 보관하는 고기를 가득 채워서 돌아가요!”
아이들은 제 눈과 귀에 담겼던 것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며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고기는 저~기, 언덕 창고에 어른들이 모아놔요!”
“근데 얼마 전에 손님들이 다 가져가서,
이제는 조금밖에 안 남았대요.”
어딘지 수상한 이야기에 화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을에는 농장 같은 게 없던데,
고기는 어디에서 가져와서 쌓아두는 거야?”
화원의 물음에 아이들이 해맑게 답했다.
“우리 고기는 돼지나 닭 같은 거랑 달라요!”
“맞아요! 어른들이 그러는데,
사람이랑 비슷하게 생긴 원숭이라고 했어요!”
“광서에만 사는 특별한 원숭이라서
다른 지역 사람들한테는 말하면 안 된대요!”
쿵.
화원의 심장이 아찔하게 내려앉았다.
귀주로 끌려간 사람들, 그들이 사라진 곳,
돼지나 닭과는 다른, 광서에만 산다는-
‘···사람과 닮은 원숭이···?’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만 한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은 화원이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언덕 창고에 가면,
원숭이 고기가 아직 남아 있니···?”
끄덕.
“살아있는 원숭이는 없지만요.”
아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원이 성난 걸음으로 언덕을 향해 내달렸다.
하아.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사아가 무겁게 화원을 따라 달렸다.
***
콰앙!
가차 없는 발길질에 창고 문이 부서지듯 날아갔다.
화원의 걸음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었다.
펄럭-
화원이 고기를 덮은 흰 천을 단번에 걷어내자,
잔뜩 엉킨 채 쌓여있는 고깃덩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쑤욱.
화원이 삐져나온 손 하나를 잡아당기니,
잘린 팔이 저항 없이 딸려 나왔다.
“···원숭이, 라고.”
화원의 텅 빈 눈이 제가 쥔 고깃덩이,
아니, 죽어버린 어느 누군가의 팔을 진득히 훑었다.
“담온, 그대 눈에도 이게 원숭이로 보입니까?”
“···.”
시선을 돌리지도 않는 허망한 물음에
사아는 차마 아무 답도 들려주지 못했다.
“저는, 담온, 제 눈에는···.
사람들 시체밖에는 보이지가 않습니다.”
툭.
맑은 눈동자에서 막을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하늘이 어쩌면 이리도 무정하고 모질단 말인가?
화원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는 순간-
‘광서의 고기 맛은 아주 특별합지요!
요 찐빵에도 고기가 많이 들어 풍미가 좋습니다요!’
평범히 흘려보냈던 목소리 하나가 머리를 스쳤고,
‘고기 많이 넣고 끓였으니 많이들 드세요.’
아침에 노부인이 끓인 탕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우욱···!”
마을에 들어서고 먹었던 수많은 음식들,
그중에 고기가 들어간 셀 수 없는 요리들.
지금껏 제 입으로 삼켜 뱃속에 넣은 그 고기들은,
전부 어디에서 왔던가.
“아···으···흐으윽···!”
역겹고 끔찍하다.
화원이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구역질을 해댔다.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지고 목에는 핏대가 섰다.
‘내가,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할 수만 있다면 인육이 든 위장을 도려내고,
그것을 맛본 혀를 뽑아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성을 잃은 화원이 검을 꺼내려는데-
타악!
“정신 차려라, 화원!!”
지켜보던 사아가 순식간에 화원의 손을 쳐냈다.
사아의 외침에 텅 비어버린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혀를 뽑으면 나아지겠나?
위장을 도려내면 기분이 좀 풀리겠어?
지금 그대가 해야 할 건 그런 게 아니지 않은가!”
사아의 호통에 화원이 눈을 글썽이며 물었다.
“허면, 허면 제가 무얼 해야 합니까···?
제게···그럴 자격이나 있습니까···?”
하아.
사아의 한숨이 낮게 퍼졌다.
충격을 받을 줄은 알았으나 이 정도일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처리하라 할 것을.’
걸음을 하루 늦출 요량으로
일 처리를 부러 늦춘 것이 후회가 되었다.
“그대는 그저 저들에게 속았을 뿐이다.
인육인 줄 알고도 먹은 게 아니질 않은가!
벌을 받아야 하는 건 그대가 아니라 저들이야,
사람을 잡아 고기로 만들어 거래하고 요리한 자들!”
사아가 투박한 손으로 화원의 눈물을 훔쳤다.
“그러니 괜한 죄책감에 자신을 놓지 마.”
그건 나의 몫이어야 맞으니.
사아는 심장이 꾸욱 조여드는 듯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화원에게서 고개를 내리깔았다.
‘···나도 죄책감을 느낄 줄은 알았던가.’
사아의 입술을 타고 헛웃음이 흘렀다.
여태 죄 없는 사람을 기백은 더 죽였고,
인육인 줄 알면서도 보란 듯 고기를 먹었다.
‘그 많은 일을 겪어도 아무 느낌이 없었건만.’
그런데 고작-
“그러니 그만 울어.”
벗이 무너져 우는 얼굴에 심장이 조인다.
화원의 어깨를 붙잡은 사아의 손이
천천히 힘을 풀고 쥐었던 어깨를 토닥였다.
