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2)

끄응.
화원이 잔뜩 찌푸린 미간 위로 손을 덮었다.
“많기도 하구나···.”
눈앞에 펼쳐진 지도에는 속가를 의미하는 푸른 점이
빼곡하게도 들어차 있었다.
그런 지도에서 눈을 돌리면-
“···이건 또 언제 다 보나.”
양옆으로는 장부들이 발 디딜 틈이 없이 가득했다.
녹황이 처음 보여줬던 장부도 많았건만,
전체 장부에 비하면 1할이 겨우 되는 수준이었다.
똑똑.
“대사형, 저 화창입니다!”
골머리를 앓던 와중에 반가운 목소리라
화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드르륵-
허락과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온 화창이
화원의 처소를 보고 질겁을 하였다.
“ㄷ, 대사형 처소가 이리된 것은 처음이네요.”
언제나 주인을 닮아 정갈한 화원의 처소가
장부들로 인해 잔뜩 흐트러진 탓이었다.
“조를 짜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장부를 다 파악해야 방문 순서를 정할 것인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보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드물게도 시무룩한 화원의 낯빛에
안타까워하던 화창이 문득 손뼉을 쳤다.
“유호 사형께 부탁해 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유호 사형의 집안이 상단을 운영하신다고도 들었고,
재경각에 소속될 분이시니 장부를 잘 보실 겁니다.”
“좋은 생각이긴 합니다만···.
유호 사제에게 너무 죄송한 일이 아닙니까.”
화원이 부담을 주기 싫다며 머뭇거리니,
화창이 걱정하지 마시라며 제 가슴을 쿵쿵 쳤다.
“기다리고 계십시오! 제가 딱 대령하겠습니다!”
“예? 화창 사제! 잠시 기···!”
타닥!
화원이 다급히 말리려 하였으나
화창은 대답도 듣지 않고 어딘가로 튀어 나갔다.
물론 화원이야 잡으려면 잡을 수 있겠으나-
“···괜찮겠지?”
내심 도움을 바랐던 화원은 기다림을 택했다.
***
콰앙-!
풍류각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창아, 문 부서지겠다!”
화창을 발견한 화자배 하나가 외치니,
다른 사형제들이 모두 킥킥대며 웃었다.
“됐고요! 화진 사형, 유호 사형 어디 계십니까?”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질문을 받은 화진이
턱으로 화유호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기 있,”
“감사합니다!! 유호 사형!! 대사형이 찾아요-!!”
화진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건만
유호를 향해 튀어 나간 화창이 외쳤다.
“뭐?! 대사형께서 날···왜···?”
당황한 화유호의 어깨에 터억,
화창이 제 손을 얹었다.
“유호 사형, 기회가 왔습니다.”
“기회?”
꿀꺽.
비장하게 빛나는 화창의 눈빛을 마주하니
공연히 긴장이 된 화유호가 마른침을 삼켰다.
“대사형께 도움이 될 기회! 얼른 가요!”
화창은 그대로 화유호의 팔을 잡아끌고 나갔고,
풍류각에는 때아닌 소란이 일었다.
***
드르륵!
“대사형!! 유호 사형 데려왔어요!”
영문도 알지 못하고 끌려온 화유호가
화원을 마주하고 꾸벅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제가 대사형께 도움 될 일이 있다 들었습니다.”
끄덕.
믿음직한 화유호의 모습에
화원의 고개가 절로 끄덕였다.
“유호 사제의 가문이 상단을 운영하신다 들었습니다.
속가 방문을 위해서는 장부를 파악해야 하는데,
혼자 하려니 어려워 도움을 청하고자 모셨습니다.”
“하하, 제가 대사형보다 잘하는 것도 있었네요.”
화유호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라,
그는 흔쾌히 수락하고는 널브러진 장부들을 훑었다.
“음···. 우선 장부를 다시 분류해야겠습니다.
일단은 지역별로 모은 뒤 날짜별로 정렬해야 합니다.
이쪽에 사천 지역의 속가 장부들을, 여기는 섬서···.”
화유호의 정리에 따라 장부들이 빠르게 옮겨졌다.
그렇게 약 한 시진 후.
터억-!
