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금장사(金藏寺)에서 (1)

주지 스님 청훈(淸薰)과 별좌 스님 진규(眞揆)가 등장했다.
예정대로 사찰의 전설을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도진혁은 두 사람의 기운을 가늠해 보았다.
여든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청훈은 무척 등이 곧았다.
뿜어져 나오는 기세도 평범한 인간치고는 정순하고 맑았다.
탁귀의 흔적이 있는 곳에서 지내는 사람들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을 정도였다.
‘진규 스님 쪽도 흐트러짐 없이 정(正)하다. 이상한데.’
두 사람에 관한 간략한 소개를 마친 뒤 주지 스님 청훈(淸薰)이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저희 금장사(金藏寺)는 아주 오래전부터 특별한 전설을 두 가지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금장사는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나름 유서 깊은 사찰이었다.
“예로부터 이 금장사 주변은 음기가 강해, 악귀나 마물이 들끓었다고 합니다. 인근의 사람들이 도무지 살 수가 없었지요.”
스님의 이야기는 출연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때 나타난 용맹한 스님이 바로 대선사 연선(蓮善)입니다. 연선 스님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마구니들을 퇴치하고 저희 금장사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대선사 연선이 남긴 진신사리에는 강력한 영력이 깃들어 있었다.
봉안된 법당은 산을 좀 더 올라가면 있다는 말도 주지 스님이 덧붙였다.
물론 진위는 도진혁이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기 전까진 알 수 없는 거였다.
만약 강력한 영력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지금까지 잔존해 있었다면 탁귀 따위가 경내에 흔적을 남길 수 없었을 테니까.
진규 스님이 말을 받아 이었다.
“또한, 우리 사찰에는 연선 스님께서 강력한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 당시에 쌓았던 석탑들이 존재하지요. 잠시 후 보게 되실 텐데, 지금은 저쪽 보호각 건물에서 보존 중입니다.”
30년 만에 일반인을 들여보내는 게 처음이라며 진규 스님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도진혁이 노린 것도 사실 그 부분이긴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전설은······.”
두 번째 전설은 사람을 먹는 상자에 대한 거였다.
욕심이 과하면 해가 된다는 교훈을 담은 전설이라며 이야기가 이어졌다.
출연진들 모두가 주지 스님, 청훈의 말에 집중했다.
적절한 리액션은 덤이었다.
유민준이 보기엔 아마도 청훈 스님의 설득력 있는 목소리가 한몫하는 듯했다.
한편 카메라가 돌고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것에 유민준은 큰 거부감이 없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역시 갓해찬, 갓해신!’
리액션 봇이 된 유민준의 시선은 고정 멤버, 특히나 두 중년에게 향해 있었다.
어린 시절 라디오에서 듣던 목소리인 가수 신해찬과 스크린에서 자주 보던 감초 영화배우 류해신까지.
두 사람은 예능에서 해룡(海龍) 형제로 불리고 있었다.
‘오기 잘했는데? 도진혁이 이따 좀 뭐라고 할 분위기긴 하다만.’
카메라가 돌든 말든 신해찬은 진지하면서도 예술적 감성이 넘쳤다.
가끔은 엉뚱한 발언으로 주위 사람들을 당황시키는 것조차 멋있었다.
친근한 인상인 류해신은 재치 있는 입담으로 분위기를 들었다 놨다 하는 게 보통이 아니었다.
‘진짜 낭만 있는 아저씨들이네.’
화면에서만 보고 듣던 사람들이 눈앞에서 티키타카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도진혁 친구로 온 것만 아니었어도 잔뜩 주접을 떨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지성인으로서 나름의 체면치레는 결코 잊지 않았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슬레이트 소리가 울려퍼졌다.
“30분만 쉬었다 갑시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인지 얼굴 근육에 바짝 힘을 준 도진혁이 유민준의 팔을 붙잡았다.
“유민준, 너······.”
그에게 한마디 하기도 전에 영화배우 류해신이 먼저 나섰다.
“그, 유민준 씨, 내가 잠깐 물어볼 게 좀 있는데.”
“네. 해신 형님. 편하게 말씀하세요.”
“아유, 어린 친구가 싹싹하기까지 하네.”
능청맞게 유민준은 류해신에게 대꾸했다.
“아닙니다. 뭘요. 영광입니다. 형님.”
“형님이라니. 너무 듣기 좋다. 동생. 진혁아, 친구분 좀 내가 잠깐 빌릴게?”
영업용 미소를 활짝 지은 도진혁이 깍듯하게 대답했다.
“예. 형. 전 그럼 잠시 매니저한테 좀 다녀오겠습니다. 말씀 나누세요.”
“어어, 그래, 그래.”
“진혁아, 이따 봐!”
