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역할을 거부함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충돌주의
작품등록일 :
2024.05.13 03:07
최근연재일 :
2024.07.10 23:26
연재수 :
33 회
조회수 :
1,767
추천수 :
416
글자수 :
204,326

작성
24.07.05 22:40
조회
19
추천
3
글자
11쪽

31화 전조(3)

DUMMY

퇴원한 지 일주일이 흘렀다.

나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팔각형 창문 밖으로는 아직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발치에서는 모쿠모쿠가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몸을 말고 자고 있었다.

침대에 누운 채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한성 쪽 시간으로 새벽 4시였다.


‘서울은 지금쯤 오후 4시 무렵이겠네.’


입원해 있는 동안 내 몸이 완벽히 한성 쪽에 적응한 탓이었다.

오수진이나 이사웅은 진작 퇴원했지만, 나는 병실에 꼬박 16일을 머물렀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건 욕심이긴 했지.’


사실상 유민준의 몸은 뼈오를풀과 소원혜 교수가 행하는 정체불명의 치료들로 3일 만에 완쾌되었다.

그러나 추가 검사와 사건 조사 등을 이유로 2주를 꽉 채워 병동에 머물렀던 거였다.

유민준은 한국 대학교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 어려웠다.

졸업장 욕심 때문이다.

그 마음을 눈치챈 예루리는 김이신을 유민준으로 둔갑시켜 한국 대학교에 보냈다.


[민준 님. 김 서방들과 오늘은······]


오늘도 김이신이 메신져를 통해 한국 대에서 학교생활이 어땠는지 장문의 문자 메시지와 사진이 잔뜩 와 있었다.


‘그래도 신입생이라 다행인가. 아직 특별히 친한 사람도 없으니.’


위험한 도박을 2주나 한 셈이었지만, 그 도박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이번 학기만 이신 형한테 부탁하고. 다음 학기는 역시······한국 대 쪽은 휴학해야겠네.’


그러나 하늘 대학교 쪽은 달랐다.

혈귀회, 블러드 스펙터라고 자칭하는 단체에 습격을 받았다는 반쪽짜리 진실 탓에 병결 처리 되었다.


‘그나저나 1학년 1학기부터 병결이라니.’


평생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동안 결석은 해본 적 없던 나였다.


부표처럼 떠다니던 마음을 하늘 대에 굳히기로 결심도 한 마당에 핸드폰이나 보면서 누워만 있긴 좀 그랬다.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가볍게 몸을 피고 가부좌를 틀었다.

소원혜 교수와 <명상과 수행 입문> 과목의 김선비 교수가 고안해준 기혈 순환 스트레칭을 하려 호흡을 가다듬었다.

거실에서 도진혁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이미 헬스장에 갈 준비를 다 마친 모양이었다.


‘하여간. 부지런한 놈.’


문득 나는 최근 도진혁의 행동이 신경 쓰였다.

온가람 말로는 2주 전쯤부터 도진혁이 의무실에 드나드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데 나한테는 기술을 연마하느라 회복 물약을 쓰지 않고 있다고 했고.

그런데 눈치가 그게 다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직접 물어보진 않았다.


“저 새끼 요즘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나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오늘도 네가 문 열었어?”


김철진 조교는 놀란 눈으로 헬스장에 들어섰다.

그는 청목관에 있는 헬스장, 동진관의 아침을 담당하는 사람이었다.

땀을 듬뿍 흘리며 전완근을 운동하던 도진혁이 철진을 보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 선배님. 좋은 아침입니다.”

“진혁이 요즘 엄청 열심이네. 인간계, 서울에서 어디 뭐 대회라도 나가?”


인간형과 본체를 따로 관리해야 하는 요괴 선인의 특성상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게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도진혁이 철진을 향해 대꾸했다.


“그냥. 관리하는 거죠.”


철진은 이미 깎아지를 듯한 도진혁의 근육들을 보며 한숨을 뱉었다.


“쉬엄쉬엄해. 묘하게 자잘한 부상도 요즘 잦은 거 같던데.”

“······괜찮습니다.”


걱정된다는 듯 철진의 눈길이 도진혁의 어깨로 향했다.


“붕대로 감아둔다고 능사가 아니야.”


사실 도진혁은 소속사인 HAN엔터 대표가 지원해 준 상급 치유 물약도 부지런히 쓰고, 의무실에서 치료도 받아고 있었다.

하지만 낫는 속도보다 다치는 속도가 더 빨랐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녀석 과묵하긴. 서울에서 하는 그 티브이 프로그램에서는 잘도 말하더니만.”

“그건 대본이지 않습니까.”

“하여튼. 난 저기 본체용 체력단련실 청소 좀 하고 있을 테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라. 알겠지?”

“예. 선배님. 감사합니다.”


잠시 도진혁은 어젯밤의 사투를 떠올렸다.

