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지 못한 말 (1)

사뿐한 발걸음이 점창의 문턱을 넘었다.
“사천의 당가 해란이 점창의 장문인과
청성의 태상장문인을 뵙습니다.”
고고한 당가의 녹의가 당해란의 몸짓에 맞추어
유려하게 살랑거렸다.
꾸벅.
“사천의 당가 해진이라 합니다.”
누이의 뒤를 지키던 당해진 역시
예의를 갖추어 허리를 숙였다.
“허허, 오랜만에들 보는구나.”
절친한 벗인 당선욱의 손주들이라
맞아주는 홍류의 눈빛에도 다정함이 스몄다.
“당가의 직계들이 직접 나서다니···.
당가주께 어찌 이 고마움을 다 전할꼬.”
뜻하지 않게 당가의 도움을 받게 된
이선가의 깊은 감사에 당해란이 웃으며 화답했다.
“당가에 저들을 마주할 기회를 주신 셈이니,
감사는 오히려 저희 쪽에서 드려야 마땅하지요.”
어쩌면 이미 짧은 생을 마쳤을 아정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게 만든 원한을 어찌 잊으랴.
이번에 사로잡은 삼영이라는 자가
어쩌면 막혀버린 복수의 실마리일지도 몰랐다.
당해란의 입꼬리가 요요하게 늘어졌다.
“그 삼영이라는 자는 어디에 있나요?”
당해란의 부채가 산뜻한 바람을 불었다.
***
쿠당탕.
빈 서랍장이 아무렇게나 방바닥을 굴렀다.
“찾아야 해, 찾아야···.”
언제나 정갈함을 잃지 않던 화원의
무너져버린 모습에 사아가 이마를 짚었다.
쩌적.
곱기만 하던 손이 우악스럽게 바닥을 뜯어냈다.
반짝이던 화원의 눈동자는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없어···? 아무것도, 없어···.”
말 몇마디 잠깐 나눴던 어린 것들의 죽음이
저렇게까지 크게 충격받을 일이었던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화원을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긴 했으나,
이렇게까지 알 수 없는 것은 처음인 탓이었다.
터억.
사아의 커다란 손이 화원의 어깨를 짚었다.
“이제 그만해라. 할 만큼 했어, 그대는.”
“할 만큼···?”
화원의 텅 빈 눈동자가 사아를 마주했다.
“그래, 할 만큼.”
“그건 누가 정하는 겁니까?”
높낮이 없는 화원의 물음에 사아가 멈칫,
벗의 어깨를 다독이던 손을 멈추었다.
“인육이 되어 죽어간 이들의 원한은, 예!
그 일이 밝혀져 관에서 대대적인 처벌을 시작했으니
어쩌면 제 할 도리는 다한 것이겠지요.”
분기가 섞여 덜덜 떨리는 화원의 목소리에
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저 아이들은요?
우리가 분을 참지 못해 가족도, 이웃도 전부 잃은···!
끝내, 끝내 혈귀의 손에 생을 잃은···,
저 불쌍한 아이들은···.”
툭.
텅 비었던 화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알알이 차올랐다.
“그 아이들을 위한 도리는···,
다한 것이 맞습니까···?”
쿵.
사아의 심장이 아찔하게 내려앉았다.
“···내 탓이었군.”
화원이 그저 올곧은 인물이라 자책한다 여겼건만.
“내가 계림에서 벌인 살육 탓에 아이들이 사라져서,
그래서 결국 이리 죽은 셈이라서 자책했던 거였나.”
사아의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언제나 곧게 다가오던 화원의 눈동자가
꽉 다문 입술과 함께 바닥으로 내리깔렸다.
“내게 밖을 맡긴 것이 그대이니까.”
젠장.
사아의 머리가 거칠게 제 머리를 헝크렸다.
‘귀찮은 일을 떼어버리려던 것이었건만···!’
괜한 말이 새어 나와 화원의 의심을 살까,
그것이 두려워 죽음으로 막아버린 입들이었다.
그 와중에도 아이들 시체가 보이면
화원이 경기를 일으킬 게 뻔한 일이라
아랫것들을 시켜 데려가라 한 것이었다.
‘도망친 아이들을 찾으러 갈 줄 알았으면,
그냥 어디 한 곳에 묶어두라고 할 것을···.’
자연히 어디로든 갔겠거니,
그리 여기고 떠나리라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담온의 잘못이···아닙니다.”
화원은 진심으로 그리 여겼다.
제 벗은 도사도, 승려도 아닌 무인이었다.
수행을 하는 이가 아니니 죄인에게 검을 드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라 생각되었을 터-
“제가 제 기분만 살피느라···그러느라···.”
