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파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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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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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2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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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6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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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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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血鬼) (3)

DUMMY

꿀꺽.


제 목에 겨눠진 검날에 촌부가 마른침을 삼켰다.

거친 살갗을 슬며시 파고든 칼날은 기어이 그 목에

한 줄기 핏자국을 나렸다.


“말해.”


사아의 서늘한 음성에

애초에 다물어지지도 않았던 촌부의 입이 열렸다.


“혀, 혈귀···! 혈귀의 것입니다, 분명합니다!

그자가 그것으로 땀을 닦고는 했습니다! 예!”


역시 마교도의 짓이었구나.


아이들을 구하기에 늦어버린 건 아닐까 싶어

화원의 얼굴에 수심이 깊게 차올랐다.


“혈귀는 어디에 있지?”


“그, 그건···저도···아! 남녕!

남녕에서 주로 머무르는 듯했습니다!”


간신히 답을 떠올린 촌부의 말에

사아가 곁에 선 화원과 눈을 마주했다.


“바로 남녕으로 갈 건가?”


사아의 물음에 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찰사 영감께서 뒤처리를 하신다 하니,

이대로 두고 가도 걱정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보다는 아이들이 우선이었다.


서둘러 혈귀란 자를 따라잡는다면

아이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스윽.


촌부의 목에서 사아의 검이 거두어졌다.

어차피 끊어질 목이니 꼭 제 손일 필요는 없으리라.


“안찰사 영감, 뒤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화원이 촌부에게서 등을 돌리고 서서

뒤를 지키던 안찰사에게 얕게 고개를 숙였다.


“두 소협이 고생이 많으시오.

이 일은 내 결코 흐트러짐 없이 처리할 터이니,

걱정들 말고 그대들의 일을 하길 바라오.”


그 듬직한 말에 화원의 면면엔 미소가 퍼졌으나,


‘이미 흐트러진 주제에 말은.’


사아의 입가엔 감추지 못한 비소가 흘렀다.


청성의 요청이 들었다고는 하나

안찰사 정도 되는 인물이 직접 나설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저자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직접 부관들을 이끌고 나타나 일을 처리하는 것은-


“큰 공을 세웠으니, 그만한 상을 받겠군.”


무상이 약을 쳐둔 벌레 중 하나인 탓이리라.


“하하하, 그리만 된다면 좋겠소이다!”


안찰사의 호탕한 웃음에

사아의 눈이 슬며시 찌그러졌다.


‘역하군.’


화원에게 제 속을 들킬까 두려워

어찌저찌 갈무리하는 기분이 더러워서였다.


“담온, 이만 갈까요?”


깨끗한 음성에 뒤집힌 속이 가라앉는다.

사아가 그제야 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끔찍한 벌레가 들끓는 산중에-


“서두르지.”


제 벗만이 오롯한 사람이었다.


***


남녕의 한 널찍한 기와 저택.


무상을 필두로 악소와 귀검대가

넋을 놓은 아이들과 결박당한 혈귀를 꿇려 앉혔다.


“열이라···. 기대도 안 했지만,

쓸모없는 것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무상의 중얼거림에

악소가 비릿하게 웃으며 그의 비위를 맞추었다.


“이렇게라도 쓰이니 다행입지요.

남은 여섯은 꽤나 쓸만한 재능을 가졌지 않습니까?”


“하기야···. 그 정도면 흑오 정도는 대체할 테지.”


무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움을 털어냈다.


“시작하도록.”


이어진 무상의 명령에

귀검대가 일제히 마기를 방출했다.


꿈틀.


귀검대의 마기에 인형처럼 앉아있던 아이들이

조금씩 꿈틀대더니 이내 바르작거리기 시작했다.


스륵-


귀검대 하나가 동공이 풀린 혈귀의 결박을 풀자-


“···흐, 흐히힉!”


혈귀는 그대로 일어서서 실성한 듯 웃었다.


