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지옥 난이도의 조별 과제(4)

처음부터 오수진은 중요한게 따로 있었다.
이 집을 부수지 않고 둘을 무사히 생포할 수 있을지의 여부.
아무리 연구직이어도 수진은 회사 소속 인물이다.
그러니 학생 둘을 혼자 못 잡을 수준은 아니었다.
집채만 한 오소리가 본체인 경인과 달리, 본체를 알 수 없는 가짜 이가을은 신중히 다룰 필요가 있긴 했다.
또한 행여나 둘이 본체로 변해 집이 부서지거나 저들이 내빼면서 인간들에게 피해 입히면 곤란했다.
집을 복원하는 게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수진은 김옥희와 있던 흔적이 더 무너지는 게 보기 싫었다.
가을은 수진이 실력이 없다고 착각하고 있던 것뿐이었다.
진작부터 생사여탈권이 수진에게 있으리란 건 생각조차 못 했다.
유민준이 제시한 방법은 꽤 가짜 이가을을 무력화하는 데 도움이 됐다.
시간과 효과를 가늠하려 약간 흡입한 게 수진의 본체에 꽤 묵직하게 다가왔으니, 저 둘에겐 말할 것도 없을 터였다.
이제는 흡사 검은 봉분처럼 변한 검은 팔들이 꿈틀거렸다.
역시나 가짜 이가을 쪽은 여전히 저항이 심했다.
수진이 손바닥을 펴자 검은 봉분이 마치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이 와중에도 유민준은 수진의 능력이 청소에 유용하겠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수진은 서늘한 시선을 올려 사웅에게 옮겼다.
“덕분에 심문은 나중에 해야겠네.”
조심스럽게 유민준이 물었다.
“죽인 거야?”
“잠깐 가둔 거야. 가능하면 살려서 심문할 생각이니 걱정 마.”
걱정해서 물어본 건 아닌데.
그러나 유민준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사웅은 매섭게 올라간 눈매를 크게 뜨며 항의했다.
“야, 오수진. 우리도 할 얘기 있지 않냐?”
“무슨 이야기.”
“적어도 설명은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진짜 이가을도 찾아야 하고.”
사웅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 건지 파헤칠 기세였다.
수진이 냉정하게 답했다.
“진짜 이가을 수색은 너희가 상관할 바 아니야. 학교에서 전담해야 할 일이지.”
“아니, 근데 아까 저 새끼 반응 보면. 학교에도 블러드 스펙터들이 있을 수 있지 않나?”
“교내에서는 함부로 못 움직일 테니 겁먹지는 마.”
“쫄긴 누가 쫄아!”
수진이 지친 기색이 가득한 유민준을 슥 바라봤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수진은 차로 두 사람을 데려다주는 게 나을 거 같았다.
포탈을 이용해 한성에 보내는 것보다는 곧장 학교로 가는 게 안전할 터.
기숙사에 들어가는 걸 봐야 마음이 편할 거 같기도 했다.
수진은 당장 마고 총장도 만나봐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녀가 이 일을 모를 리 없을 테니까.
한숨 섞인 어조로 수진이 말했다.
“일단 나가자. 너희 둘 다 학교로 데려다줄 테니까.”
“아니, 오수진 너······.”
“이사웅. 나중에.”
언덕 아래쪽 주차장에 차를 대놨다는 수진의 말에 유민준이 화색을 띠며 먼저 앞장서자, 사웅도 고분고분 따라왔다.
“유민준 넌 운동 좀 해야겠더라. 남자가 그게 뭐냐?”
“이게 하고 있는 건데······?”
“어, 그러냐?”
“······.”
“그, 유산소만 하지 말고 나랑 근육이라도 좀 키우자는 소리지.”
“인간은 원래 몸 만드는 데 시간이 걸려.”
“그, 그러냐? 내가 인간 친구는 네가 처음이라.”
슬렁슬렁 걸어 비탈길을 내려가는 데 가로등 불빛이 깜박거렸다.
유민준은 말을 돌렸다.
“여긴 동네가 엄청 조용하네.”
아까보다 더 주변이 적막하다.
을씨년스러운 정도였다.
사웅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새벽이니까 인간들은 다 자겠지 뭐.”
“그런가? 아직 새벽 2시밖에 안 됐던데.”
“그래? 진짜 오늘 하루 개같이 길다. 안 그러냐.”
“근데 이경인이랑 이가을 어디 뭐 신고 안 해?”
“오수진이 알아서 하겠지. 그치?”
“그래.”
수진이 봐도 오늘따라 유난히 불 꺼진 집이 많긴 했다.
