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3)

“그런 일이라면야 제가 적격이지요!”
조를 짜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화창이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섬서의 속가를 가장 먼저 둘러볼 예정입니다.
최근 풍운관(風雲館)의 세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이
무슨 일이 있는 듯하니 그곳을 중심으로요.”
화원의 설명에 화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유호 사형과 화수 사형, 이연 사저,
그리고 저까지 넷을 데려가시면 될 겁니다.”
화원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화창이야 모두와 친밀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 셋은 화원이 보기에도 별다른 교류가 없는
건조한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조를 이리 짜신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화원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화창이 헤실 웃었다.
“대사형도 참,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요!
우선 유호 사형은 웬만하면 동행하시는 게 좋습니다.
상재(謪才)가 워낙 뛰어난 분이시니,
속가의 사정을 금세 파악해서 도움이 될 거예요.
저는 보시다시피 넉살이 좋아서
종남과 화산에서 예민하게 굴면 써먹기 좋으실 거고,
화수 사형은 과묵하지만 성실한 분입니다.
언제든 대사형의 뒤를 든든히 지켜주실 거예요.
그리고 이연 사저는···가장 아름다운 분입니다.
외모가 아니라, 아니, 외모도 아름다우시긴 한데···.”
화창이 말을 고르는 듯 턱을 매만졌다.
“검. 사저의 검이 말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꼭 눈에 보이는 바람 같아요.”
화창은 제가 고른 말이 만족스러웠는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섬서의 사람들은 본산의 제자들을 마주할 일이
아무래도 드물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확실하게 각인을 시켜주어야지요.
보아라! 이게 청성의 검이다! 하고요.
대사형과 이연 사저가 시범 한 번만 보이시면
저들은 평생 청성의 바람을 잊지 못할 겁니다!”
“화창 사제는 사람을 다루는 재주가 뛰어나시네요.”
화창을 보는 화원의 눈빛에 감탄이 서렸다.
사제들 사이의 속사정이나 알고자 도움을 청했건만,
화창은 적재적소에 사람을 쓰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럼···.”
화창이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머뭇거렸다.
“무언가 바라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큰 도움을 받고 있으니 최대한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 그럼 저도···!
저도 계속 데리고 다녀주시면···안 될까요?”
푸핫.
한껏 눈치 본 것에 비해 약소한 요청이라
내심 긴장했던 화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되려 제가 청하고 싶은 일입니다.
일정이 고될 터인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기실 화창이 동행하여 준다면
어색한 사제들과의 사이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본산과 속가를 끊임없이 오가야 하니
분명 고되고 힘들 터라 말을 꺼낼 수 없었던 차였다.
“예! 가고 싶습니다!
저도 대사형이랑 함께 다니고 싶습니다!”
화원의 물음에 화창이 열렬히 긍정했다.
대사형인 화원을 유독 존경하던 화창이니
고된 일정보다 함께할 기회가 더욱 중했던 탓이리라.
“그럼 저와 화창 사제, 유호 사제를 기본으로 두고
나머지 조를 짜 볼까요?”
“헤헤, 좋습니다! 그럼 호북은 화진 사형이랑···.”
신이 난 화창이 조를 짜며
사형제들의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았고-
“창명 사제는 어떻습니까?”
“창명 사형은 화함 사형과 지나치게 친하니,
한 조에 넣으면 통제가 힘들어질 것입니다.
창명 사형이 세령 사저를 척애(*짝사랑)하는데,
함께 묶으면 득일지 실일지를 모르겠습니다.”
“세령 사매는 창명 사제를 어찌 생각하는데요?”
“톡톡 쏘시기는 하는데, 싫은 눈치는 아닙니다.
창명 사형이 사다 준 목걸이를 내내 하고 계세요.”
“하하, 그럼 도와주는 게 좋겠습니다.”
화원은 화자배의 일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게 되었다.
“화창 사제가 아니었다면
이리 쉽고 빠르게 조를 짤 수 없었을 겁니다.”
화원의 진심 어린 공치사에
화창이 부끄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었다.
“에이, 뭘요. 대사형께서 제 도움을 청하시다니,
어쩐지 얼떨떨한 것이 꼭 꿈꾸는 기분인걸요.”
나이로만 보자면 화창이 위였으나,
어쩐지 진짜 동생이 생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화원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늘어졌다.
***
마주 앉은 녹황을 바라보는
유성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원이에게 속가 일을 맡겼더구나.”
