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귀(血鬼) (1)

분노에 서리치던 화원이
문득 떠오른 의문에 이를 갈며 물었다.
“그 흑객이란 자들은,
맡겨둔 사람들이 사라졌는데 가만히 있었습니까?”
움찔.
그리 흉악한 짓들을 벌여 놓고도
아직도 더 찔릴 것이 남아 있었던가.
초라한 노인의 몸이 벌벌 떠는 소리를 내었다.
“그, 그것이···그분들은 인육 얘기를 듣고는
시체를 처리할 방도가 필요한 차에 잘 되었다고···.”
“아예 자신들이 인육으로 쓸 시체를 넘겼다?”
끄덕끄덕.
혹여나 심기를 거스를까 촌장이 얼른 끄덕였다.
“하! 그자들이 마교도인 걸 알고도···!
마교가 어떤 곳인지를 잘 알면서도 어찌!!”
분을 이기지 못해 파들대는 화원을 보며
촌장이 엎드려 빌다가 되레 억울함을 토로했다.
“사, 살려주시오!! 살려고 그랬네, 살려고!
마교든 무엇이든 사람이 살고 봐야지 않는가!!”
저런 자도 사람이니 살려두어야 하는가?
화원의 손이 기어이 허리춤의 검을 붙잡았으나,
평생을 따라온 도(道) 탓에 차마 뽑지는 못하였다.
“···그 흑객이란 자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기어이 제 화를 억누른 화원의 물음에
촌장이 덜덜 떨며 고개를 저었다.
“매번 다른 곳에서 오고 간다네.
내 말해주고 싶어도 아는 게 없어, 정말이야!”
허망한 일이다.
그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생을 잃었건만,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 알 길이 없으니.
“이곳 외에도 다른 창고가 있습니까?”
끄덕.
“계림에는 우리 마을을 외에 한 곳이 더 있네.
근처의 유주, 내빈, 오주, 하주뿐만이 아니라
광서의 모든 현마다 하나씩은···있을···터인데···.”
촌장이 답을 하면서도 속이 뜨끔했는지
화원의 눈치를 살피다가 스스로 말끝을 흐렸다.
‘광서 전체에 깊숙히도 파고들었구나.’
관은 이 일을 알고 있을까?
마교의 추적은 제 몫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저들이 인육을 하는 끔찍한 자들이라도-
‘내 멋대로 죽일 수는 없다.’
무림에 속하지 않은 양민들이다.
관에 일을 알리고 처리함이 옳다는 걸 알지만,
이런 큰일을 관에서 몰랐을까 의심이 들었다.
“···중앙에 알려야겠군.”
광서의 관을 믿을 수 없다면,
그보다 더 높은 급을 동원하면 되리라.
화원의 중얼거림을 들은 촌장이
턱을 딱딱 부딪히며 불안한 티를 내었다.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화원은 엎드린 촌장을 향해 경고한 뒤,
바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지친 기색이 역력한 화원이
대문을 열고 촌장의 집을 빠져나오는 순간.
“윽, 이 무슨···!”
훅 끼쳐온 불쾌한 피비린내에
화원이 소매를 들어 코를 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 끝났나?”
익숙한 벗의 목소리에 화원이 고개를 들었다.
“이쪽은 전부 끝났다.”
핏물이 곳곳에 고여버린 길을 따라
말끔한 차림의 사아가 자상히 웃으며 다가왔다.
“···담온, 이게 전부···.”
그대가 죽인 겁니까?
그 당연한 물음이 목젖에 걸려 턱 막혔다.
사아의 시선은 그 와중에도
세심하게 화원을 살피고는 그 뒤를 향했다.
“저건 왜 살려뒀지? 필요한 일이 더 있나?”
낯설다.
제 눈앞의 벗은,
지금까지 제가 알던 벗이 아닌 듯했다.
“저들은···저들은 양민이 아닙니까.”
사아의 고개가 부드럽게 기울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느냐는 듯한 눈을 마주하니,
화원은 자꾸만 속이 울렁였다.
“아무리 저들이 죄를 지었다고 하나,
이리 저희 멋대로 죽여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죽은 이들이 안타까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아의 방식을 옳다고 할 수 없으리라.
화원의 단호한 어투에
사아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굴렸다.
“그러한가?”
이내 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주의하지.”
화원이 싫다면 앞으로 하지 않으면 될 일.
사아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따져 묻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을의 거의 모든 어른이 죽었으니,
남겨질 아이들을 걱정한 화원이 물었다.
