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파혼

“일부러 피하는 건지 며칠째 전화도 안 받아.”
“회사에선 볼 거 아니야?”
“나랑 눈도 안 맞춰. 투명인간 취급한다니까. 보나마나 싸울 게 뻔한데 보는 사람도 많은 회사에서 따로 부를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퇴근하고 나서는?”
“그놈의 팀장 새끼가 퇴근을 시켜줘야 쫓아라도 가지!”
며칠째 유나와 고요한 냉전상태가 유지되었다. 차라리 화라도 내면 좋겠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돼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알지만,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사람에게 무슨 말이 통할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다행히 오늘은 팀장의 컨디션이 나쁘지가 않았다. 며칠째 푸닥거리를 했으니 완급조절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오랜만에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칼같이 회사를 빠져나왔다. 오늘은 길거리에서 싸우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유나를 불러 세워야만 할 것 같았다. 혼자 방구석에서 술 나발을 부는 것도 한계에 치달은 것 같다. 부랴부랴 유나를 쫓아 회사 건물을 빠져나갔지만 유나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가 않는다. 아직 멀리 가지는 않았을 텐데······ 전화도 받질 않는다. 어디로 간 걸까? 나랑 숨바꼭질이라도 하자는 건지······ 어렵다. 아직은 마주보고 이야기할 만큼 기분이 풀리진 않은 모양이다.
답답한 마음에 회사 근처에 있는 친구를 불러냈다. 고민 상담이나 위로 같은 걸 받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이 시간에 자취방에 혼자 처박혀 있고 싶지가 않았다. 하소연을 들어줄 만한 사람이 간절하기도 했다.
“상황이 좀 심각하네······”
술잔에 자연스럽게 손이 간다.
“지현이 알지?”
“지현이? 그럼, 알지. 근데 지현이는 왜?”
“파혼했다더라고.”
“파혼?”
“얼마전에 파혼했다고 하더라고.”
친구 입에서 나온 파혼이라는 말이 심장에 내리 꽂힌다.
“이혼도 별 흠이 안되는 세상인데 파혼이 뭐가 대수야? 너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안 맞으면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봐.”
자기 딴에는 위로라고 건넨 말이겠지?
파혼······ 어쩌면 내가 아니라 지금 유나가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유나가 파혼하자고 하면 순순히 받아드릴 수는 있을까? 쉬운 이별이란 없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런데 파혼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파혼이 그리 쉽냐?”
“어려울 건 또 뭐냐? 떠밀리듯 결혼해서 정신차리고 이혼하는 것 보다 낫지!”
친구의 말이 일리가 있긴 하지만······ 술잔에 또 자연스럽게 손이 간다.
“그런데 지현이는 갑자기 왜 파혼을 한 거야? 얼마전에 청첩장 받은 거 같은데.”
말하기가 꺼려지는지 친구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왜 말을 하다 말어? 혼수, 예단 그런 문제야?”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뭔데?”
“그게 참······ 지현이만 불쌍하게 됐지··· 다른 사람한테 진짜 말하면 안된다.”
그런 말을 서두로 까는 비밀치고 지켜지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건 사는 동안 수도 없이 겪어왔던 터지만 알았다고 친구를 안심시켰다.
“뜸 좀 그만 들이고 말해봐!”
“흠······ 남자가 바람을 피웠나 봐.”
“결혼을 앞두고 바람을?”
“그러게 말이다.”
남자는 불현듯 지현에게 혼자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결혼 준비로 사소한 말 다툼 같은 건 있었지만, 그것도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더구나 남자가 현실을 도피하고 싶을 만큼 대단히 어긋나는 일이라는 건 애초부터 발생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지현의 기억속에서는 그랬다. 그렇게 지현은 결혼 준비가 순항하는 것으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남자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의 말이 지현이 믿고 있던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렸다.
“제주도는 왜?”
“결혼 준비도 이제 거의 다 된 것 같고 해서 결혼하기 전에 혼자 여행 좀 갔다 오고 싶어. 그래도 네가 반대하면 안 갈게.”
반대하면 안 가겠다는 말에 지현은 조금은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반대하는 건 아닌데··· 갑작스러워서 좀 놀랐어.”
“놀랐다면 미안. 별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가지 말까?”
남자의 눈빛은 간절하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했다.
“······알았어, 그렇게 해. 근데 제주도에는 얼마나 있으려고?”
“음······ 한달정도면 될 것 같아.”
“한달?”
“너무 긴가?”
꺼림직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결혼을 약속한 사람에게 속 좁은 여자로 비춰지는 게 더 싫었던 지현은 남자의 여행을 허락하기로 했다.
남자가 떠난 뒤, 한동안은 남자가 떠난 이유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으며 이유를 찾았다. 그럼에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는 남자에 대한 믿음은 변함이 없었다.
