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역할을 거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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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주의
작품등록일 :
2024.05.13 03:07
최근연재일 :
2024.07.10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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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0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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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금장사(金藏寺)에서 (2)

DUMMY

제작진은 고정 출연자와 친구를 짝지어 6팀으로 나뉘었다.

당연히 도진혁과 내가 한 팀이 되었다.

나는 무던하게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는 PD를 바라봤다.


‘담력 테스트라도 준비했나 보네.’


출발 순서는 원판 돌리기로 정했다.

첫 번째는 얼마 전 프리랜서 선언을 한 아나운서 출신 서혜주와 출판사 편집장인 김현지였다.

두 번째 차례가 도진혁과 나.

세 번째는 미녀 개그우먼 김서영과 뷰티인플루언서 이지연.

네 번째는 영화배우 류해신과 광고 기획자 최영.

다섯 번째는 가수 신해찬과 대학교수 정인수.

여섯 번째는 예능인 홍지호와 패션디자이너 김동훈이었다.


출연진들은 지도에 적힌 위치에 가서 주어진 미션을 하면 쪽지를 하나씩 얻을 수 있었다.

스태프가 당부의 말을 전했다.


“여기 렌턴 받아가세요. 길이 잘 나 있긴 한데 그래도 산길이니까, 혹시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무전 주시면 됩니다.”


우리 차례가 되어 도진혁과 나는 머리에 소형 카메라를 장착하고 출발했다.

셀프 카메라는 도진혁이 들었고, 전자 지도는 내가 맡았다.

오귀들이 더러 있긴 하지만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산이라 그런지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금세 해가 내려앉았다.

스태프의 말대로 길은 무척 잘 닦여 있었다.

울창한 나무들을 바라보자니 도진혁과 비석 잡기 할 때가 생각났다.


“예전에 그 숲에 비하면 여긴 양반이네.”

“그런가.”

“좀 춥긴 해도 길도 제대로 나 있고. 이 지도 보고 걷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긍정적이라 좋겠다.”

“나야 그게 장점이니까. 근데 너 뭐, 요즘 뭔 일 있어?”

“일은 무슨 일.”

“그렇게 팍팍 티 내고 다닐 거면서 감추긴.”

“······.”

“하여간 말하기 싫은 거면 하지 마라. 에효.”

“······.”


도진혁은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애매했다.

카메라도 돌고 있으니 막상 둘이 있어도 둘만 있는 게 아니니까.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특성상 여러 군데에 스태프들과 카메라가 있는 것도 도진혁은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유민준은 넉살 좋게 말을 걸어 온다.


“푸핫, 표정 심각한 거 뭔데? 야 이래서 방송 분량은 너 그동안 어떻게 뽑았냐?”

“어차피 나는 얼굴 담당이다.”

“와. 뻔뻔하게 본인 입으로 그런 말을 하다니. 내가 아는 도진혁 맞아?”

“그러는 넌 방송도 처음이면서 꽤 적응을 잘하더군.”

“칭찬이야, 욕이야?”


덕분에 쓸데없는 대화이긴 해도 오디오가 비지 않고 이어졌다.


“아, 우리 반찬 몇 개나 얻을 수 있으려나.”


조금 걸으니 나무 위에서 모형으로 만든 하얀 소복을 입은 가짜 귀신이 덜렁, 내려왔다.


유민준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담력 훈련이라도 준비해두셨나 봐.”


축 늘어진 다소 엉성한 처녀 귀신 인형을 유민준이 툭 건드렸다.


“아, 진혁이 너 분량 뽑아주려면 나라도 놀라는 척을 할 걸 그랬나?”


도진혁이 이 방송에서 맡은 캐릭터는 ‘잘생긴 겁 없는 막내’ 컨셉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도진혁을 놀라게 하는 게 PD의 숙원 같은 느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늘 도진혁은 방송용 미소를 얼굴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앞서간 팀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악!”


설핏 도진혁도 미소를 띤 채 대꾸했다.


“충분히 앞뒤 차례의 형, 누나들이 놀라고 계신 거 같다.”

“어? 여기 목에 복주머니 있다.”


처녀 귀신 인형이 목에 걸고 있는 복주머니에서 유민준은 반찬 이름이 적힌 쪽지를 꺼냈다.


“미나리 감자전이네. 지도에 적힌 곳들 말고도 이렇게 숨겨놨나 봐. 진혁아 쪽지는 내가 갖고 있을게?”

