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파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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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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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2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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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6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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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7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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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血鬼) (2)

DUMMY

쯧.


악소가 지하에 갇힌 사내를 향해 혀를 찼다.

매캐한 수면독의 잔향이 진동을 하는 탓이었다.


‘어차피 죽일 놈을 왜 살려서 데려오라는 거야?’


다른 이도 아닌 무상의 명이라 따르긴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덜컹.


“악소!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냐?!

여기 갇힌 이유가 무엇인지라도 알려줘!!”


영문도 모른 채 끌려 들어온 사내가

제 몸을 묶은 쇠사슬을 흔들어 대며 악을 썼다.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라, 혈귀.”


악소의 말에 혈귀가 분성을 내질렀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얼핏 짐승에 더 가까운 소리였다.


“쯧쯧, 인육을 그리 즐기더니···.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된 모양이로군.”


악소는 그런 혈귀를 보며 고개를 내젓고는

유유히 지하감옥을 빠져나왔다.


“아이들은 어디에 두었지?”


문앞에서 기다리던 무상의 물음에

악소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따로 모아두었습니다.

지금 가서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안내해라.”


악소는 무상을 극진히 모시며

아이들을 모아 둔 귀검대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처음 끌려올 때만 해도 아이들이

바락바락 울고 비는 통에 시끄럽고 혼란했으나-


“······.”


지금에는 하나같이 숨을 죽인 채 고요할 뿐이었다.


“아이들의 수는 전부 합해 열여섯입니다.

명하신 대로 아이들에게는 아무 약도 안 썼습니다.”


끄덕.


악소의 보고에 무상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얼굴로 고개만 움직였다.


‘젠장, 이 양반이 제일 어려운데.’


악소의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교주인 천마에게 귀검대는 존재도 미미한 것이고,

소교주인 사아는 명만 잘 따르면 간섭하지 않았다.


“머리부터 비운 뒤 교육실로 보내도록.”


“예, 무상님.”


그러나 무상은 그들이 내리는 모든 명령을

한 치 오차 없이 실행하고 관장하는 군사였다.


아득히 높은 곳에서 저희를 내려보는 권능에는

그저 경외하고 고개 숙이면 그만이지만-


“지난번과 같은 실수는 없어야 할 거다.”


눈을 시퍼렇게 뜬 채 저희를 노려보는 번견에게는

끊임없이 제 쓸모를 증명해야 하는 탓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싸늘한 무상의 시선이 악소를 훑고는

그대로 걸음을 돌려 귀검대를 떠났다.


“하아···. 들었지? 쟤네 다 옮겨!”


숨죽인 채 대기하던 귀검대들이

악소의 한 마디에 분란하게 움직였다.


으아앙-!


잦아들었던 아이들의 울음과 비명이

또다시 혼란하게 귓전을 파고들었다.


***


흐음.


사아가 낮은 음성과 함께 턱을 매만졌다.


“아이들은 전부 사라졌고,

현장에는 이것만 남아 있었다라···.”


화원이 품에서 꺼낸 흰 천 조각에

사아가 짐짓 심각한 척 얼굴을 굳혔다.


“마기의 흔적은 있었나?”


화원이 고개를 저었다.


숲에는 수면독의 악취만 옅게 남았을 뿐,

마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당가주께서는 내부의 배신을 의심하고 계셨습니다.”


“청성의 태상 장문인은?”


사아의 물음에 화원이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저를 이 일과 분리하려 하셔서···.


다만 채주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배신자보다는

마교 내부의 수작이라고 의심하시는 듯했습니다.”


끄덕.


“가능성은 모두 열어두는 게 좋겠군.”


어차피 광서 이상으로 진행할 수는 없을 터.

사아는 여유로이 화원의 이야기에 호응해 주었다.


“아이들을 찾으려면 우선 이 ‘귀(鬼)’라는 것의

정체를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자를 찾는 게 우선이겠군.”


결연한 화원을 보고 있자니

사아는 마음 한구석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정파의 제일 기재이니 어찌하겠는가.’


끝끝내 저와는 다른 길을 걸어갈 벗이라,

언젠가 벗의 검이 저를 향할 것이 분명한 탓이었다.


“이곳 외에도 계림의 창고가 한 곳이 더 있다지?”


그럼에도 어찌하랴.


“그곳부터 뒤져보면 되겠군.”


아직은 화원의 벗으로 살고 싶은 것을.


“예, 바로 가보고자 하는데 담온은 괜찮겠습니까?”


“당연한 것을 묻는군.”


사아가 미련 없이 화원을 따라 마을을 벗어났다.