“···도망간 것 같다.”
화원의 심사가 불편한 것을 느낀 사아가
슬쩍 눈을 피하며 답했다.
“아니 대체 어쩌자고 일을···!”
순간 화를 쏟으려던 화원이 멈칫했다.
평생을 청성에서 도사로 자라온 자신조차
촌장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참기가 힘들었었다.
하물며 제 벗은 도사도 승려도 아닌,
심지어 문파조차 없는 일반의 무림인이었다.
‘담온도 아닌 척하지만 충격이 컸겠구나.’
제가 겪은 모든 일은 벗이 겪은 일이기도 하니,
그의 심정이 금세 이해가 된 화원이었다.
“일단 담온은 예서 마을 좀 정리하고 계십시오.
아이들은 제가 찾아서 데려오겠습니다.”
죽은 이들을 되살릴 길은 없으니,
사라진 아이들이라도 안전하게 데려와야 했다.
“아이들 데려오면 일단 눈에 띄지 마시고···.
아, 혹시 모르니 촌장 좀 감시해 주십시오.”
끄덕.
영문을 알 수는 없으나,
화원이 누그러진 듯하니 안심한 사아가 끄덕였다.
“그럼 저는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하고.”
걱정을 덧붙이는 벗의 얼굴이
어느새 제가 아는 그대로라 화원은 미소를 띠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아이들을 다 찾아야 할 터인데···.’
화원이 초조함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
화원이 아이들을 찾아 떠나고
혼자 남은 사아가 스스로 이마를 짚었다.
“젠장, 마화(魔火)로 태우면 편한 것을.”
그랬다간 제가 마교의 소속이라 자백하는 꼴이니,
귀찮아도 시체를 일일이 옮겨야 할 판이었다.
히끅.
뒤에서 들려온 딸꾹질 소리에
사아의 서늘한 안광이 촌장을 향했다.
“하도 하찮아서 있는 것도 잊었군.”
그냥 죽여버릴까.
저 많은 시신들 틈 사이로
초라한 노인네 하나쯤 섞인들 무슨 상관이랴.
‘괜히 입을 놀리게 두면 귀찮아질 뿐이니.’
화원이 돌아오면 그럴싸한 이유를 들어
죽일 수밖에 없었노라 말하면 그만이었다.
스릉-
혈향이 그득한 차가운 검날이
엎드린 촌장의 연약한 목을 슬며시 파고들었다.
“사, 살려주시게! 아무 말도 않겠네!
아니, 내가 무얼 들었던가? 나는 모르겠으이!”
대문 너머 따끈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제 부인과 마을 사람들을 다 보았으면서도-
“귀찮은 일은 내가 하겠네!
당장 저것들을 처리해야 하지 않는가?”
촌장은 기꺼이 사아에게 생을 구걸했다.
쯧.
사아가 한심함을 감추지 않고 혀를 찼다.
“가서 치워.”
검을 거둔 사아의 명령에,
촌장이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끄응.
촌장은 늙은 몸을 열심히 움직이며
매일을 가족처럼 지냈던 이들의 시체를 날랐다.
“마당에 오, 옮겨두기만 하면···되겠는가···?”
“일단은.”
촌장은 그저 살아서 다행이라 여길 뿐,
죄책감이나 후회 같은 것은 없는 얼굴이었다.
힐끗.
촌장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사아가
나른한 듯 눈을 감으며 말문을 열었다.
“혈귀(血鬼)가 아쉬워하겠군.”
짐짓 안타깝다는 듯한 사아의 음성에
촌장이 조용히 끄덕였다.
“하기야, 고기를 워낙 좋아하셨으니···.”
오호라.
사아의 입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혈귀가 이곳의 담당이었나 보지?”
여유가 만만한 사아의 물음에
촌장은 의심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씀씀이가 후한 분이셨어.”
시체는 절반도 못 옮긴 건가.
사아의 눈이 시체가 널브러진 길가와
촌장의 가택 안을 번갈아 가늠했다.
“더 옮길 필요 없다.”
사아는 그리 말하며 허리를 숙여
언제부터 있었을지 모를 낫 하나를 주워 들었다.
챙그랑-
마당으로 시체를 옮기던 촌장 앞으로
사아가 던진 낫이 날아와 떨어졌다.
“들어.”
“낫? 낫을 왜···.”