“그래. 잃어버리지 말고 안주머니에 잘 챙겨라.”

“오키.”


어느덧 4차 미션이 있는 공터에 다다랐다.

공터 주변으로는 대나무가 주변에 둥글게 자라 있어, 바람이 불 때마다 스산한 소리가 스쳤다.


“오 벌써 우리 여섯 개나 모았네.”

“미션은 5차까지니, 우승도 노려볼 수 있겠군.”

“야 근데 아까 10개 다 모은 팀한테는 한우 세트 준다 그랬지?”

“그렇다.”

“너 진짜 잘 따라와라. 한우는 우리 거다. 오키?”

“유민준, 5차 미션이나 얼른 하고 복귀하는 게 좋지 않겠나?”

“무슨 예능감 없는 소릴 하고 있어. 너도 우승 노려볼 수 있겠다며.”


도진혁은 어딘지 불안했다.


당연히 기감을 발휘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러니 이 숲에 탁귀가 없음을 알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몸을 낮추고 있는 스태프들의 기운도 멀쩡했다.


‘아까 석탑에서 보았던 탁귀들이 빠져나간 흔적 때문이려나.’


다른 의미로 도진혁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비석 틈에서 복주머니를 발견한 유민준이 어딘가 한 점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뭔가 움직이는데.”


3차와 4차 미션 사이에서 귀신으로 변장한 스태프를 보고 조금 전 유민준은 거하게 웃음을 터트렸었다.

그리고서 복주머니를 하나 얻었고.

그 탓인지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가 대단했다.


도진혁이 눈가를 좁히며 렌턴을 비췄다.


“아무것도 없는데. 잘못 본 거 아닌가?”


그러나 도진혁은 마음 한구석에서 자꾸만 무언가 걸렸다.

메마른 입술을 떼어 한 마디 더 보태려는데, 유민준이 말릴 틈도 없이 앞서 뛰어가기 시작했다.


“유민준?”

“뭐해 빨리 와!”

“도대체 뭐가 있다는 거냐.”

“저쪽에도 카메라 있는 거 봐서는 복주머니가 있을 거 같단 말이야.”

“지도에 표시된 곳은 맞나?”


유민준은 조금 전 제가 보았던 움직이는 물체가 스태프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자신 있게 말했다.


“아까 처녀 귀신 인형 잊었어?”


갈림길에서 제게 손짓하는 유민준을 향해 도진혁은 눈가를 좁혔다.

집중했지만, 왼쪽 길에서는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조용해서 기이했다.


“느낌이 별로 좋지 않은데.”

“오늘 너 캐붕 한 번 가냐? 쫄?”

“쫄기는 누가.”


긁혔는지 도진혁이 미간을 구겼다.

나는 『레전드 헌터즈』의 골수팬이라 PD라면 미션에 적힌 것 외의 함정이나 장치를 많이 설치해뒀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예상이 맞았던 게 바로 처녀 귀신 인형이었다.

복주머니가 찾아와 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나?

먼저 찾아가면 되지.


얼마 가지 않아 새까만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듯한 사람의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야, 거봐. 내 말 맞지?”


검은 형상은 팔 다리의 관절을 꺾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와······이번엔 분장도 분장인데, 무빙이 엄청 리얼하시다. 댄서이신가 봐, 진혁아 저분 팝핑 장난 아니다.”

“?”


순간 스태프 쪽을 향해 가려던 나를 도진혁이 제지했다.


“잠깐. 뭔가 이상한데.”

“아, 왜. 너 나한테 이거 뭐 몰카 그런 거 하려는 거지?”

“유민준. 그게 아니라,”


재밌다는 듯 유민준이 도진혁의 말을 자르며 웃었다.


“아니긴. 이 전개 몇 화 전에 봤던······.”


그러나 유민준은 말을 채 끝마치지 못했다.

목이 두두두둑, 관절이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마주한 검은색 얼굴에는 붉은 눈알이 잔뜩 박혀 있었다.

나는 조금 감탄했다.


“오······PD님이 이번엔 이를 좀 갈고 준비하셨나 봐. 편집 컷이라도 건지게 놀라는 척 해야 하는 거 아냐, 우리?”


발치까지 길게 늘어뜨린 긴 가발도 그렇고.

저 정도 퀄리티의 특수 분장이라니, 다른 출연진이었으면 엄청난 비명을 뽑아내줬을 거였다.

