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하얀 지우개처럼

겨울이 오면 초록빛 하나 없는 앙상한 도시엔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다, 하얀 도화지처럼···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운 것에 다시 익숙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익숙함이 편하고 그립다. 그래서 가을이 좋다. 익숙함과 농익음이 충만한 계절. 그리움이 쌓이는 계절···. 가을을 지우는 겨울이 싫다.
제주도의 겨울이 서울보다 더 차갑게 느껴진다. 바다의 한기를 가득 머금은 매서운 겨울바람이 볼과 코를 더 붉게 물들인다. 두손으로 붉게 물든 얼굴을 감싸 보지만 손도 이미 온기를 잃어 별소용이 없다. 이렇게 추운 줄 알았으면 코트차림으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목도리랑 장갑도 챙겼어야 했는데. 하긴 그걸 챙길 만한 정신이 아니었지······
한시간여가 지나자 남자가 공항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지현을 반기고는 있지만 왠지 그 모습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차에 올라탄 지현은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남자도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있는지 운전에만 집중하는 눈치다. 히터 때문인지 차창에 서리가 금세 자리잡았다. 어색한 분위기 때문인지 하얗게 낀 서리가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지현은 손으로 서리를 닦아 내고 차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햇살에 반짝이는 푸른 바다, 하얀색 눈 모자를 쓴 검은색 돌무리들, 눈 쌓인 백사장. 이곳에선 어떤 익숙한 것들이 지워지고 있을까?
히터를 충분히 틀어 놓은 것 같은데도 다리가 시려 오는 것만 같다. 지현의 눈에 자동차 콘솔 위에 올려져 있는 담요가 보였다. 남자는 습관처럼 자동차 콘솔에 담요를 올려 놓는다.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의 차를 탈때마다 콘솔 위에는 담요가 늘 놓여 있었다. 남자는 지현이 옆자리에 탈때마다 콘솔 위에 놓인 담요를 무릎위에 덮어주곤 했다. 그게 너무 좋았다. 부드러운 촉감과 적당히 따스한 온도. 그래서 남자의 차는 더 포근하게 느껴졌다. 무엇이 남자를 변하게 했을까? 남자는 잊은 건지 변한 건지 지현에게 더 이상 담요를 건네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오빠 나 담요 좀 덮으면 안돼?”
“어? 어, 어 미안.”
남자는 깜빡했다는 듯 담요를 서둘러 건넸다.
남자는 서울에서 타던 차를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 제주도까지 가지고 왔다. 한 달 간의 렌트비가 부담스러워서 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 조심성 많은 남자가 익숙하지 않은 차를 운전하길 꺼려 해서가 더 큰 이유일 것이다. 그것도 한달 동안이나 렌터카를 운전할 생각을 하니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지현에게도 이젠 남자만큼이나 익숙한 차가 되었다. 사소한 변화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친숙하다. 그래서 지금 느껴지는 이질감이 더 크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이질감의 정체는 남자가 건넨 담요를 받아 들은 후 더 뚜렷해져 갔다.
“오빠, 서울로 언제 올 거야?”
“······”
“······이제 돌아와.”
“그래서 말인데······ 나 여기 좀더 있으면 안될까?”
“이제 결혼식도 얼마 안 남았잖아?”
“그렇지······”
“뭐야? 남일인 것처럼.”
“계속 생각해봤는데······ 결혼··· 미루면 안될까? 아니······. 멈추고 싶어.”
지현은 몸살이라도 걸린 것 마냥 온몸이 떨리고 열이 올랐다. 시야도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오빠!”
눈물을 흘리며 힘겹게 남자를 불렀지만, 남자는 지현의 원망스러운 눈빛과 말투에도 동요되지 않는 눈치였다.
“미안해······”
“결혼을 미루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직······”
“언제부터 였어?”
어렴풋이 남자의 차에서 느껴진 낯선 향기가 담요에서 더 진하게 느껴졌을 때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남자가 건넨 담요도, 남자의 옆자리도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니라는 확신.
“언제부터냐니? 그게 무슨 말이야?”
당황해 하던 남자의 모습은 점점 숙연해지고 있었다.
“······미안해.”
실수였다고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길 바랐다. 차라리 오해라고, 정말 아니라고 거짓말이라도 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지현의 바람과는 달리 남자의 대답은 너무나도 솔직하고 간단했다. 비참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행을 떠안은 것만 같았다.
“오빠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지현의 목소리는 절규로 가득 찼다.