남자가 떠난 지 보름 정도가 지나갔다. 그쯤부터였을 것이다. 지현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던 것이. 남자의 SNS 사진 속에서 혼자가 아닌 둘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테이블에 놓인 두 잔의 커피. 수상할 정도로 정성스럽게 찍혀 있는 남자의 독사진들. 드문드문 보이는 여자의 실루엣들.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아닐까? 수십번도 넘게 스스로를 다그쳐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불길한 예감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남자에 대한 의심을 빨리 풀어버리고 싶었다.
얼마 안 있으면 새해가 밝는다. 지현은 그때가 자기가 품고 있는 의심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년 어김없이 둘만의 의식처럼 새해를 맞이하러 여행을 떠났다는 것을 남자 역시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뭐했어?”
“오늘은 백록담에 올라갔다 왔어. 눈 쌓인 한라산이 너무 아름답더라.
“그래, 너무 예뻤겠다.”
“혼자만 좋은 구경해서 미안하네. 다음엔 둘이 같이 오자.”
“······그래서 말인데 오빠.”
“어? 어.”
“오빠, 이제 곧 새해잖아.”
“벌써 그렇게 됐네. 시간 참 빠르다.”
“올해는··· 내가 제주도로 갈까?”
“제주도로?”
“왜? 싫어?”
“싫긴!”
“매년 새해 해돋이는 같이 봤잖아. 오빠도 제주도에 있고 하니깐 내가 거기로 가는 게 어떨까 했지.”
“근데 지현아! ...올해는 따로 보내는 게 어떨까?”
“따로? ······그건 좀 그런데...”
“이제 제주도 생활도 얼마 안 남아서······ 내가 서울 가면 그때 함께 여행가자!”
“······”
“내가 너무 이기적이지?”
“매년 같이 보냈는데 이번엔 따로 보내자니까 좀 서운하려고 해.”
“너한테 이해를 강요해서 미안해··· 그런데 이번 여행이 나한테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거라 이번만은 이해해줬으면 해. 결혼하면 내가 10배 아니 100배로 더 잘 할게.”
“······”
“이번만이야······ 지현아.”
“흠······ 오빠 생각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해해달라는 남자의 애처로운 목소리에도 지현의 불안함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한번도 거르지 않았던 둘만의 의식이 묵살당하자 지현의 불안함은 더 커져만 갔다. 가만히 서울에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정신과 몸을 지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두 눈으로 제주도에 있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진 지현은 서둘러 가장 빠른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으로 가는 택시안에서도 공항, 비행기안 어느곳에서도 지현의 불안한 상상과 불행한 결말은 끊임없이 지현의 머리속으로 재생되어졌다.
제주도 공항에 도착한 지현은 제일 먼저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생각해보니 남자의 제주도 생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가 머무르는 곳까지도. 남자를 방해하고 싶지도 의심하고 싶지도 않다는 배려가 오히려 어리석은 짓이 되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미어졌다.
“오빠, 어디야?”
“어? 당연히 제주도지?”
“나 지금 제주도 왔어.”
“어?”
전화기 너머로 당황해하는 남자의 모습이 지현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불과 몇시간 전까지 만해도 서울에 있던 연인이 제주도에 와있다니 놀라지 않은 것도 이상하겠지······ 그렇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남자의 목소리는 불필요 할 정도로 더 떨리고 있었다. 그 미세한 떨림 속에서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지현은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많이 놀랐어?”
“어? 어, 조금 놀랐어.”
“미안해······ 근데 지금 오빠를 만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어.”
“······”
남자도 지현의 마음이 동요하고 있었다는 걸 느끼고 있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와버렸어. 화난 건 아니지?”
“그, 그랬구나. 그럼 지금 제주 공항인 거야?”
“어, 지금 막 도착했어. 택시를 타려고 하는데 오빠가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있더라.”
“······”
“오빠?”
“어? 아, 아니야!”
“오빠 나 지금 택시 탈 건데 어디로 가면 돼?”
“아니야, 아니야! 지금 내가 데리러 갈게.”
“힘들게 뭘 와? 그냥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면 되는데.”
“아니야, 내가 금방 갈게 조금만 기다려.”
전화를 끊고 잠시 공허한 시간이 생겼다. 그제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제주도······ 몇 번을 와봤던 제주도였지만 유난히도 낯설게만 느껴진다. 생각해보니 겨울 제주도는 처음이다. 제주 공항을 나오면 항상 제일 먼저 반겨주었던 건 뜨거운 태양과 이국적인 푸른 야자수였다. 그래서였는지 제주도는 늘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차고 거친 바람, 눈 쌓인 야자수를 제주도가 품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
때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게 당연하지 않았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느껴지는 상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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