“후우···. 이제야 좀 볼만 합니다.”
처소 곳곳에 널브러져 있던 장부들이
구역별로 열을 맞추어 정갈하게 정돈되었다.
“신강과 서장, 해남을 제외하고는
모든 지역에 최소 두어 개의 속가가 있습니다.
대사형께서 보시기엔 어느 지역의 장부를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 같으십니까?”
“아무래도 사천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화원의 답에 화유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사천은 가장 마지막에 확인하셔도
결코 늦지 않을 것입니다.”
뜻밖의 답에 화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청성이 자리 잡은 곳이 사천이었고
당연하게도 사천에 자리한 속가가 가장 많았다.
위치로 보나 머릿수로 보나,
아무리 생각해도 사천만큼 중요한 곳이 없건만.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사천에 자리한 속가들은
따로 돌아보실 필요도 없을 겁니다.
청성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에 놓여 있으니까요.”
아.
그제야 화원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천에 있는 속가들은 무슨 일을 하든 당하든,
즉시 본산의 귀에 소식이 닿을 것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진즉에 해결됐겠군요.”
“예, 사천에 자리한 문파는 아미가 전부입니다.
당가는 세가이니 방계는 있어도 속가는 없지요.
또한 아미는 여인만 제자로 받는 폐쇄적인 문파이니,
사천에서 청성의 속가를 위협할 자들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곳은 어디입니까?”
화유호의 손가락이 척,
섬서의 장부를 모아 둔 곳으로 향했다.
“섬서가 가장 중요합니다.
섬서에 자리한 두 명문을 아십니까?”
“에이, 유호 사형! 그건 저도 아는데요?
종남과 화산이 아닙니까!”
화창의 뿌듯한 외침에 두 사형이 미소를 지었다.
청성에서 가장 맑은 인물이 화원이라면
가장 해맑은 이는 단연 화창일 것이었다.
“창이 말대로 종남과 화산이 있습니다.
두 곳이 모두 명문인데 심지어 도가 계통이지요.”
“···청성의 속가가 견제를 많이 받겠군요.”
끄덕.
“그렇습니다. 더하여 사천과 섬서는 꽤 가까우니,
섬서에 자리한 속가의 수도 상당합니다.”
“···허면 섬서 다음은 호북이겠네요.”
호오.
화유호가 낮게 감탄하는 소리를 내었다.
“무재(武才)가 뛰어나심은 익히 알았으나,
머리도 이리 좋으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우리 대사형은 못 하는 게 없으시다니까요!”
두 사제의 칭찬에 화원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이만하면 사전 준비는 끝난 듯하니,
이제는 장부를 직접 읽어봐야 할 때입니다.”
터억.
화유호가 화원의 어깨를 잡아 자리에 앉혔다.
“워낙 총명한 분이시니,
조금만 읽다 보면 금세 파악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하···.”
화유호의 웃음이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지니,
화원의 등에서 식은땀 한줄기가 흘렀다.
“자, 여기를 보시면···.”
그렇게 밤늦도록 이어진 장부 수업은
다음 날 새벽 동이 트고 나서야 끝이 났고-
휘익-
홀로 남은 화원의 처소에
까마귀 한 마리가 조용히 날아들었다.
***
사아의 손가락을 따라 사락-
종이가 부드럽게 뒤로 넘어갔다.
“사제들과 제법 친해진 모양이군.”
화원이 보내오는 서신에는
날이 갈수록 다른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늘었다.
‘사제들을 어찌 대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과거의 고민을 해결해 가는 것을 보니
일견 흐뭇하면서도-
‘저야 담온만 괜찮으면 다 좋은걸요.’
한편으로는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 조만간 속가들을 방문하게 될 것 같습니다.
우선은 섬서를 먼저 둘러보려고요.
톡. 토독.
사아의 손가락이 탁상을 살살 두드렸다.
“섬서라···.”
사아의 입꼬리가 휘더니
이내 손을 뻗어 붓을 집어 들었다.
- 당분간 섬서에 머무를 예정이니,
그때 볼 수 있으면 좋겠군.
휘익-
금세 완성된 짧은 답신이 까마귀의 발에 묶였다.
“아버지를 뵈어야겠다.”
