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주현

한준형은 염동진인과의 만남 후에 밖으로 나왔다.
그에게서 받은 옥령사황편을 잠깐 꺼내 보았다.
‘훌륭하군.’
적어도 하급 던전에서 구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따로 제련까지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진각까지 오른 헌터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었지만, 그는 염동진인의 호감을 사는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염동진인은 자신의 손녀인 설주현을 이겨보라고 했다.
게다가 넌지시 또 다른 선물을 언급했다.
이런 귀해 보이는 아이템도 어디다 두었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염동진인이 가지고 있는 보물은 상당해 보였다.
어차피 정리해야 하나 버리긴 아까운 물건을 주고 다니는 거라면 언 듯 이해가 가기도 했다.
대신 그녀를 이겨야 했지만.
한준형의 원래 계획은 한 차례 변동이 있은 후였다.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현묵회와 풍화령은 이미 내정자가 있다는 것으로 보이는데 굳이였다.
선발대 자격만 얻고 나와도 충분할 거였다.
그런데 이러면 얘기가 달라진다.
내정자라고 생각했던 게 아마 염동진인이 봐주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염동진인이 호기롭게 손녀를 이겨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준형은 완전히 아래로 내려왔다.
강현우와 막기가 바로 물었다.
“내가 궁금하다 하더라고.”
이 한 마디면 충분했다.
염동진인과 관련되어 있는데 더 물어보는 것도 실례였고.
본인이 말하지 않겠다 하면 그런 약조를 받아온 게 뻔한 게 아니겠는가.
물론, 그런 말도 넌지시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설주현이 노인의 손녀라는 건 알았지만, 동시에 이 사실을 비밀로 그녀가 이 선발전과 앞으로 있을 던전행에 참여하고 있음을 얼핏 알 수 있었다.
“한준형 헌터. 그나저나 어디 소속에 계시오?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한국에서 봉법을 가르치는 곳은 흔치 않아 보이는데.”
막기가 입을 열었다.
그는 한준형이 익힌 타구법도 신기한 모양이고, 한준형의 실력은 더 신기한 모양이다.
“딱히 소속은 없습니다. 홀로 수행했죠.”
“...호오.”
물론, 강현우의 대련에 도움을 받긴 했지만 한준형이 홀로 익힌 건 일언반구 없이 사실이었다.
그때, 전광판에서 한준형의 조가 다른 조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대전표도 변화가 왔다.
“음?”
‘됐군.’
한준형의 차례가 바로 곧으로 다가왔다. 원래라면 다시 빙글빙글 돌아 마지막이어야 하겠지만
바뀐 탓에 바로 시작이었다.
게다가 숫자 부족으로 한준형은 바로 조의 준결승전에 올라가게 되었다.
다른 이들이 한두 번 더 해야 할 걸 생각하면 이미 선발이 됐다고 봐야 했다.
이 이상은 스스로 안 하겠다는 의사만으로 충분했고 끝까지 손속을 겨뤄도 되었다.
ㆍㆍㆍ
한준형은 설주현을 바라봤다.
저 여자가 현재 비공식적으로 참가하고 있는 염동진인의 손녀.
그리고 염동진인의 제안이 걸린 참가자였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복장을 하고 있는 게 염동진인의 옷차림과 그다지 비슷해 보이진 않았지만..
‘저 여자도 염력을 사용한단 거겠지?’
최기규의 특질은 염력. 염력과 그것을 보조하는 무공과 아이템으로 진각을 이뤄냈다.
그의 핏줄이라고 하면 능력이야 비슷할 것인데.
“봉술이라 재밌네요. 하지만 풍화령은 제가 노리고 있는 것이라 양보는 없어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거 재미있네요. 저도 노리고 있거든요.”
한준형의 반문에 그녀의 눈썹이 올라갔다.
한준형은 전광판을 흘깃 바라봤다. 고작 1승을 챙겼던 한준형과 다르게 그녀는 벌써 3연승을 한 후였고 전부 상대를 압도적으로 끝냈다.
그중 두 경기는 한준형도 지켜본 바였다.
‘가까이서 보니 더 압박인데.’
단순히 그녀가 강해서?
아니 설주현은 앞서 봤던 염동진인엔 비할 바도 안되고 당연히 장현도와도 수준은 낮아 보였다.