요즘 따라 인간 세계에만 나가면 악선(惡仙)들이나 마선(魔仙)들이 도진혁을 찾아왔다.

꼭 무언가를 시험이라도 해보듯 그들은 아무 이유 없이 시비를 걸었다.

대개 악선이나 마선은 목적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작자들이다.


그러니 도진혁에게 지금 상황은 썩 달갑지 않았다.


‘무슨 목적인지 밝혀야 할텐데.’


지금은 집요하게 저 하나를 노리고 있지만 나중엔 인간에게까지 해를 끼칠 지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이 스쳤다.

가뜩이나 혈귀회나 구하카 문제로도 복잡한 나날이었다.

인간인 유민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상태까지.

룸메이트인 유민준이 병동에 있는 동안은 안심이었지만, 이제는 좀 더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당분간은 유민준이 그래도 서울에 갈 일은 없댔으니. 다행인가.’


도진혁은 운동을 마치고 911호로 돌아왔다.


“진혁냐야. 나 밥.”


청목후, 모쿠모쿠가 폴짝거리며 도진혁을 반겼다.

완벽히 집고양이 모습을 한 모쿠모쿠였지만, 도진혁은 언제나 예의 바르게 굴었다.


“기침하셨습니까. 청목후님.”


주방이라고 하기엔 아직 초라한 부엌 찬장에서 도진혁이 캔으로 된 고양이 사료를 꺼냈다.


“연어랑 닭고기 맛으로 달라냥.”

“예. 알겠습니다.”


처음엔 위대한 후(吼)의 취미가 미물을 위해 만든 사료나 먹는 거라니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지만, 이제는 제법 도진혁도 캔따개 역할에 적응된 상태였다.


“청목후 님. 유민준은 어디 갔습니까?”

“김선비 보러 일찍 나갔다냥.”

“기혈 순환 운동을 배운다고 했던가요.”

“그렇다냥. 그딴 거보다 얼른 민하냐가 숨긴 물건들이나 찾는 게 좋을텐데냥.”


챱챱거리며 다이아가 빼곡히 번쩍거리는 밥그릇에 모쿠모쿠는 얼굴을 묻었다.


“근데 너희 나 없을 때 싸웠냥?”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런데 왜 요즘 둘이 그렇게 데면데면하냥?”

“그런 거 없습니다. 유민준이야 퇴원한지 이제 겨우 일주일 지났고. 저는 요즘 서울 쪽 일이 좀 많습니다.”


단지 마주칠 일이 많지 않다는 듯 도진혁이 어물쩍 넘기려 하자, 모쿠모쿠가 눈을 가늘게 떴다.


“민준냐를 걱정시키지 마라냥.”


누가 누구 걱정을.


“······제가 유민준 쪽을 걱정하는 겁니다. 인간은 약하지 않습니까.”

“쯧. 너한테 피 냄새가 난다냥. 모를 줄 알았냥?”


도진혁이 곤란한 듯 고요한 미소를 지으며 모쿠모쿠를 회유했다.


“······기왕 모른 척해주셨으니, 며칠 더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진 속 지리 여행> 수업 대신, 도진혁은 서울에 모 방송국으로 향했다.

카메라 롤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고정 출연자로 활동 중인『레전드 헌터즈』예능 프로그램 촬영을 위한 회의 탓이었다.

다음 주에 있을 야외 촬영 장소는 한적한 산속의 사찰로 낙찰되었다.

탁귀의 흔적이 있다는 한 대표 말에 도진혁이 일부러 적극 추천 했던 장소였다.

스튜디오 촬영을 마친 뒤 작가들이 다가왔다.


“진혁 씨는 어쩜 그렇게 매번 성실하게 자료 조사를 해와요?”

“그러게. 진짜 한 대표님이 소스만 주고 도진혁 씨가 다 스스로 조사한다면서?”


대외용 미소를 장착한 도진혁이 멋쩍다는 듯 대답했다.


“다 저희 대표님이 좋은 팁을 주셔서 그런 거지, 제가 하는 게 뭐 있겠습니까.”

“에이. 그래도 우리가 이제 같이 일 한 지 벌써 두 달이 넘었는데. 진혁 씨 글씨체도 못 알아볼까 봐?”


금칠에는 면역이 많이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도 도진혁은 조금 곤란했다.


“칭찬하는 거야, 진혁 씨. 그렇게 쑥스러워할 거 없어.”

“예. 감사합니다.”


유민준과 마주치지 않은 채 며칠이 지났다.

일방적으로 도진혁이 피한 거였다.


유민준과 마주치지 않은 채 며칠이 지났다.

일방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도진혁이 피한 거였다.



**


촬영 날이 밝았다.

도진혁은 매니저와 함께 사찰로 향했다.

산속 깊숙한 곳에 위치한 사찰은 오래간만에 맞은 인파 탓에 북적거렸다.

스태프들이 설치된 장비를 점검하는 동안, 도진혁은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예상했던 대로다.