쌩하니 몸을 돌린 유민준을 향해 류해신이 눈을 빛냈다.
“우리 딸이 내년에 고3인데······.”
돌아선 도진혁은 슬쩍 미간을 구겼다.
다른 출연자들만 해도 약간 뻣뻣하고 어색한 구석이 있는데, 유민준은 그런 기색이 없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든다.
요즘 같은 때에 유민준처럼 두 세계에 다 속한 부류의 인간은 손쉬운 타겟이다.
방송에 얼굴을 내비치는 게 좋은 선택은 아닐 텐데.
기민하게 눈치를 보던 도진혁의 매니저 최판길이 다가왔다.
“진혁아, 그렇게 놀랐어?”
“미리 말씀 좀 해주시지 그랬어요. 형.”
“아니, 난 요즘 너 기운이 너무 없어 보여서. 이번 기획에 네 학교 친구들을 부르면 어떨까 해서 한 대표 님하고 얘기했지.”
“제가 기운이 없는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사실 매니저 판길은 도진혁은 악선이나 마선들에게 시비가 자주 걸린다는 걸 모른다.
그러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한 대표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유민준을 여기에 보내시면 어떡합니까.]
한 대표에게 답장이 왔다.
[따지고 보면 네 유일한 인간 친구잖아. 기숙사도 같은 호수 쓴다며?]
[그게 문제죠. 대표님.]
[왜? 싸웠니? 한국 대학교 학생이라 간판도 좋고. 마스크도 괜찮아서 딱이던데.]
재밌을 게 분명하다는 생각으로 한 대표가 일을 꾸민 게 훤히 보이는 듯했다.
미리 한 대표에게라도 귀띔을 해둘 것을.
만약 오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명백히 제 실책이다.
한숨을 내쉬며 도진혁은 손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대표님, 사실······.]
최근 제게 일어났던 일에 관해 도진혁은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한 대표는 빠르게 답변이 왔다.
[그런 일이 있으면 진작 좀 말하지,]
그렇지만 한 대표는 탁귀 하나 잡는 것 치고 과한 인력이 움직였으니 걱정 말라고 덧붙였다.
무슨 헛소리냐고 답장한 도진혁은 커피차 쪽으로 걸어갔다.
커피차 앞의 테이블에서 어딘지 들떠 보이는 장나비가 손을 흔들었다.
“하이. 우리도 구경 왔어. 일일 알바 겸.”
도진혁의 미간에 균열이 다시 일었다.
“너희도 왔어?”
그제서야 장나비와 온가람도 촬영장에 왔다는 걸 발견한 도진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희한한 조합이군.”
온가람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민준이를 혼자 보낼 순 없으니까.”
이래서 탁귀 하나 잡는 것치고는 과한 인력이 움직였다고 한 대표가 말했나 보다.
하나둘 커피를 가지러온 무리들에 의해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HAN 엔터에서 새로 데뷔할 친구들이라도 되나 봐요?”
“내가 듣기론 두 분도 진혁 씨 친구라던데?”
진한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장나비는 스태프와 출연진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워낙 장나비의 생김새가 화려한 탓도 있었다.
온가람도 눈길을 끌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가람 씨는 형 없어?”
특히나 여자 스태프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도대체 한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쟤들까지 보낸 걸까.
입매가 굳은 도진혁이 눈으로 탁귀의 흔적을 살폈다.
[표정 관리 좀 하지, 도진혁?]
뜬금없이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장나비가 전음을 보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 그나저나 용케 꼬리를 감추고 왔군.]
[단 조교님이 힘 좀 써줬어.]
절로 혀를 차게 된다.
단몽화 조교 본인이 직접 왔으면 모를까.
장나비와는 얼마 전에 안면을 튼 사이라 크게 그녀의 실력에 관해 기대감이 없었다.
게다가 온가람은 책사에 더 가까운 인물이긴 해도 경험이 현저히 부족하다.
[그래서 너희가 탁귀 잡는 걸 돕는다는 건가?]
[민준이한테 탁귀가 찝쩍대지 못하게도 하고, 겸사겸사.]
팬이라는 공양주 보살님의 손에 이끌린 도진혁은 영업용 미소로 커피차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으며 대꾸했다.
[탁귀의 기운을 감지할 줄도 모르면서, 무슨 수로.]
[그건 걱정말고 너흰 촬영이나 잘해.]
[방심하지 마라.]
한쪽에서는 원주(院主) 스님 경소(耕塑)가 주지 스님과 대화 중이었다.
“청훈 스님 석탑을 일반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지······.”
“허허허.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스님.”
“하지만 요즘 도통 산세도 주변 분위기도 흉흉하기 그지없지 않습니까.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청훈은 저 멀리 커피 차 앞에 서 있는 도진혁과 장나비 그리고 온가람을 바라봤다.