모든 건 아무런 당부 없이 벗만 남겨둔 제 탓이다.
마을 사람들을 어찌할 것인지 한 번만 물었더라면,
제 벗의 심정이 어떠한지 한 번만 살펴 주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리라.
“제가, 제가···, 제 모자람이···죽인 겁니다.”
화원이 한없이 초라한 몸을 떨었다.
터업.
사아의 커다란 두 손바닥이
덜덜 떨리는 화원의 볼을 감싸 올렸다.
“내 잘못이니 나를 탓하고 원망해.
내 죄까지 그대의 업으로 돌리지 말란 소리야.”
닿지 않을 진심임을 알면서도
사아는 화원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껏 그대는 단 한 번도,
온전히 그대만을 생각하고 위한 적이 없어.
그러니 쓸데없이 자책하지 마라.”
아프게 말아 쥔 화원의 주먹이 눈에 박혔다.
“그 혈귀란 자가 죗값을 치르면 되겠어?
그럼 그대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겠냐고.”
무상이 혈귀를 살려 데려간 이유가 있겠으나,
사아는 이제 그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끄덕.
화원의 고갯짓에 사아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그래, 그리하자.”
당장 무너져 내리는 벗보다 중요한 것은 없으니.
“일단은 좀 쉬어야겠군.
이런 몰골로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나?”
사아는 다정한 손길로 화원을 이끌고 나와
근처의 객잔으로 향했다.
그렇게 저물어가는 밤,
하늘의 색을 닮은 까마귀 하나가 객실을 맴돌았다.
***
사락.
잠든 화원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겨주며
사아가 입매를 늘였다.
한참을 괴로워하더니 조금은 나아진 모양이라,
꼬였던 속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제 길을 찾지 못해 더 흔들리는 건가.”
유람을 시작한지도 한참이 지났건만
화원은 아직도 제 뜻을 세우지 못한 채였다.
“그런 주제에 세상 만물을 다 걱정하기는.”
무엇을 위해 옳아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럼에도 항상 옳음을 추구하는 화원의 모습이
사아에게는 신기하고도 안쓰럽게 비추었다.
“으응···.”
화원이 잠결에 뒤척이니
사아가 조심스레 그의 등을 토닥였다.
톡톡!
어느샌가 날아든 까마귀 한 마리가
객실 창틀을 부리로 두드렸다.
스륵-
사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잠든 화원의 눈치를 살피고는 밖으로 향했다.
적막한 객실에는
홀로 남은 화원의 고른 숨소리만이 울렸다.
***
흐음.
천마의 신음이 낮게 흘렀다.
“무상아, 나의 사아가 혈귀를 내어 달라는구나.”
평소라면 사아의 서신에
의문이나 고민 없이 그리하라 하였을 천마건만.
“아직 쓸모를 다하지 않았거늘···.”
천마는 처음으로 아들의 요구에 난색을 표했다.
“나의 사아가 유희에 깊이 빠진 모양이로구나.”
화원이라는 아들의 벗이
그저 적당히 쓰고 버릴 놀잇감은 아니었던가.
천마는 손에 쥔 사아의 서신을
다시 한번 찬찬히 눈으로 훑어보았다.
“내 아들이 이리 지극하다니.”
서신에는 여태 본 적 없는 간곡함이
빼곡한 글자로 담겨 있었다.
“무상아, 운남에서는 소식이 없었느냐?”
지시를 내리고 결과를 들을 뿐,
과정을 물은 적이 없었던 천마의 하문에
무상이 깊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당가의 직계가 점창에 들었습니다.
삼영은 여과기공을 소교주님이 창시하신 것을 아니,
어쩌면 홍류의 귀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톡. 톡. 톡.
천마의 손가락이 일정한 소리를 내며
탁상을 건드렸다.
여과기공은 사아가 만들어 낸
청탁병심법의 변화기 중 하나였다.
교에서 교육하는 수많은 아이들에게
사아의 수련법을 가르쳐 보았으나,
웬만한 재능으로는 제 단전에
여과의 기능을 만들어 내기도 전에 죽어났다.
덕분에 다른 방식을 고민하던 사아가
만들어진 단전에 제가 외부에서 강제로 개입하여
여과의 기능을 심는 방식을 고안해 낸 것이었다.
초반에는 견디지 못하고 죽는 이가 많았으나,
사아의 숙련도가 늘수록 생존자가 급등하였다.
다만 사아와는 다르게 강제로 여과하는 탓에
마공으로 쌓아 내공처럼 사용할 수만 있었다.
