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메스껍고 어지럽다.

어떻게 알았는지 보고서 작성이 마무리되자 팀장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김과장은 매크로처럼 미리 출력해 놓은 서류들을 팀장에게 건넸다. 팀장은 서류들을 받아 들고 대충 들춰보는 척하더니 근처 식당으로 오라며 사무실 밖으로 다시 나갔다. 대충 화가 풀린 모양이다. 애당초 보고서와 회식은 팀장의 화풀이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유나에게선 아직도 연락이 없다. 연락이 온들 갈수도 없다. 괜히 팀장의 화만 돋울 뿐이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 긴 시간 끝에 팀장의 훈계와 회사 뒷담화가 끝났다. 팀장은 2차를 권하는 몰지각한 상사가 아니라며 선심 쓰듯 자리를 먼저 떴다. 이제서야 하루 동안 옭아매져 있던 족쇄가 풀렸다. 오늘따라 술이 부족한지 김과장의 2차 소리가 반갑게 들린다.
이제라도 연락을 해볼까?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너도 이런 팀장 만나보라며, 너도 우리 팀장하고 다를 바 없다며, 사람 괴롭히는 게 취미냐고 유나에게 전화해서 한 소리 하고 싶다. 술이 많이 취했나 보다.
유나도 답답했겠지······
퇴근할 수 없는 퇴근 시간. 책상위에 있는 휴대폰이 떨리기 시작했다. 유나였다. 야근 타령을 끝낸 팀장이 사무실 밖으로 나가자 마자 연락을 한 것으로 봐서는 팀장과 마주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휴대폰을 들고 아무도 없는 회의실로 들어왔다.
“오빠, 언제 나올 거야?”
“팀장이 보고서 쓰고 가래서······ 미안해.”
“오빠 팀장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퇴근시간에······ 못돼 처먹었어!”
“그러니까 말이야.”
“그럼 언제 나올 수 있는데?”
한숨부터 나온다.
“모르겠어. 보고서 다 쓰고 남으래······ 술 마시자고 할 것 같아.”
“결혼 준비 때문에 빨리 나가봐야 된다고 해야지!”
유나의 목소리 톤이 점점 올라가기 시작한다.
“말했지······ 미루라면서 화부터 내더라.”
“정말 오늘은 안된단 말이야. 오빠도 알잖아, 웨딩플래너하고 미팅을 몇 번 미뤘는지. 미팅을 해야 다음 준비를 할 거 아니야?”
“이번주 주말에 만나면 안될까?”
“오빠 때문에 지난주 주말에 잡은 약속도 미룬 거 기억 안나?”
하필 전주 주말에 중국 상해 법인장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귀국을 했다. 팀원 중 누군가는 공항에 픽업을 나가야 했다. 팀원들은 폭탄 돌리기 게임이라도 하듯 저마다의 사정으로 폭탄을 다른 팀원에게 돌리기 시작했고 폭탄은 돌고 돌아 결국 팀의 막내인 내게로 와버렸다. 그렇게 게임의 루저가 된 죄로 유나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공항 픽업을 가야만 했다. 내 주말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유나와의 약속도 지킬 수 없었다. 어떻게 내가 그날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주말로 미뤄서라도 웨딩플래너 아니 유나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참아야 한다고 수차례 곱씹어야만 했다.
“미안해······ 나도 가고 싶긴 한데······ 안될 것 같아. 혼자라도 만나면 안될까?”
유나가 화낼 줄 알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뭐라고? 결혼은 나 혼자 하는 거야? 오빤 결혼준비에 관심이 있기는 한 거야?”
더 뭐라고 할말이 없었다. 그리곤 연락 두절이었다. 보고서를 다 쓰고 나서도, 팀장과 1차가 끝나고 나서도, 김과장과 2차까지 왔는데도 유나에게선 연락이 없다. 먼저 연락을 해볼까? 술 먹고 전화하는 거 싫어하는데······ 망설여진다.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술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 몸이 휘청거린다. 아무일 없이 집까지 잘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유나는 집에 잘 들어갔을까? 웨딩플래너하고 미팅은 어떻게 됐을까? 만나기는 한 걸까? 유나가 화내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나도 어쩔 수 없는데 왜 나한테 난리야!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결혼준비부터 이렇게 삐걱거려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혹시 나와 결혼이라는 건 애당초 맞지 않은 건 아닐까? 집에 들어가기가 싫다. 가봐야 혼자 망상에 빠져 있을 게 불을 보듯 뻔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하철 역사 안이었는데 집에 돌아와 샤워까지 끝마치고 침대에 앉아 휴대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집에 오는 길에 유나에게 미안하다고 톡을 보낸 모양이다. 블랙아웃이 될 정도로 마시지는 않은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시간이 늦어선지는 모르겠지만 유나는 답장은 고사하고 읽지도 않았다. 모르겠다. 피곤하다. 내일도 출근은 해야 된다. 내일 일은 내일의 나한테 맡기고 잠이나 자야겠다.