콰득!


이지를 잃은 혈귀의 손에

옆에 있던 아이의 머리통이 우그러졌다.


그러나 죽이는 자도,

죽어가는 아이와 지켜보는 아이들마저도-


“조금 더 발버둥 쳐야 자연스럽겠어.”


풀려버린 눈동자는 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뭐하냐, 이놈들아! 조금 더 움직이게 해!”


악소가 소리를 치자,

그들을 둘러싼 귀검대의 마기가 좀 더 짙어졌다.


그러자 혈귀의 손에 목이 잡힌 아이가

마치 제정신을 차린 양 바르작거리며 반항하였다.


철퍼덕.


곧 숨을 잃은 아이의 몸이

자연스러운 태로 바닥에 엎어졌다.


아이들은 그렇게 삽시간에

혈귀의 손에 차례대로 죽음을 맞았다.


“혈귀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악소의 물음에 무상이 턱을 매만졌다.


‘여기서 처리하면 광서의 일은 끝나지만···.’


광서에서 마무리 짓기에는 아까운 패였다.


‘교주님께서 소교주님을 위해 준비하신 것들이

아직은 많이 남은 때이니···.’


화원의 원망과 분노를 집중시키기에

혈귀만큼 써먹기 좋게 만들어 둔 패가 없었다.


“살려서 대산으로 돌아간다.”


잠시간의 고민 끝에 내려진 무상의 결론에

귀검대가 빠르게 움직여 실성한 혈귀를 결박했다.


“청성의 늙은이가 운남으로 향했던가.”


무상의 입꼬리가 모처럼 만족스럽게 휘었다.


“적당한 무덤이로군.”


무상의 무정한 시선이

넋을 놓고 히죽이는 혈귀를 스쳤다.


***


한편, 운남 점창파.


“사, 살려준다지 않았습니까!!

거처를 알려주면 살려준다고 약조했잖아!!”


삼영의 처절한 비명에도

홍류는 여유로이 점창의 장문인과 차를 나누었다.


“흐으으아아아악-!!!”


윤천유가 인두로 삼영의 다친 다리를 지져대니,

삼영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허허, 모처럼 홍류 진인께서 오셨는데

흉한 꼴을 보이게 되어 송구합니다.”


점창의 장문인 이선가가 허허로이 운을 떼었다.


“죽은 아이가 내내 심중에 박혔었는데···.

덕분에 조금이나마 한풀이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선가의 눈이 홍류의 등 너머,

삼영을 직접 고문하는 윤천유에게 향했다.


‘천유의 심마도 이것으로 풀리면 좋으련만.’


죽은 아이도 죽은 아이지만,

이선가는 아무래도 장문 제자인 윤천유에게

더 신경을 쓰게 되는 탓이었다.


“극복할 겁니다.

장문인이 심혈을 기울여 기른 제자가 아닙니까.”


홍류가 나지막히 건넨 위로에

이선가가 씁쓸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띄웠다.


“청성의 제자라면야 걱정이 없겠지요.”


이선가는 눈앞의 홍류가 고마우면서도 미웠다.


자신은 장문인이 되어 녹림 앞에도 나서지 못했건만,

마주 앉은 이는 진범이라는 마교도를 생포한 탓이다.


‘한때는 청성과 점창의 처지가 다르지 않았건만···.’


작금의 청성은 천하제일이 코앞이다.


청성진룡 하나로 홍류는 모든 근심을 잊었으며,

청성의 제자들은 어딜 가나 극진히 모셔졌다.


자신들은 차마 시도하지도 못한 일을,

청성은 이제 너무나도 쉽게 해내어 보여준다.


제자들이야 죽은 아이의 원수를 갚게 되었다며

그저 감사하고 기껍게만 여겼으나-


“점창에는 언제쯤 해가 비출지 모르겠습니다.”


장문인인 이선가는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기다리고 버티다 보면 반드시 해는 뜨지요.”