“저도 그 일부터 시작했으니까요.”
유성의 눈이 추억에 잠겼다.
‘이걸···다···읽어야 합니까···?’
어린 제자가 충격에 물든 얼굴이 퍽 귀여웠더랬다.
“원이도 그리 귀엽게 묻더냐?”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군요.”
“그것도 무척 어여뻤겠구나.”
녹황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어여쁘지 않을 때가 없는 아입니다.”
그래서 더 기특하고 안쓰러웠다.
‘이번 일로 다른 아이들과 사이를 좁혀
담온이라는 자를 잊으면 좋으련만···.’
특수한 상황이 겹치고 겹친 탓에
다른 제자들과 어울릴 기회가 적어 외로웠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처음 사귄 벗이니
어린 제자의 마음이 얼마나 설레었을까.
그 마음을 해치고 싶지 않은 녹황은
그저 조용히 화원이 제 벗과 멀어지기를 바랐다.
“내 사부께서도 원이라면 사족을 못 쓰셨는데,
내 제자도 원이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그리움과 장난이 섞인 목소리에
녹황의 시선이 지긋이 스승을 향했다.
“사부님도 다르지 않으시잖습니까.”
하여튼 귀신 같은 놈.
유성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나는 네가 우선이란다.”
불혹을 훌쩍 넘긴 제자의 낯이 붉게 물들었다.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십니다.”
“녀석, 좋으면서 툴툴대기는.”
불혹이 아니라 상수를 넘겨도 귀여울 제자라
유성의 눈길이 따스히 녹황을 훑었다.
“원이가 섬서의 풍운관을 처음으로 정했더구나.”
이미 화원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라
녹황이 놀라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총명한 아이가 아닙니까.”
“유호와 창이의 도움을 받았다더구나.
너는 융통성이 없어 보름을 골머리를 앓았는데,
원이가 그것만큼은 너를 닮지 않은 모양이야.”
이런.
부끄러운 과거 이야기에 녹황이 고개를 숙였다.
“자꾸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십니까···.”
“너도 사제들이 대부분 나이가 많아
어찌할 바를 몰라 어색해하지 않았더냐?
녹진이가 아니었다면 한 달도 넘게 걸렸겠지.”
녹황이 멋쩍은 듯 뒷목을 긁었다.
“그래서 원이에게 똑같은 일을 맡긴 게지?
창이 그 아이 성정에 원이를 안 찾을 리 없으니.”
“···원이가 다른 아이의 도움을 받게 할 만한 일이
그것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오래전 유성이 녹황에게 속가의 방문을 맡긴 것은
지나치게 꼿꼿했던 제자가 유해지기를 바라서였다.
‘혼자 하기가 어려운 일이라면
도움 될 이와 함께하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때로는 부드러운 것이 더 강할 수도 있음을,
물러서야만 나아가는 길도 있음을 가르칠 뜻이었다.
녹황은 그런 유성의 바람대로-
‘녹진아, 나 좀 도와다오.’
힘에 부치면 도움을 구할 줄도.
‘이대로 강행하면 이뤄 놓은 일까지 허사가 된다.
일단은 물러서는 게 좋겠다.’
적당한 때에 물러날 줄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한없이 높게만 보이면 거리감이 크지 않습니까.”
녹황은 화원을 가르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다른 아이들도 알아주었으면 했습니다.
원이도 저희들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다른 제자들이 알아주었으면 했던 것이다.
화원도 그들처럼 골머리를 앓으며 고민하고,
힘들 때가 있어 도움을 필요로 하기도 하고,
외로운 날이면 함께할 이를 찾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동안은 그래도 사조께서 원이 곁에 계셨으나···.’
홍류는 이제 그 누구의 곁에도 없었다.
하물며 화원의 하나 뿐인 벗은 마교와 엮여 있었다.
그자를 화원의 곁에 둘 수는 없으니,
사제들로 하여금 그 빈자리를 메꾸고자 한 것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벌써 유호와 창이를 곁에 둔 원이가 아니냐?
다른 아이들도 그간 어려워서 그랬을 뿐,
다들 원이와 가까워지고 싶어하니 괜찮을 게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면서도
제자가 가장 바라는 말을 해주는 유성이라,
녹황이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 것입니다.”
그래야만 했다.
까악- 까악-
녹황이 한숨을 속으로 삼키는 중에
까마귀 소리가 청성의 하늘을 울렸다.