사아의 발이 태건전의 문턱을 넘어,
멀지 않은 천마전으로 사뿐하게 향했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천마전 앞에 대기하던 무상이
다가오는 사아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
드르륵-
무상이 답을 하기도 전에
천마전의 문이 사아를 위해 활짝 열렸다.
“나의 사아로구나.”
침상에 누워있던 천마가 어느새 일어나
사아를 맞이하러 문전까지 나온 것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와 앉으려무나.”
천마의 흐뭇한 손짓에
사아가 익숙한 태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의 사아가 무슨 말이 하고 싶었기에
이리 아비를 찾아왔을까.”
천마는 사아의 방문에 기분이 그저 좋은 듯했다.
기실 천마가 매일 태건전에 들다 보니,
사아가 먼저 천마전을 찾는 일이 드물기도 하였다.
“조만간 섬서에 다녀오려 합니다.”
“집에만 있으려니 심심한 모양이구나.”
짐짓 서운한 척을 하는 천마의 말에
사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상이 자하신단을 드시면 몸에 좋다지 않았습니까?
마침 벗이 섬서에 방문한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화원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겸사로 화산과 연결된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아무리 청성진룡이 대단타 하여도
화산에서 자하신단을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니라.”
걱정이 가득한 천마의 낯빛에
사아가 푸슬하게 웃음을 흘렸다.
“아들도 그 정도는 압니다.
허나 화산의 내부 정도는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호라.
천마의 고개가 흡족하게 끄덕여졌다.
“그래, 그 정도라면 걱정이 없지.”
벗을 끔찍이도 아끼기에 만나려는 줄만 알았건만,
기특한 아들은 언제나 아비를 가장 위하였다.
“어여쁜 것.”
천마가 손을 들어 사아의 머리칼을 흐트렸다.
“나의 사아야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위험하다 싶으면 반드시 물러서거라.”
자하신단이 아무리 귀한들 아들보다 귀할까.
“그까짓 화산이야 화산(火山)으로 만들면 그만이니.”
천마는 제 아들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하늘조차도 잿가루로 만들어버릴 작정이었다.
“하하, 그것도 꽤나 재미지겠습니다.”
사아는 천마의 말을 장난이라 여기었으나-
‘그러고 보니 불구경을 꽤 좋아했었지.’
아비는 아들의 말을 흘려듣는 법이 없었다.
***
끄응.
화원이 또다시 미간을 찌푸린 채,
이마에 손을 얹었다.
“산 넘어 산이로구나···.”
장부를 다 보고 방문할 속가와 순서를 정하니,
이제는 데려갈 조를 짜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첫 외행(外行)들일 터인데
아무렇게나 조를 짤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다 같은 사형제 사이라고는 하나,
화원과 다른 사제들 사이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유독 친밀한 사이가 있으면
또 유난히 으르렁거리는 사이도 있는 법이었다.
오랜 기간 인원에 변함이 없는 집단에 머물다 보면
그런 사이들을 대충은 알게 되는 법이었으나-
‘좀처럼 함께 수련한 적이 없으니···.’
화원은 녹황보다 홍류에게 주로 가르침 받은 탓에
좀처럼 사제들과 섞일 기회가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그런다고 일일이 붙잡고 누구와 싸우셨습니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인데···.”
이건 누구에게 도움받을 수도 없지 않은가.
화원이 답답함에 제 머리를 헝클이던 그때-
드르륵!
“대사형! 장부는 다 보셨습니까?”
화창이 벌컥 처소의 문을 열어젖혔다.
평소라면 문을 두드리시는 게 먼저라 했겠으나-
“···! 화창 사제!! 사제가 있었군요!”
지금 화원의 눈에 화창은 그저 빛이었다.
화자배의 막내이자 가장 해맑은,
심지어 모두가 어려워하는 화원에게조차
스스럼없이 말을 붙이는 유일한 존재.
“예? 대사형, 무슨 일 있으십니까?”
화창만 곁에 있다면
조를 짜는 일 정도는 식은 죽 먹기이리라.
“있습니다. 아주 큰 일입니다.”
“장부 보는 것보다 더 큰 일입니까?”
어리둥절한 사제의 얼굴에
화원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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