그런 이선가의 속을 모르지 않기에

홍류는 그저 덤덤히 받아 넘길 뿐이었다.


“예, 그래야지요. 다만 그 해라는 것이

제 살아생전에만 떠 준다면 바랄 게 없겠습니다.”


이선가가 자조하듯 웃음을 지었다.


도가 문파의 적통이라 할 만한 청성에도

이제야 겨우 떠준 햇님이 아니시던가?


구파일방의 자리나 겨우 지키는 점창에 뜨려면

최소한 제 생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리라.


“그나저나 참으로 큰일입니다.

마교도들이 마공을 내공처럼 쓴다니···.”


심정을 추스른 이선가가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여과기공(濾過氣功)’이라는 것을 쓰면

마공을 내공처럼 걸러내어 쓸 수가 있다지요.”


지난날 삼영이 홍류에게 쏟아낸 정보였다.

홍류의 시선이 슬쩍 뒤를 돌아 삼영에게 향했다.


“흐으윽···! 지, 진짜 더는, 더는 모릅니다···!”


윤천유의 집요한 고문에도

삼영의 입은 그 이상을 토해내지 않았다.


“여과기공을 익혔다면 그 원리를 알 터!

그런데도 네놈이 어찌 성취를 이뤘는지 모른다?”


윤천유의 호통에 삼영이 억울함을 담아 외쳤다.


“아, 글쎄 진짜 모른다니까!!!

알면, 내가 알면 그걸 진즉에 말했지, 내가!!”


기실 삼영은 진심으로 억울했다.


마공의 수련은 내공처럼 정석적이지만은 않았고,

여과기공을 익히는 방식은 특히나 비정상적이었다.


“그냥 윗분 하나가 와서 내 단전을 뚫었다고!!

그 뒤로는 마공을 쓰려면 내공이 나온다니까?”


허!


홍류의 헛웃음에 삼영이 고개를 떨궜다.

제가 생각해도 믿지 못할 이야기기는 한 탓이리라.


“그럼 그 윗분이 누군지는 아나?

하다못해 생김새라도 기억이 날 것 아니냐!”


윤천유가 다시 한번 소리쳤고,

이제 삼영은 아예 울먹이기 시작했다.


“지, 진짜 몰라요, 진짜···! 얼굴이며 몸이며

흑의로 칭칭 가리고 있는데 어떻게 압니까?

더, 덩치를 보, 보아하니 사내인 것은 같았지만···.”


삼영의 머리로는 아무리 열심히 생각해도

더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눈동자가 나른한 듯도 보였지만···.’


그런 건 정보라고 할 수준도 못 되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다 했다 여긴 삼영이

만신창이가 된 몰골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흐으윽, 흐어엉-! 사, 살려준다고, 나는···!

흐끕! 그 마, 말만···믿었는데에···! 흐으윽···.”


무슨 도사들이 이다지도 독하단 말인가.


단전이 부서진 몸은 이제 양민이나 다름없건만,

끔찍한 고문은 끝이 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반드시 살려준다던 늙은 도사는

뻔히 죽어나는 저를 등지고 차나 홀짝일 뿐,

약조 따위는 잊은 듯 보였다.


“쯧쯧쯧, 내 너를 살려 준다고 하였을 뿐

언제 네놈의 죄를 면하여 주겠다고 한 적 있느냐?”


원망 가득한 삼영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인지

홍류가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죗값은 살아서 치러야 하는 법이니라.”


젠장.


삼영이 낮게 욕을 지껄였다.

저는 왜 하필 도사에게 잡혔단 말인가?


‘차라리 거처에서 그냥 죽었더라면···.’


하다못해 윤회를 믿는 불가의 승려를 만났더라면

다음 생에 벌레로 태어나라며 단칼에 죽여줬을 것을.


윤회는 커녕 사후세계의 존재부터 갸웃하는 도사들은

죽음으로 끝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여겼다.