하지만 얼굴이 무척 익숙했다.

점심 식사 때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이었다.

조연출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저, 선생님. 저희 별로 안 놀라서 실망하셨죠.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복주머니 어딨는지 알려주세요.”


유민준은 생글생글 웃으며 검은 인영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두어 발짝 정도 떨어져 있던 도진혁이 유민준을 만류했다.


“가지 마라니ㄲ······.”


불현듯 도진혁이 들고 있던 랜턴의 불이 꺼졌다.


“도진혁아 넌 연기는 좀 더 공부해야겠다.”

“연기가 아니다. 생기가 없어. 방송국 쪽 사람이 아니다.”

“에이. 아까 나랑 점심 때 뵌 분인데? 내가 그 정도 눈썰미는 있다니까.”


길고 새카만 머리카락이 촤악,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스쳐 지나간 머리카락에 유민준의 뺨이 긁혀 피가 흘렀다.


“어······?”

“떨어져!”


유민준은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손쓸 새도 없이 유민준의 팔에 머리카락이 감겼다.

훅 하고 검은 인영의 얼굴이 유민준의 코

앞에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유민준이 스태프의 얼굴을 팍, 밀쳤다.


“으악!”


그러자 스태프의 몸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빠져나오며 기괴한 모습의 탁귀가 드러났다.


‘탁귀가 인간에게 빙의를?’


인상을 구긴 도진혁은 재빠르게 바닥에 널부러진 스태프를 먼저 챙겼다.

바닥에 널부러진 스태프는 아까 유민준이 점심을 같이 먹었던 조연출이 맞았다.

심지어 분장을 한 상태도 아니었다.


유민준이 조연출을 바라봤다.

지난번 주차장에서 보았던 오수진이 살던 마을 사람의 사체가 오버랩 되었다.


“서, 설마 죽은 거야, 조연출 아저씨?”


도진혁은 황급히 조연출의 맥을 짚었다.


“기절한 거다.”

“휴. 아니 아까 관절이 꺾이는 소리가 나서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고 놀랐잖아.”

“유민준, 너는 괜찮나?”

“난 괜찮긴 한데, 야 저거······.”


검은 연기였던 탁귀는 비틀거리며 본래의 형태를 갖췄다.

탁귀는 눈알이 여기저기 달린 긴 목을 가진 기괴한 새의 모습이었다.

목이 기린처럼 길고, 그 길다란 목 끝에 여러 개의 눈이 붙어 있었다.

그 눈들은 각각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칠판을 긁는 듯한 불쾌한 목소리로 탁귀가 말했다.


[인······간 따위가······.]


탁귀가 길쭉한 부리를 쩍 벌리며 유민준을 향해 돌진했다.


[감히, 나를······밀어냈다니!!!!]


나는 소리를 지르며 손을 뻗었다.

쩍 벌린 가늘고 긴 부리 안에 자리한 시뻘건 눈알들과 치아는 끔찍한 생김새였다.


“으으으아아!! 징그러워!!! 꺼져!”


양손으로 탁귀의 부리 위아래를 잡는 순간이었다.


[크아아아악!]


탁귀가 괴성을 지르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라?”


나는 얼떨떨해하며 내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생채기가 남긴 했지만 멀쩡했다.

고개를 든 나는 도진혁을 바라보았다.

놀란 표정이기는 도진혁이기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재밌네. 유민준이라는 인간도.’


포식자가 사냥감을 노리듯, 도진혁과 유민준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쯧. 그나저나 저 탁귀 녀석은 전혀 도움이 안 됐군.’


검은 그림자 속에서 숨어서 그들을 주시하며 차가운 공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도진혁이 아끼는 인간인가, 유민준은?’


도진혁과 유민준은 날카롭고 음흉한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자신들의 상황에 집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뭐. 사냥에는 미끼가 필요한 법이니까.’


그러나 매서운 눈빛은 그들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그들을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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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4화 지옥 난이도의 조별 과제(2) +1 24.06.21 23 5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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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2화 지옥 난이도의 조별 과제 (1) 24.06.17 29 5 12쪽
21 21화 과제 그 절망의 경계에서 24.06.16 36 10 13쪽
20 20화 설마, 아니겠지? 24.06.16 36 10 12쪽
19 19화 남의 연애사에는 끼는 게 아닌데(3) 24.06.16 36 1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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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7화 남의 연애사엔 끼는 게 아닌데(1) 24.06.13 42 1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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