촌장이 의문을 표하면서도 덥썩,
제 앞에 놓인 낫을 주워 들던 순간-
푸욱!
“크억···!”
사아의 검이 촌장의 뱃가죽을 뚫었다.
촌장의 배에 박힌 검은 그대로 몸을 틀어,
그의 왼쪽 옆구리를 가르고 빠져나왔다.
“흐으···어···째서···.”
억울함이 가득 담긴 촌장의 눈빛에
사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습군.”
사아의 비아냥과 함께
촌장의 몸이 생기를 잃고 싸늘히 굳어갔다.
“버러지면 혀라도 잘 간수했어야지.”
이미 죽어버려서 듣지는 못하겠지만.
휘익-
사아의 휘파람 소리에
까마귀 한 마리가 하늘에 큰 원을 그렸고-
“하명하십시오.”
검은 복면을 쓴 사내 여럿이
소리 없이 나타나 사아의 앞에 무릎 꿇었다.
“정리해라.”
사아의 명령에 복면인들은
순식간에 시체를 정돈하고 길을 닦았다.
그렇게 한 식경은 지났을까 싶을 무렵-
“끝났습니다.”
훠이.
복면인들은 사아의 손짓 한 번에
어둑한 밤하늘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이제 슬슬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사아의 시선이 마을 너머,
화원의 발걸음이 향했던 숲에 닿았다.
***
화원은 사라진 아이들을 찾아
계림의 어두운 숲을 뒤지고 있었다.
“찾으면 무어라 해야 하나···.”
몸은 열심히 아이들을 찾으면서도
머리는 온통 엉키고 꼬인 채였다.
‘사실대로 말을 해줘야 하나?’
아니다.
잠깐 생각하던 화원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에게 지우기에는
너무나도 무겁고 끔찍한 짐인 탓이었다.
“얘들아, 내 목소리 들리니?
해치지 않으니 여기 있으면 대답해주렴!”
그러나 그것도 아이들을 찾고 난 다음의 일이라.
좀처럼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흔적에
화원이 초조하여 입술을 짓씹었다.
“밤의 숲은 아이들에게 위험할 텐데···.”
기감에 날을 세워 수색했으나
숲에서 끊어진 아이들의 기척은 어디에도 없었다.
‘따로 숨을만한 곳이라도 있는 건가?’
화원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것이 아니고서야 아이들을 하나도 찾지 못한 것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탓이었다.
“이 숲으로 온 것은 분명한데···.”
어스름한 저녁부터 시작해 한밤중인 지금까지
그 많던 아이들을 하나도 못 찾은 것이 말이 되는가.
타고나기를 기운을 잘 읽던 화원이라,
본래라면 이즈음 전부 찾아 돌아갔을 일이었다.
‘짐승에게 물려갔더래도 한 둘이지,
그 많은 아이들이 죄 사라질 수는 없는데···.’
아이들은 마치 증발이라도 한 듯 사라졌다.
숲을 뛰노는 토끼부터 침 흘리는 이리 떼까지
밤의 숲을 돌아다니는 모든 것이 느껴지는데-
“···아이들은 없어.”
그 많던 아이들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휘잉-
숲을 맴돌던 바람 한 줄기가 문득,
화원의 코를 스쳤다.
숲을 가득 채운 계수나무 향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매캐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수면독?”
화원의 눈살이 확 찌푸려졌다.
그의 발걸음이 미세한 냄새의 흔적을 따랐다.
“···!”
냄새를 따라가던 화원은 수풀 사이에 버려진
하얀 천 조각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흰 천의 모퉁이에 붉은 글자 하나가
성의 없이 수놓아져 있었다.
- 鬼
‘귀(鬼)···?’
참으로 불쾌한 글자가 아닌가.
천을 주워 든 화원이
그것을 제 코에 가져다 대더니-
“젠장!”
어울리지 않는 험한 단말마와 함께
쥐었던 천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휘잉-
바닥에 떨어진 천으로부터
매캐한 수면독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마교가 아이들을 납치한 것인가!’
마교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짓을 벌일까.
까득.
화원의 이가 살벌하게 갈렸고,
드물게도 안광이 흉흉하게 번뜩였다.
‘일단은 담온에게 가자.’
내팽개쳤던 천 조각을 품에 챙긴 뒤
화원이 빠르게 숲을 벗어났다.
가장 안전하다고 여기는
무엇보다도 위험한 이의 품으로-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아이들마저 죽을지도 모른다···!’
화원의 발이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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