“그대가 망가지는 건 못 보겠으니까.”
이름부터가 천마를 이었던 탓일까?
아무래도 자신은 아비를 지나치게 닮은 모양이었다.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대로라면 제가 시궁창에 처박힐 줄을 알면서도-
“못난 것이 아니라 바른 것이겠지.”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벗을 따라 걷고 있으니.
“일단은 나가지.”
다정한 얼굴로 벗을 다독인 사아가
화원을 이끌고 창고를 빠져나왔다.
사아의 복잡한 머릿속에서 하나 둘,
그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 정돈되기 시작했다.
***
화원이 어느 정도 진정된 듯 보이자,
사아가 슬쩍 계획의 운을 떼었다.
“그대는 촌장을 추적해서 진상을 파악해 봐.
나는 남은 이들을 처리할 테니까.”
마을 사람들이야 무공도 못 쓰고,
촌장에게 묻힌 추적향은 청성의 것이다.
사아의 방식이 당장에는 최선이라
화원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어차피 지금쯤 제 집에 있겠지만.”
이 작은 촌락에서 가봐야 어딜 가겠는가.
게다가 이방인 둘이 모처럼 자리를 비웠으니,
촌장은 제 집에 돌아와 있을 공산이 컸다.
화원 역시 같은 생각이라
더 망설이지 않고 나섰던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
철컥.
삽시간에 촌장의 집에 당도한 화원이
싸늘한 얼굴로 대문을 열어 젖혔다.
“응? 벌써들 왔는가?”
조금은 당황한 표정의 촌장이
화원과 사아를 발견하고는 말을 건넸다.
덥썩.
“켁···! 가, 갑자기 무슨···!”
“여보!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화원이 말없이 촌장의 멱살을 틀어쥐자,
당황한 노부인이 소리를 높였으나-
“노부인께서는 나 좀 보지.”
순식간에 뒤따라온 사아가
노부인을 끌고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끼익.
대문이 굳게 닫히고,
아담하고 정갈한 집에 화원과 촌장만이 남았다.
“아이들이 그러더군요.
광서의 고기는 닭도, 돼지도 아니고···.”
화원의 눈동자가 음산하게 가라앉자,
멱살을 붙잡힌 채 허공에 동동 뜬 촌장이
파들짝 놀라 온몸을 덜덜 떨었다.
“사람과 아주 비슷하게 생긴 원숭이라고.”
“···!!”
낭패다.
위험을 직감한 촌장의 낯이 창백하게 희었다.
“헌데 촌장님, 제 눈이 잘못된 것일까요?”
꿀꺽.
촌장의 목젖이 크게 울렁였다.
“제 눈에는 그 고기들이 죄다 사람이더란 말입니다.”
꽈악.
촌장의 멱살을 붙잡은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화원은 태어나 처음으로,
눈앞의 노부를 찢어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전부 말하는 게 좋을 겁니다.
언제부터, 어디에서, 누구를 위해 시작한 일인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전부.”
털썩.
화원이 그대로 손을 풀자,
촌장이 바닥에 처박히듯 떨어졌다.
“허억···헉···.”
촌장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우, 우리도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었네!
처음엔 그저 몇 사람 잡아 넘기면 큰돈을 주기에···.”
오래 기다리지도 않아,
촌장의 입에서 그간의 일이 터져 나왔다.
가난하고 별 볼 일 없는 구석진 작은 촌락.
입에 풀칠도 겨우 하던 이들에게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의의 객들이 찾아왔더랬다.
그들이 끌고 온 수레에는
밧줄에 묶인 사람 몇이 기절한 듯 실려있었다.
‘저것들을 잠시 맡아주면 두 배를 주지.’
흑객(黑客)들은 그리 말하며 돈주머니를 내밀었고-
‘아유,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은 덥썩 미끼를 물었다.
그렇게 처음에는 산 사람 몇이 오가다가
나중에는 그 수가 수십을 넘기 시작했고-
‘시, 시체를 만들란 말입니까?’
‘그래, 오늘 배에 구멍을 내서 죽여 놔.
한 달 뒤에 찾으러 오지.’
어느 순간부터는 시체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멈추어야 하나 생각도 들었으나,
욕망에 절은 이들은 손에 쥔 돈을 놓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리 기근이 심한 것은 처음입니다!’
‘이러다 다 굶어 죽겠어요.’
광서 전역에 유래 없는 기근이 들었다.
돈을 궤짝으로 퍼 날라도 식량이 구해지지 않던 중-
‘···창고에 쌓아둔 시체,
그것도 고기라면 고기 아닙니까?’
굶어 죽게 생겼는데 무엇인들 못 하랴.
한번 선을 넘은 이들은 그렇게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우리만 먹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누이가 내빈에 사는데 굶어 죽기 직전이랍니다.
돈도 넉넉히 준다는데, 고기 조금 보내주십시오.’
우리만 먹는 것이 아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핑계를 타고 인육은 광서 곳곳으로 퍼졌고-
‘저것들은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인 겁니다.’
‘광서에만 사는 특이한 원숭이 고기에요.’
기근이 끝나고서도 인육을 원숭이 고기라며
저희들끼리 즐겨 먹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그게, 그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당신들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사람이냐고!!”
화원의 울분 섞인 외침이 사방에 울렸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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