방앗간 부부 내외는 늦게까지 TV를 켜두곤 했는데.
수진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좀 빨리 걷자. 유민준, 따라올 수 있지?”
주차장에 가까이 갈수록 위화감은 커졌다.
사웅도 비슷한 걸 느껴 수진을 향해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수진이 사웅의 입을 막았다.
“쉿.”
유민준도 숨을 죽였다.
여기가 주차장이었구나.
인적이 드문 동네에 줄 세워진 먼지 쌓인 낡은 차들은 꼭 무덤 비석 같았다.
주차장이라기보다는 폐차장이라고 해도 될 만큼 버려진 흔적들이 가득했다.
인간인 유민준도 알아챌 만큼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언가 질질 끌리는 소리도 들렸다.
-너흰 여기 있어. 내가 보고올게.
수진은 트럭 뒤에 두 사람을 두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뭐지?
긴 머리를 흩날리며 법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뒤쪽엔 무언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수진이 눈가를 좁히던 순간, 남자는 무언가를 획 뜯어냈다.
인간의 형상을 했던 남자가 쩍, 하고 턱을 벌렸다.
배까지 길게 내려온 턱이 길게 열렸다가 닫혔다.
우걱거리며 으드득대는 모양새는 누가 봐도 수상했다.
수진은 몸을 낮춰 더욱 바짝 다가갔다.
구름이 가렸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수진은 남자가 뜯어 먹는 것이 골목 슈퍼 주인아저씨의 머리라는 걸 알아봤다.
고민 없이 수진이 검신을 번뜩이며 몸을 날렸다.
남자의 주변에 쌓여 있는 건 이 동네에 사는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재빠르게 몸을 획 돌려 검 끝을 피했다.
“누구시오?”
“······.”
“내 아리따운 여인은 해치고 싶지 않소.”
남자는 느긋하게 웃으며 날카로운 검끝을 손으로 잡았다.
수진이 주술을 걸자 펑! 하며 폭발이 일어났다.
남자에겐 그을음도 남지 않았다.
그는 깃털처럼 가뿐하게 본네트에 뛰어오라 킁킁거렸다.
안광을 번뜩이며 사웅과 유민준이 있는 쪽을 향했다.
“이런 쥐새끼들이 더 있었구료?”
깜짝 놀란 유민준이 뒤로 넘어졌다.
“유민준!”
사웅이 빠르게 유민준의 뒷덜미를 잡아끌어 던지고 그 앞을 막아섰다.
“으아!!!”
소리를 지르며 유민준의 몸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귓가가 먹먹해질 만큼이었다.
쾅 소리와 함께 구부러진 사이드미러에 머리를 부딪히며 바닥에 쓰러졌다.
삽시간 남자의 손아귀에 사웅은 팔목을 잡혔다.
저항할 틈도 없이 왼팔이 찢기듯 뜯겼다.
“아악!!”
고통에 사웅이 비틀거렸다.
“너, 이 새끼······.”
“소승, 남자 손이 닿는 건 별로라. 실례 좀 했소.”
얼떨결에 꽤 멀리 던져버린 유민준은 정신을 잃었는지 미동이 없었다.
사웅은 피와 땀을 쏟아내며 너덜거리는 어깨를 감쌌다.
살점이 이리저리 뜯긴 탓에 지혈이 더뎠다.
남자는 느긋하게 사웅의 팔을 들고 제 손끝의 피를 할짝였다.
“그대가 인간인 줄 알았소만.”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흐음. 어린 요괴구려? 귀하는 곰족인가?”
“알, 아서 뭐 하게, 이 개자식아.”
남자는 귀찮다는 듯 혀를 찼다.
“소승은 어린 수컷 요괴들한테는 관심 없소이다.”
틈을 보던 수진이 채찍을 휘두르듯 사복검을 세차게 뻗어냈다.
남자는 손등으로 검날을 쉽게 쳐냈다.
콰과광!
수진의 기가 실린 강력한 일격이 튕겨 나가며 주차된 자동차 몇 대가 반파됐다.
“이 소저는 두고 그대들은 갈 길 가시오.”
말을 마친 남자가 휙 사웅의 팔을 던져주었다.
사웅은 이를 악물었다.
욕을 한 바가지 해주고 싶지만 정신을 붙들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사웅이 떨어진 팔을 향해 기어가는 걸 보며 수진은 미간을 좁혔다.
그래도 아까 전 치료 부적을 잔뜩 주었으니 팔 정도는 금방 붙이겠지.