다만 그녀가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이 보통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일단 전체적으로 밝은 검묵빛을 띄는 가죽 가죽옷은 타격점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얇게 뼈 같은 것으로 보호받는 부분은 뇌전봉으론 턱도 없어 보였다.
그녀가 차고 있는 비수들과 허리춤에 비스듬히 꽂혀있는 얇고 가벼운 검.
역시 가볍지 않은 기운이 흘렀다.
‘이래서.’
이길 것을 주문했지만 이기고 나면 더 큰 선물을 주겠다던 염동진인.
이쯤 되면 왜 주겠다고 했는지 알법도 했다.
“그게 전부인가요?”
“뭘 말이요.”
“사용하실 장비는.”
“....”
‘빚만 아니었어도 한 두갠 더 집어오는 건데.’
이민우 감정관이 권하던 게 어디 물건이 한 두 개던가.
그러더니 그녀가 입고 있던 가장 웃옷 하나를 벗어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래봐야 여전히 검묵 빛의 가죽 옷이긴 한데.
저게 분리가 되는 거였네.
“이 정도면 다른 소린 안 나오겠죠.”
어쨌든 그렇게 시작 소리가 울렸다.
한준형은 그녀의 공격을 떠올렸다.
이미 큰 시간 폭으로 학습을 해둔 터라 당연히 강자로 보였던 설주현의 공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설주현은 허리춤에 있는 얇은 검으로 공격해올 것인데, 보통 그건 선제공격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따로 차고 있는 비수 역시 주의사항.
그리고 그녀가 스르륵 사라졌다.
스르륵.
...?
은신도 가능했나?
한준형은 그녀가 시야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황당했다.
그가 봐왔던 판에는 저런 능력을 쓰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대응은 신속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미 한준형은 옥령사황편을 차고 왔기 때문이었다.
목에 걸린 작은 구렁이 비늘이 어둠에 숨은 자를 감지하고 색이 탁해지며 신호를 주고 있었다.
‘아, 이래서 염동진인이 이걸 나에게 줬군.’
옥령사황편이 신기하게도 기민한 신호를 분명히 그에게 주고 있었다.
이런 아이템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던 한준형은 곧바로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 알아차렸다.
정확히는 아니지만, 방향을 알려준다는 것과 그리고 그곳에 옥령사황편을 향하게 한다면.
오른쪽 측면으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일순 드러났다.
“디택션 아이템? 그런 고가의 아이템을 가지고 계셨군요? 하지만 늦었어!”
그녀의 허리춤에서 얇은 검이 쏜살같이 튀어나와 한준형을 갈랐다.
그녀가 생각했을 때 현음검법이 완벽하게 들어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쉬운 승리.
그런데 한준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한준형이 들고 있던 봉이 그녀의 사각지대를 향해 날아왔다.
“...?!”
한준형의 뇌전봉에 선제 타격을 맞은 건 되려 설주현이었다.
“뭐지요? 무슨 아이템이지?”
“저도 은신을 쓸 줄 몰랐는데요. 윗 옷을 벗은 건 실수로 보입니다만.”
한준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한준형이 다시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한준형의 움직임은 그녀가 생각하기에 지나치게 빨랐다.
그녀는 은신하려고 했으나 그녀의 은신 위치를 한준형은 완벽히 알고 있었다.
그녀가 기겁을 했다.
시간 정지를 모르는 그녀로서는 한준형이 고가의 아이템을 숨기고 있다고밖에는 판단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한준형의 봉은 기가막힌 방향으로만 날아왔다.
설주현은 어느덧 한준형의 봉을 막아내는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뇌전의 기운이 봉에 붙기 시작했다. 푸른 뇌전봉의 추가효과.
같은 타겟을 연속적으로 완벽히 공격해내면 5번의 일격마다 뇌 속성이 붙는다.
원점 조건은 가격을 당했을 것.
애초에 계륵 같은 속성이다.
고수가 하수를 팰 때나 가속화되는 것이고 생사를 걸만한 헌터들끼리의 싸움에서는 연속공격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서로 공격을 주고받아야 하니까.
두 번째 타격이 들어갔을 때 그녀는 매혼유령보로 탈출했다.
매혼유령보는 은신 아이템과 결합이 되면 예측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한순간 절박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보법.
일단 거리를 벌리려는 게 그녀의 계획.
그런데 은신과 동시에 멀어지는 그녀를 한준형이 정확히 쫓아오고 있었다.
“맙소사..! 이런 괴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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