텅 비어버린 작은 촌락에는

쓸모없게 되어버린 낫을 든 노부의 시신만이 남아

하늘을 돌던 까마귀의 먹이가 되어줄 뿐이었다.


***


한편, 삼영은 절뚝이는 발을 끌고

홍류를 흑오의 거처로 안내하는 중이었다.


“저, 저기! 지금은 다들 저기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오호라.


“일영도 저 안에 있으렸다?”


홍류의 물음에 삼영이 절실하게 끄덕였다.


“그럼요, 그럼요! 임무를 받아오는 건 일영뿐이니,

일영이라면 흑살대에 관해서도 알 겁니다!”


“앞장서거라.”


그 말에 삼영이 자연스레 앞장서자

홍류가 기척을 지운 채 삼영의 뒤를 따랐다.


쾅-


“일영! 안에 있···냐···.”


기세 좋게 오두막의 문을 열고 들어선 삼영이

훅 끼쳐오는 혈향에 주춤했다.


“···오영? 이, 이게···이게 무슨···?”


바닥에, 벽에, 천정에 온 사방에

동료들이 흘린 피로 한가득이었다.


“늦은 게로구나.”


어느새 오두막 안으로 들어선 홍류가

심통이 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기의 흔적이 가득한데···.”


스륵.


홍류가 오영의 시체에 꽂힌 검 한 자루를

손쉽게 뽑아 들고 살피었다.


“이 검의 주인을 아느냐?”


홍류가 얼핏 삼영을 비롯한 다른 흑오들의 것과

비슷하게 생긴 묵빛의 검을 내밀었다.


“···흑살대. 그들이 쓰는 검입니다.”


삼영이 주먹을 말아쥐며 답하자,

홍류가 가소롭다는 듯이 그를 비웃었다.


“네놈도 나를 예까지 데려오지 않았느냐?

왜? 죽은 동료들을 보니 마음이 아픈 게냐?”


저 하나 살자고 동료를 팔아넘길 땐 언제고.


분노인지 충격인지 모를 감정으로

잔뜩 굳은 삼영이 그저 우스워 보인 탓이었다.


“······.”


홍류의 말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라

삼영은 그저 고개를 푹 땅으로 꺾을 뿐이었다.


“저는, 이제 어찌 되는 겁니까···?”


어차피 오래 살 팔자들은 아니었다.

삼영은 늘 그래왔듯 빠르게 자신에게 집중했다.


“결국은 네 걱정을 한 게로구나.”


홍류의 말에 울컥,

억울한 생각이 든 삼영이 소리쳤다.


“그럼 안 됩니까? 내가 내 걱정하는 게 잘못입니까?

고아로 태어나 매일 두들겨 맞으며 배를 곯았습니다!

저도 도사님처럼 명문에서 편하게 자랐으면 이리···!

이리 뭣같이 살지는 않았을 거라고요!!”


피식.


“고아로 태어나 힘들게 산 놈들은 다 그렇더냐?

옳고 그름도 스스로 분간하지 못하여 마교가 되더냐?

그리하여 그 알량한 힘으로 이리 하찮게 살더냐?”


홍류의 싸늘한 일갈에 삼영이 울부짖었다.


“도사님이 뭘 안다고 그러십니까!!!

우리 같은 밑바닥 인생에 대해 당신이 뭘 안다고!!”


억울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려져

거리를 전전하며 구걸로 연명한 어린 시절이었다.


허구한 날 잡배들에게 끌려가

그들의 분풀이로 맞고 또 맞으며 견뎌온 삶이었다.


‘저놈들을 죽여주면 날 따라올 테냐?’


그러다 아직 어린 나이에

마교도 하나의 눈에 들어 십만대산에 들었다.


‘여과기공을 익히면 되느니라.’


그는 삼영에게 여과기공이란 마공을 가르쳤고,

삼영은 이를 악물고 기어이 그것을 해내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삼영이니라.’


그렇게 흑오의 일원으로 살아남았다.


그때에는 이미 함께 수련하던 아이들을

십수 명은 제 손으로 죽인 뒤였다.


동고동락하던 동기들을 모두 죽이고 살아남은

오직 다섯 명의 소년들.


그렇기에 그들은 동료가 될 순 있어도

벗이나 가족이 될 수는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죽이고 살아남았는지

각자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도···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고, 나도!!”


그래서 사무치게 억울했다.


편하게 살아온 저들이 자신을 하찮게 보는 것이,

고고하게 도나 닦으며 제 생을 평가하는 말들이-


“당신이!!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날 비난해?!”


분통하고 원통했다.


“아이 하나가 있었다.”


씩씩대는 삼영의 숨소리 틈으로

홍류의 낮은 목소리가 스르륵 깔렸다.