“효조(*孝鳥, 까마귀)가 우는 것을 보니
황이 네 지극정성이 보답받을 모양이로구나.”
발목에 서신을 묶은 까마귀 한 마리가
울음을 멈춘 채 조양동으로 날아들었다.
***
화원의 곧고 고운 손가락이
까마귀의 발목에 묶인 서신을 풀었다.
- 당분간 섬서에 머무를 예정이니,
그때 볼 수 있으면 좋겠군.
화원의 서신에 비하면 과히 짧은 답신이었으나
그 내용은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담온도 섬서에 오시는구나!”
오랜만에 벗을 만날 것이라 생각하니
화원의 심장이 기대로 들떴다.
토도독.
화원이 까마귀 앞에 준비해 두었던
보리수 열매를 떨어뜨려 주었다.
“서신을 옮기느라 먼 길 고생했을 터인데,
이거라도 먹으면서 쉬려무나.”
화원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인지
까마귀는 고개를 까딱하더니 열매를 쪼아 먹었다.
“이리 수고하는데 이름이라도 지어줄까?”
까딱.
마지막 보리수를 삼킨 까마귀가
기막힌 순간에 고개를 다시 까딱였다.
“하하하, 그래. 네 주인에게 허락은 받아야 하니,
다음 답신을 가져오면 이름을 지어주마.”
까딱.
“오아(*烏鴉, 까마귀)가 영물이라더니,
과연 신통하구나.”
감탄한 화원이 어느새 다 적은 서신을 접어
까마귀의 발에 묶었다.
“네가 다녀오는 동안 멋있는 이름을 생각해 놓을게.
잘 다녀올 수 있겠니?”
까악-
이번엔 울음인가.
까딱이는 대신 우렁차게 우는 까마귀를 보며
화원이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그래, 급하지는 않으니 좀 쉬었다 가렴.”
푸드득.
까마귀가 날개를 푸덕이며 고개를 흔들더니,
이내 하늘로 날아올라 원을 그렸다.
“하하하! 인사하는 거야?
그래, 이름 지어놓을 테니 조심해서 다녀오렴.”
화원이 까마귀를 향해 손을 흔들자
그제야 빙빙 돌던 것을 멈추고 청성을 빠져나갔다.
“흐음···. 이름을 무어라 지어주면 좋으려나?”
심각한 듯 고민을 하면서도
화원의 입꼬리는 내내 내려올 줄을 몰랐다.
***
까악- 까악-
평소라면 창문을 부리로 쪼고 기다릴 터인데.
재촉하듯 울어대는 까마귀 소리에
사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서신을 풀었다.
- 내달 보름에 섬서로 출발할 것입니다.
풍운관이라고 청성의 속가에 머물기로 하였으니,
혹 섬서에 오신다면 풍운관을 찾아주십시오.
‘별다른 것은 없군.’
영특한 녀석이라 무슨 일이 있는가 하였건만.
사아가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자,
까마귀가 톡톡 펼쳐지지 않은 종이 하단을
부리로 두드렸다.
“응? 아, 내용이 더 있었군.”
- 추신. 까마귀가 고생을 많이 하는 듯하여,
보답 삼아 제가 이름을 지어주어도 되겠습니까?
이것이었나.
사아가 눈을 가늘게 뜬 채
까마귀를 지긋하게 바라보았다.
“새 주제에 호사를 누리는구나.”
톡.
사아가 손가락을 들어
까마귀의 부리를 아프지 않게 건드렸다.
까악-
사아의 손길에서 부러움을 느낀 것인지
까마귀가 가슴을 부풀리며 울음소리를 내었다.
“으스대기는. 허락할 것을 아는 모양이지?”
까딱.
“···새가 표정이 있던가.”
어쩐지 오만해 보이는 얼굴이라
까마귀를 보던 사아가 그만 헛웃음을 흘렸다.
토독. 톡.
까마귀가 부리로 탁상에 놓인 종이를 쪼아댔다.
“짐승 주제에 보채기는.”
사아는 툴툴거리는 척하면서도
순순히 붓을 들어 답신을 적어 내렸다.
- 풍운관에서 만나지.
까마귀 이름을 지으면 내게도 알려줘.
금세 완성된 답신이 능숙하게 접히더니
까마귀의 발목에 곱게 묶였다.
파드득-
“인사도 없이 가는 건가? 매정한 녀석 같으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아가는 까마귀 뒤로
사아의 어이없는 웃음소리가 흘렀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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