결혼이야기가 오고 갈때부터 남자는 결혼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도 겪을 수 있는 일종의 성장통 같은 거라고 여겼다. 그렇게 떠밀리듯 시간은 자꾸만 흘러 갔다. 그럼에도 남자의 성장통은 도무지 진정이 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심각해져만 갔다. 쫓기듯 돌아가는 일상이 더 답답하게만 자기를 옥죄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결혼을 멈출 수도 없었다. 지현을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남자는 혼란스러웠다.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결혼전에 바람이라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언제부터였어?”
“······”
“언제부터였냐고?”
“······”
“그 여자 때문에 제주도에 오고 싶어했던 거야? 그러면서 나랑은 왜 결혼하려고 한 거야!”
지현은 묵묵부답인 남자에게 담요를 집어 던졌다.
“알고 지냈던 사이는 아니야······ 제주도에 와서 처음 만났어······”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여자 때문에? ···결혼까지 앞두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래?”
“여기까진 것 같아······ 여기서 그만 하자··· 우리......”
하얀 제주도는 마치 서울의 도로들처럼 복잡하게 꼬여 있는 남자의 머리속을 하얀 도화지로 만들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좋았다. 지현과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얀 도화지 위에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들뜬 기분으로 제주도에 오자마자 남자가 택한 첫번째 목적지는 성산 일출봉이었다. 남자는 일출을 보는 게 좋았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처음 비추는 햇살이 몸에 닿으면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어릴 적 좋아했던 히어로, 울트라맨 같이 말이다.
어둠이 걷히고 햇살이 비추자 성산 일출봉은 새하얀 자신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경이롭기 만한 자연의 아름다움과 마주한 남자는 눈부시게 반짝이는 성산 일출봉의 매력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남자는 한참 동안을 드문드문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서 감탄을 연발하였다. 어둠이 완전히 걷히자 돌 하나, 풀 한포기까지 선명해졌다. 그리고 사람들 무리 사이로 낯선 여자의 모습도 선명해져갔다. 어둠에 가려져 있던 건 비단 봉우리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구릿빛 피부를 가진 낯선 여자의 모습은 하얀 제주도에선 더 선명하게 보였다. 서핑을 좋아하는 여자는 한달을 오롯이 서핑을 즐기기 위해 제주도에 왔다고 했다. 안정적인 삶이란 자기를 구속시킬 뿐 그다지 매력적인 삶은 아니라고 했다. 내일을 굶더라도 오늘을 즐겁게 살고 싶다고 했다. 구속 받기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모습과 말투, 짜여진 공식에 익숙해져 있는 남자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섞으려고 해도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이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남자는 여자를 더 부담 없이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낯섦이 남자를 점차 빠져들게 만들었다. 지현이 균형 잡힌 삶이라면 낯선 여자는 남자에게 즐거움 그 자체였다. 지현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다짐을 하고 낯선 여자를 멀리하려고도 해봤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늪에 빠진 듯 더 깊숙이 빠져들어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더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낯선 여자처럼 지금을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다음을 위해 지금을 인내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남자는 여자에게 점점 더 스며들어 갔다.
지현이에게 제주도에 왔다는 전화가 왔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다시 서울로 가야만 한다. 하지만 서울로 돌아갈 자신이 없다. 서울에선 행복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내일은 모르겠다. 오늘을 살고 싶다···
남자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더 이상 서울이 아니라는 것을······ 하얀 제주도가 아니어도 괜찮다. 봄이 찾아와도 나는 이곳에 있고 싶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긴 것 같아······. 미안해······.”
눈으로 하얗게 지워내야 다시 봄이 찾아온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익숙한 가을이 다시 찾아온다.
지현의 마음에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지현의 이야기에 머리끝이 쭈뼛쭈뼛 섰다. 남일 같지가 않았다. 유나에게 다른 남자가 생기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을 하는 걸 보면 아직 파혼이라는 말을 내 입에 담을 일은 없을 것 같다.
“진짜 나쁜 놈이네! 지현이는 만나봤어? 괜찮은 거야?”
“지금 네가 지현이 걱정 할 때냐? 이번에 애들 모이는 거 알지? 지현이가 괜찮은지 궁금하면 그때 와서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계속 불참하지 말고!”
“안 그래도······ 참석하려고 했어!”
얼마전 대학 동아리 동기 단톡 방에서 모임 공지를 봤다. 그때 참석해서 친구들에게 결혼 소식을 알리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망설여진다······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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