수진은 검을 길게 펼쳐 다시 크게 휘둘렀다.
“나한테 관심이 많은가 보네.”
펼쳐진 사복검의 검신이 거대한 원을 그리다가 쉭 소리를 내며 빠르게 남자의 팔을 옭아맸다.
“소승, 미인과의 대련은 즐기는 편이라.”
그러나 기를 가득 실어 팍 잡아당겨도 그는 여유롭게 버텼다.
팔이 잘려 나갈 법한데 피부가 어떻게 된 건가.
수진이 검에 뇌격을 싣고서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살생을 저질러 놓고 잘도 말하는군.”
수진의 손끝에서 시작된 번쩍거리는 빛에 남자가 움찔했다.
그는 빠르게 팔과 몸을 돌려 뇌격이 온전히 검을 타고 흐르기 전에 검에서 벗어났다.
촤촤작.
뇌격이 실린 사복검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척추뼈처럼 꿈틀댔다.
남자는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소저는 혈귀대 소속 아해가 아니로군?”
“글쎄? 넌 혈귀회와 무슨 사이지?”
“서로 갈 길 가는 사이오만.”
숨결조차 차갑게 얼어붙는 긴장감이 수진의 등골을 스쳤다.
“결계는 어찌 뚫고 들어왔지?”
“하하. 본디 소승에게는 결계가 통하지 않소.”
수진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공중에서 사복검을 회전시키며 내려찍었다.
남자는 신속하게 몸을 띄워 공격을 피하더니 손끝을 세워 수진의 옆구리를 노렸다.
허리를 비틀어 반격을 피한 수진은 검의 평형추로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남자가 휘청이는 걸 봐서는 머리 쪽에는 공격이 먹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완전히 돌아갔던 머리를 남자는 다시 뿌득거려 제자리로 했다.
수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삿된 것이 기어들어 왔구나.”
구하카다.
일반적으로 구하카에게는 결계나 주술이 통하지 않으니 납득이 간다.
뇌격에 반응했던 건 그게 수진의 신력인 탓일 거였다.
저것들은 죽은 인간을 먹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아직 동네 주민들이 살아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남자는 태연하게 목을 부드득거리며 말했다.
“내 이런 검에 대해 들은 적이 있던 거 같은데······흐음. 언제였을꼬······.”
수진이 파지직거리는 사복검을 장검 형태로 모았다.
목을 노리듯 빠르게 거리를 좁힌 그녀의 검을 피하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하. 그대가 이 구역을 담당하던 회사의 앞잡이시오? 무척 미인에다 몸매가 좋다 소문을 들은 적 있네만.”
오늘따라 이놈이고 저놈이고, 쓸데없는 말이 많은 것들만 잔뜩 걸린다.
“······.”
“실물은 기대 이상이구료!”
구하카가 있다는 건 무언가를 찾는 중이란 것.
적당히 속내를 떠보려 수진이 대답했다.
“나에 대한 소문을 들었나, 구하카 따위가?”
“소승은 아리따운 여인에 관한 이야기는 늘 귀담아듣는 편이라오.”
“그 법복이나 벗고 말하지?”
“그대도 벗어준다면 못 벗을 것도 없소만.”
“살아생전에도 여색(色)을 밝히다 파문당했나?”
“뜻이 달랐던 거라 하겠소이다. 하하.”
냉소적인 미소로 수진이 물었다.
“그래서 뭘 찾으러 인세까지 나왔을까?”
“이런. 말씀드릴 수 없다는 거 아시지 않소.”
“그럼 네 놈은 필요가 없겠구나.”
“소승도 안타깝구려. 그대 같은 미인을 죽여야 한다니.”
사웅과 수진은 서로의 움직임을 직관적으로 읽어냈다.
비틀거리던 사웅이 재빠르게 남자의 다리를 향해 돌진하며 발을 날렸다.
그 순간에 맞춰 수진은 사복검을 펼쳐 남자의 목을 겨냥했다.
남자는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컷 놈이 감히 끼어들어?”
사웅이 비아냥댔다.
“변태 땡중 새끼, 거 말 많네.”
수진이 주었던 부적을 덕지덕지 붙여 붕대처럼 감싼 팔이 덜렁거렸다.
당연하게도 아직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응급처치에 불과한 수준이어도 치료 부적 수준이 높아서 인지 피는 금세 멎었다.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긴 극심한 고통에 식은땀이 흘렀다.
감각이 없어 균형을 잡긴 힘들지만 다리는 움직일 수 있는 상태였다.
달빛이 한 번 더 내리며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남자의 목 뒤에는 二(2)라고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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