문제는 여과기공을 익히게 하려면
반드시 사아가 한 번은 그들을 마주쳐야 하는데-
“삼영은 소교주님께서 직접
제 단전에 손을 대주신 것까지는 모르겠으나,
여과기공을 쓰게 한 사람에 관해 이야기했다면
소교주님의 정보가 저들의 귀에 들어갔을 겁니다.”
삼영을 마주하고 있을 홍류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보았다는 것이었다.
하아.
천마의 깊은 한숨이 무상의 귀를 울렸다.
“남녕에 혈귀의 흔적 몇을 남겨두어라.
자연스럽게 운남으로 향할 수 있도록.”
천마답지 않은 구체적인 명령에
주인의 뜻을 알아챈 번견이 충직히 움직였다.
“제 벗이 바다를 못 보게 되었다고
나의 사아가 아비를 책망할지도 모르겠구나.”
한탄스러운 목소리와는 다르게
아들을 떠올린 아비의 눈이 따사로이 휘었다.
***
“허어, 엉덩이 무겁기로 유명한 자가
무슨 바람이 들어 예까지 납시었는고?”
홍류가 여유로이 웃으며
마주 선 사내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아비가 되고 보니 자식 일에는 도리가 없더군.”
천마가 그저 나른한 태로 답하였다.
“내 손주에게 아주 재미난 것을 붙여 두었더구나.
감숙 출신의 이름이···담온이라 하였던가?”
피식.
“살기 싫단 소리를 다채롭게도 하는군.”
흘러나온 헛웃음과는 달리
천마의 눈동자가 형형한 빛을 내었다.
“묘비에는 무어라 적어줄까?”
낮게 울리는 천마의 물음에
홍류가 허허로이 웃으며 답하였다.
“짐승이 어찌 사람의 글을 쓸 수 있겠느냐?
그건 뒤에 남을 사람들이 알아서 할 것이니라.”
후웅-
검은 기운이 천마의 장(掌)을 감쌌고,
맑은 바람이 홍류의 검을 따라 흘렀다.
천마의 장에서 뻗어 나온 마기가
한켠에 방치되어 있던 혈귀에게로 흘러들었다.
“흐···흐흐···.”
자아가 없는 혈귀의 몸이
천마의 마기에 이끌려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앗!
순식간에 땅을 박차고 오른 홍류를 따라
혈귀가 기운에 휩싸인 채 상대의 목을 노렸다.
“끌끌. 데려온 반푼이 탓으로 덮으려니
제힘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모양이지?”
“혀가 길군.”
애써 여유로운 척 말하는 홍류를 향해
천마가 정곡을 찌르듯 비웃음을 날렸다.
혈귀의 몸을 이용할 뿐,
홍류를 향한 공격은 기실 천마의 것이었으니
이 싸움의 끝은 어찌 보면 당연히 정해진 것이었다.
푸욱-
천마의 기운을 담은 혈귀의 손이
끝내 홍류의 심장을 향해 파고들었고-
서걱!
홍류는 제 심장에 꽂힌 혈귀의 오른손을
팔뚝채로 검을 들어 썰어버렸다.
“의미없는 짓을 하는군.”
천마의 기운이 홍류의 심장에 꽂힌 채 잘린
혈귀의 팔에 스며들더니 이내-
“커헉···!”
그 손에 닿은 심장을 거칠게 쥐어뜯었다.
심장이 뜯기는 고통에 홍류가 피를 토하는 사이
어느새 단도를 쥔 혈귀의 왼손이 목으로 쇄도했다.
이를 본 홍류 역시 고통 속에서도 검을 들었고-
푸욱!
홍류의 검은 혈귀의 목젖을 꿰뚫고,
혈귀의 단검은 그대로 홍류의 목에 박혔다.
“젠···장···.”
청성의 무인으로 살며 이토록 무력한 적이 있었던가.
홍류의 눈동자가 혈귀의 등 너머에 선
천마를 지긋이 응시했다.
저 마귀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쓴 힘이
본디 가진 힘의 일 할은 되려는가?
“이런, 이만 가야겠군.”
온몸의 피가 빠지며 몸이 싸늘해지는 와중에도
홍류의 시선은 여유로이 걸음을 옮기는 천마에게서
조금도 떼어지지 않았다.
‘원아, 불쌍한 우리 원이···.’
어쩌자고 천마의 아들과 벗이 되었단 말이냐.
희미해져 가는 천마의 뒷모습을 좇으며
홍류의 핏발 선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할아버지···?”
안타까운 마음이 만들어 낸 환청이련가.
움직이지 않던 홍류의 시선이 천천히 돌았다.
“어, 어찌, 어찌 이런···! 할아버지···!!”
오래도록 아끼고 사랑해 온 손자의 관옥이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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