은은한 달빛과 잔잔한 파도 소리, 거기에 바다 내음까지. 저녁 풍경과 어우러진 바다의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오길 정말 잘한 것 같다.
며칠째 메일함에서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집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싫었다. 4년이라는 시간동안 내 주변은 희진이라는 물감으로 온통 도배 되어있었다. 희진이와 헤어지고나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희진이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버린 휴대폰을 상대하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때 친구에게서 전화 한통을 받았다.
“괜찮냐?”
“어, 그냥 저냥······”
괜찮지도 괜찮아지고 있지도 않았다. 여전히 가슴이 공허하고 무기력하다.
“집에만 처박혀 있지 말고 엠티에나 와라?”
“엠티?”
“어, 오늘 동아리 엠티잖아!”
희진이와 동아리 씨씨였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생각도 없이 동아리 엠티에 오라니······ 벌써부터 동아리 사람들의 동정 어린 표정이며, 질문들이 부담스럽다.
“갔다 와. 나는 그냥 좀 쉴래.”
“그러지 말고 와! 사람들하고 계속 부딪히고 어울려야 괜찮아지는 거야! 계속 방구석에 처박혀 있어봐야 희진이 생각만 더 나지?”
맞는 말인 것 같긴 하다. 그래도 내 앞에서 희진이 이름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내뱉다니, 얄밉다.
“싫어, 그냥 집에 있을래.”
“안 오면 형들하고 너희 집으로 찾아간다!”
동아리 엠티를 우리 집으로 올만큼 무모한 녀석이다.
“생각 좀 해볼게.”
“생각은 무슨 생각? 안 오려고 말 돌리기는. 형들 옆에 있어! 네 자취방으로 진짜 간다!”
휴대폰 너머로 동아리 선배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알았어 갈게. 어디로 가면 되는데?”
“그래 잘 생각 했어.”
친구의 겁박 같은 제안이 싫지만은 않았다. 생각해봐야 부질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탈출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덫에 걸린 것 마냥 혼자만의 힘으론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손을 내밀어 주길 바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버스로 두시간을 꼬박 가야하는 거리를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버스에서 도착했다는 안내 멘트가 나오길 간절히 바라며 왔나 보다. 날은 벌써 어두워져 다들 얼큰하게 취해 있을 시간이다. 친구가 말해준 숙소보다 본능적으로 바다로 향했다.
거추장스러운 이어폰을 뺐다. 한동안 위로가 되어주었던 슬픈 이별 노래들도 바다 앞에선 그저 소음에 불과했다. 차분하고 일정하게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어떤 이별 노래보다 더 위안이 되어주는 것만 같다. 가끔씩 희진이의 얼굴이 바다에 그려지지만 괜찮다. 차분하게 일렁이는 파도가 지워줄 테니까. 바보같이 방안에 누워 시간만 축내고 있었다니··· 지금에서야 이곳에 찾아왔다는 것이 후회가 된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커플링이 신발에 들어간 모래알보다 더 까끌거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 내 몸에 옭아매져 있던 족쇄 하나가 더 사라졌다. 한동안 왼쪽 약지에 자리하고 있던 반지가 사라지자 깊게 패인 자국이 보인다. 약지에 남겨진 자국 같이 희진이의 흔적들이 아직 내 몸 이곳저곳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왼손에 자리잡은 반지 자국들과 같이 전부 사라지겠지······
친구에게서 언제 오냐는 재촉전화가 왔다. 자리를 털고 바다를 뒤로 한 채 숙소로 향했다. 민박집에는 얼큰하게 취한 동아리 사람들이 새빨개진 얼굴로 떠들기 바빴다. 내가 온 걸 반겨주는 동아리 사람들. 예상되었던 위로의 말들. 이것들 역시 아직 내게 남아 있는 흔적 같은 것들이겠지······. 잔잔하게 일렁이는 파도가 희진이의 모습을 지워주듯 시간이 남아있는 흔적들을 하나씩 지워줄 것이다. 엠티가 끝나고 나면 모조리 지워지길 바라며 소주잔을 들었다.
매스껍고 어지럽다. 숙취가 몰려오는 것이 일어날 시간인가 보다. 눈을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람이 뒷북을 친다. 요즘은 알람이 필요 없을 만큼 꿈이 아침 기상에 크게 일조한다. 꿈에서는 아직도 희진이와 이별하는 중이다. 반복해서 희진이가 꿈에 나타나는 것이 꺼림직하다. 무슨 의미인 걸까? 10년이나 훌쩍 지났는데 아직도 희진이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 것일까?
방바닥에 소주병 하나가 굴러다닌다. 집에 와서 혼자 소주를 또 마셨나 보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술기운에 잠을 또 청했겠지. 휴대폰을 보니 유나에게선 아직도 연락이 없다. 술김에 톡을 보내는 게 아니었다. 맨 정신에 전화를 먼저 했어야 했는데······ 유나는 괜찮은 걸까?
꿈은 이별 중이고 현실은 결혼 준비 중이다.
메스껍고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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