“네놈이 살아서 죗값을 다 치러야

죽은 아이도 한을 풀고 등선하지 않겠느냐.”


홍류의 단호한 어투에

희망이 없음을 직감한 삼영이 질끈 눈 감았다.


“당가 아이들도 곧 도착할 겁니다.”


홍류가 이선가를 향해 인자로이 미소 지었다.


“이거 참, 어찌 다 감사를 드려야 할지···.”


점창의 마음에 얹힌 근심 하나가

아스라히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죗값을 받아내기에는 당가가 제격인 탓이리라.


벌써부터 창백히 질린 죄인의 모습에

도사들의 웃음소리가 경쾌하게 흘렀다.


***


처참한 광경이다.


머리가 으스러지고 목이 꺾이고 몸이 잘린,

고통에 발버둥 친 흔적이 역력한 아이들 시체에

화원의 눈에서 끝내 눈물이 흘렀다.


“아···아아···!”


조금만 더 서둘렀다면 구할 수 있었을까.


저택 곳곳에 끈적하게 스민 아이들의 핏자국이

화원의 심장에 애먼 자책을 남겼다.


‘고작 저런 것들이 무어라고.’


숨죽여 우는 화원을 보며

사아의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 스몄다.


“나의 벗은 마음이 약해 큰일이야.”


사아는 그리 말하며 화원을 토닥였고,

화원은 벗의 토닥임에 기대어 울음을 토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이 모든 일이 나에게서 비롯되었으니.


전하지 못할 말을 삼킨 사아의 위로에도

화원은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으나

분명 자신과 연이 닿은 아이들이었다.


사천에 가보고 싶다며 맑게 웃던 얼굴도,

비밀을 잘 지키겠다며 굳게 다짐하던 모습도-


“그저, 그저 어리기만 한 아이들이었는데, 그저···!”


아직은 눈에 선할 만큼 생생한 기억이었다.


“제가, 제가 조금만···조금만 서둘렀더라면···.”


부질없는 가정이 화원의 심장을 쥐어뜯으니,

사아의 따스한 손길이 부드럽게 등을 쓸어주었다.


‘이젠 정말 기만이로군.’


흐느끼는 벗을 보자니 사아는 속이 쓰렸다.


“그대가 우는 것만도 속이 상하는데,

당치도 않은 자책까지 하면 나는 어찌하라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을 따라

벗을 기만한 사내의 눈동자가 한없이 흔들거렸다.


“혈귀란 자를 어떻게든 찾아내 목을 따 오면,

그러면 나의 벗이 울음을 좀 그치려나.”


벗의 울음 앞에 사내는 이번에도

어찌할 도리 없이 제 목을 졸랐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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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귀(血鬼) (3) 24.06.17 20 0 12쪽
29 혈귀(血鬼) (2) 24.06.07 26 1 12쪽
28 혈귀(血鬼) (1) 24.06.06 25 1 11쪽
27 계림산수기천하(桂林山水欺天下) (3) 24.06.05 23 1 12쪽
26 계림산수기천하(桂林山水欺天下) (2) 24.06.04 25 1 12쪽
25 계림산수기천하(桂林山水欺天下) (1) 24.06.03 25 1 12쪽
24 보이지 않는 틈 (3) 24.06.02 28 1 13쪽
23 보이지 않는 틈 (2) 24.06.01 27 1 12쪽
22 보이지 않는 틈 (1) 24.05.31 27 1 12쪽
21 동몽이상(同夢異床) (3) 24.05.30 29 1 12쪽
20 동몽이상(同夢異床) (2) 24.05.29 27 1 11쪽
19 동몽이상(同夢異床) (1) 24.05.28 29 1 12쪽
18 동상이몽(同床異夢) (3) 24.05.27 28 1 12쪽
17 동상이몽(同床異夢) (2) 24.05.26 36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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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알지만 모르는 벗 (3) 24.05.24 36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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