“아비는 술에 절은 도박꾼이었고,

어미는 맞기 싫어 어린 아들을 버리고 도망쳤지.

술에 취한 아비는 도망친 어미 대신 아들을 때렸다.”


홍류의 눈이 슬며시 감겼다.


이제는 까마득하게 오래된 기억이 여즉 생생하니,

사람의 마음이란 이토록이나 간사한 것이었다.


“죽을 만큼 맞고, 또 맞으며 아이는 매일 빌었지.

누구라도 좋으니 이 지옥에서 나를 구해달라고.”


그 아이는 바른 선택으로 잘 살았다는 말이겠지.


익숙하고 무책임한 정파 놈들 입바른 말이라,

삼영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뭐, 도사님께서 짜잔하고 나타나

구해주고 제자라도 삼으셨소?”


피식.


홍류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도사고 뭐고 그 아이를 구한 이는 없었다.


그 아이는 술에 취한 아비가 넘어지며

돌부리에 머리가 깨져 죽을 때까지 맞으며 살았지.


그 아이가 아비 시체를 보고 무얼 했는지 아느냐?”


삼영이 어느덧 분통하던 마음도 잊고

고개를 갸웃하니 기울였다.


“죽은 아비 얼굴에 침을 뱉었다.

한바탕 욕지거리도 했지, 개 만도 못한 놈이라고.”


풉.


어느덧 홍류의 이야기에 몰입한 삼영이

죽은 아비의 취급이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한바탕 하고 나니 속은 시원한데,

그다음에는 무엇을 어찌해야 옳은지 모르겠더구나.


하여 무작정 걸었다.

걷고, 걷고, 또 걷다 보니 어느새 산속이었지.”


어느새 홍류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피었다.

그의 눈앞에 어린 날의 청성이 선명했다.


“향내를 따라가니 커다란 도관이 있더구나.

홀린 듯 들어가니 도사 하나가 앉아있기에 말했지.”


이제는 세상에 없는 도사님의

인자하고 따스한 얼굴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도사님,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소년의 고백에 도사님은 물으셨었다.


‘아직 어린 소년이 무슨 죄를 지었을꼬?’


자상한 눈빛과 목소리에 주륵,

소년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비가 죽었는데 그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욕만 실컷 하다가 죽은 아비를 버리고 도망왔습니다.


처음엔 속이 시원했는데, 그랬는데···.’


죄책감이 가득한 소년의 울음에

자애로운 도사의 손길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어린 마음에 맺힌 게 얼마나 많았으면 그랬을꼬?


내 너의 괴로움을 다 알지는 못하나,

네가 그릇됨을 스스로 부끄러이 여기는 것은 알겠다.


아가, 그것이면 충분한 것이다.


사람은 자고로 그릇됨을 부끄러이 여길 줄 알기에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니라.’


그날 소년은 도사의 품에 안겨

평생 담아두었던 두려움과 고통을 모두 쏟았더랬다.


“그 아이는 그러다가 청성에 입문을 결심하고

도사의 제자가 되어 평생을 수련하며 살아왔다.”


추억에 젖었던 홍류의 눈이 현실로 돌아왔다.


“그 아이는 그때까지도 몰랐을 게다.

제가 늙어서 눈앞의 마교도에게 밑바닥 생을 모른다,

비난할 자격도 없다는 소리 따위를 듣게 될 줄은.”


“···!”


삼영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어찌, 이만하면 네게 잔소리할 자격이 되겠느냐?”


홍류의 넌짓한 물음에 삼영의 입술이 짓물렸다.


“나는···,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당신과 다르다,

내 상황이 당신보다 좋지 않았다,

그리 말하기에는-


‘예! 전부 죽여주십시오!’


돌이키자면 돌이킬 수 있었던 선택이.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잖아-!!’


살리고자 했다면 살릴 수 있었던 생들이.


‘킥킥, 뒤지는 와중에 바르작거리기는.’


사람으로 살고자 했다면 하지 않았을 말들이

이미 너무나도 많이 쌓여버린 탓이었다.


“그러니 억울해 말거라.”


마주 선 홍류의 싸늘한 눈빛이

처음으로 삼영의 심중에 날아들었다.


후웅.


홍류의 내기가 바람처럼 일어나

두 사람을 감싸고 빠르게 돌아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홍류의 장(掌)이 곧게 뻗어져-


“···커억!”


삼영의 단전에 직통했다.


“죽음으로 갚기에는 너무 큰 죄를 지었으니.”


고통으로 바르작거리는 삼영을 둘러메고

홍류는 곧장 점창으로 향했다.


살아서 지은 죄업은 죽음으로 갚을 수 없으므로.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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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동몽이상(同夢異床) (2) 24.05.29 27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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