청훈 스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귀인들이 오셨으니, 별 탈 없을 겁니다. 허허.”
“그러길 바랍니다. 하아.”
촬영팀 스태프들은 석탑이 있는 건물 쪽으로 이동해 준비를 마쳤다.
경내에 이질적인 콘크리트 건물이 왜 있는 건가 싶었다.
알고 보니 콘크리트 골조 건물 안에는 사방이 유리로 된 거대한 관이 있었고, 그 안에 목조 건물이, 또 그 안에 석탑들이 있는 구조였다.
유리관은 습도와 온도를 관리하여 크고 작은 석탑들을 보호하는 용도라고 했다.
꼭 마트료시카 인형을 보는 듯하다.
진규 스님이 촬영 전 주의 사항을 재차 전달했다.
“여기 석탑들은 중요한 문화재입니다. 사전에 이야기를 전달받으셨겠지만.”
유민준은 자연스럽게 주의 사항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플래시 사용은 금지이며, 석탑에 직접 손대지 않도록 해주세요.”
꼭 어디 견학 갔을 때 들을 법한 진규 스님의 말에 유민준은 설핏 웃음이 나왔다.
수학여행에라도 온 기분이었다.
진규 스님이 유리문을 열었다.
신나는 마음으로 들어간 유민준은 숨을 잠시 참았다.
석탑들이 있는 주실에 들어가자 미약하게 역한 냄새가 난 탓이었다.
‘뭐지. 어디선가 맡아본 적 있는 냄샌데.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나?’
촬영 중이었기에 유민준은 최대한 입꼬리에 힘을 유지했다.
한편 도진혁은 석탑들에 강한 영력과 탁한 기운이 뒤섞여 남아 있음을 눈치챘다.
‘한 마리가 아니었군.’
가까이에서 보니 석탑 벽면에는 봉인 진법이 새겨져 있었다.
‘지금은 비어 있고.’
방송용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 사진 촬영을 허락받은 도진혁은 조심스럽게 사진을 찍었다.
‘설마 탁귀들을 봉인했던 건가.’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장나비와 온가람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어딜 간 거야.’
사진은 온가람과 장나비에게 전송했다.
도진혁은 촬영이 끝나면 주지 스님과 따로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막간에도 유민준과 잠깐 이야기 나눌 시간은 부족했다.
제 주변에서 위험한 일이 최근 벌어진다고 말해줘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기회가 없었다.
개인 인터뷰를 한다며 스태프에게 손에 이끌려 유민준은 촬영을 감행했다.
개별 인터뷰가 끝난 유민준은 아까 점심때 밥차에서 제육볶음을 잔뜩 퍼다 먹어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저녁 식사가 사찰 음식이란 말을 들어서였다.
사찰 음식은 맛이 없다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아침과 점심을 발우공양합니다.”
진규 스님의 설명이 있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이곳의 사찰 음식은 어느 미쉐린 가이드에 실린 식당에서 레시피를 얻어왔다고 했다.
다른 출연진들은 대단하다며 칭찬이 일색이었다.
‘미쉐린 식당 같은 건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는데.’
유민준은 그런 생각을 하며 발우공양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들었다.
스님들의 발우공양을 상상하며, 그 청결함과 정성을 떠올리자 스님들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 싸울 때 봤던 그 변태 땡중이랑은 차원이 다르네.’
오늘은 특별한 반찬들이 많이 나올 거라는 진규 스님의 말에 유민준은 그나마 조금 기대감이 생겼다.
다음으로는 제작진이 긴급 공지를 했다.
“찰기장밥과 돌나물물김치는 기본으로 제공됩니다.”
유민준은 도진혁이 합류하기도 전부터 『레전드 헌터즈』의 골수팬이었다.
그렇기에 대충 예측이 갔다.
이 프로그램의 제작진들이 순순히 밥을 주는 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나머지 반찬은 미션을 통해 얻는 이 쪽지를 찾아오셔야 얻을 수 있습니다.”
예능이니만큼 반찬을 걸고 출연진들이 재롱떠는 걸 보겠다는 거다.
“반찬은 다음과 같습니다. 근대유부국, 두부 된장찜, 봄나물 장떡, 죽순 잡채, 두릅 숙회, 머위 겉절이, 배겨자무침, 비름나물, 미나리감자전, 곰취김치.”
찬거리 사진을 보니 나쁘지 않아 보였다.
“미션은 사찰 뒤쪽의 산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산이라고 했지만, 작은 언덕에 가까우니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가 이어졌다.
유민준은 아까 대기하면서 스태프들이 장비를 설치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났다.
아직 봄이라 이른 시각이지만 해가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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