탁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자, 이제부터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진작 카메라는 돌고 있었지만, 인위적인 PD의 외침이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도진혁은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었다.

PD가 알 수 없는 웃음소리를 내며 고정 출연자들에게 통보 아닌 통보를 했다.


“오늘은 우리 헌터즈를 위한 특별 게스트가 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주지 스님에게 이 사찰과 관련된 일화를 듣는 것이 첫 번째였다.

도진혁을 포함한 출연진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작진을 바라봤다.


“자, 나와주세요!”


PD의 외침에 도진혁은 고개를 돌렸다.

제일 먼저 나온 건 고정 출연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영화배우의 친구였다.

도진혁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가장 뒤에 나온 건 나이가 제일 어린 도진혁의 친구.

유민준이었다.

도진혁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간신히 표정을 갈무리한 도진혁이 매니저쪽을 힐끔 바라봤다.

매니저는 무척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이런 게 익숙한 사람처럼 유민준은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국 대학교 1학년 유민준입니다.”

“이야, 일반인 출연자 분 중에서 가장 잘 생기셨네. 유유상종이라더니. 우리 도진혁 씨 친구 맞네!”

“심지어 한국대생?”


주변에서 사람들이 웃음을 자아냈다.

억지로 도진혁도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카메라 앞에서 대화가 오고 갔다.

일반인 출연자들은 각자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미려한 말솜씨를 가진 개그맨 출신 연예인이 유민준을 향해 질문했다.


“그럼 유민준 씨는 오늘 어떻게 연락받고 오셨어요?”


뻔뻔하게 카메라를 바라보며 유민준이 대꾸했다.


“아, 저는 여기 진혁이네 대표님이 연락주셔서요. 깜짝 놀라게 해준다는 데 빠질 수가 있어야죠.”

“와, 진혁 씨 근데 진짜 놀라긴 했나 봐.”

“크큭. 친구가 와서 무슨 소리 할지, 걱정되는 표정 아니에요?”


방송용 얼굴을 간신히 끄집어낸 도진혁이 애써 소리내 웃었다.


“하하.”


이후에도 능청스럽게 유민준은 멘트를 받아쳐댔다.

도진혁은 속으로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이 자식 여기 왜 온 거야?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주인공 역할을 거부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7/5 1~5화 내용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1 24.07.05 13 0 -
공지 출처 및 참고 문헌 목록입니다(회차마다 필요시 업뎃 예정) 24.06.10 33 0 -
공지 공모전 특성상 제목 변경이 가능한 관계로 테스트 진행합니다! 24.06.05 32 0 -
33 33화 금장사(金藏寺)에서 (2) 24.07.10 19 1 11쪽
32 32화 금장사(金藏寺)에서 (1) 24.07.08 19 2 13쪽
» 31화 전조(3) 24.07.05 20 3 11쪽
30 30화 전조(2) 24.07.03 19 3 12쪽
29 29화 전조(1) 24.07.01 21 3 13쪽
28 28화 각자의 사정 24.06.28 21 3 13쪽
27 27화 지옥 난이도의 조별 과제(5) 24.06.26 24 3 13쪽
26 26화 지옥 난이도의 조별 과제(4) 24.06.24 25 5 12쪽
25 25화 지옥 난이도의 조별 과제(3) 24.06.24 22 4 9쪽
24 24화 지옥 난이도의 조별 과제(2) +1 24.06.21 24 5 16쪽
23 23화 김 여사 24.06.19 33 5 13쪽
22 22화 지옥 난이도의 조별 과제 (1) 24.06.17 29 5 12쪽
21 21화 과제 그 절망의 경계에서 24.06.16 36 10 13쪽
20 20화 설마, 아니겠지? 24.06.16 37 10 12쪽
19 19화 남의 연애사에는 끼는 게 아닌데(3) 24.06.16 36 10 16쪽
18 18화 남의 연애사에는 끼는 게 아닌데(2) 24.06.14 41 17 15쪽
17 17화 남의 연애사엔 끼는 게 아닌데(1) 24.06.13 42 17 12쪽
16 16화 격세지감(隔世之感) (2) +1 24.06.12 42 18 13쪽
15 15화 격세지감(隔世之感) (1) 24.06.12 42 18 13쪽
14 14화 당랑거철(螳螂拒轍) 24.06.10 48 18 14쪽
13 13화 기분이 이상한데? +1 24.06.07 48 18 15쪽
12 12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2) 24.06.05 54 18 16쪽
11 11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1) 24.06.03 49 18 16쪽
10 10화 버스를 타려면 버스 기사와 눈을 마주치기 +1 24.05.31 57 18 14쪽
9 9화 도망쳐야 할 때와 싸워야 할 때를 구별하기 24.05.29 69 20 15쪽
8 8화 해야 되나 싶으면 하기 +1 24.05.27 67 20 15쪽
7 7화 해도 되나 싶으면 하지 말기 +1 24.05.24 70 20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