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오랜만이야!

학교 정문 앞은 여전히 각기 다른 간판들을 내걸은 가게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오래전 내 머릿속에 담아 놓은 모습과는 사뭇 다르지만 분위기만은 여전하다. 밤이 되면 어둠이 내려앉는 학교와는 대조적으로 화려한 빛으로 치장한 정문 앞은 활기가 넘쳐 흐른다. 몇 년 전엔 나도 학교 앞을 배회하는 이들 중 한 명이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과는 섞이지 못하는 이방인에 불과한 것 같다. 여기에 다시 오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학교 앞 대로변으로 나오면 몇 개의 골목들이 보인다. 그 중, 모퉁이에 만화방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면 몇 걸음 가지 않아 유난히 어묵국물이 맛있는 분식점이 제일 먼저 반겨준다. 허름해 보이지만 이곳을 그냥 지나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 시험기간 늦은 시간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나온 날이면 더욱 그랬다. 그래서 분식점 이름이 방앗간인가 보다. 그땐 간판이 있는지도 몰랐었는데··· 그 옆으로 식당들이 쭉 늘어서 있다. 학식이 먹기 싫으면 왔었던 우동집, 국밥집은 변함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식당들이 늘어선 골목 끝자락으로 걸어가다 보면 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 너머에는 원룸 건물들이 우후죽순 들어서 있다. 이곳을 기점으로 화려한 불빛들과 왁자지껄한 소리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사거리에서 걸음이 멈춰 섰다. 예전과 같이 사거리 한 귀퉁이에 서있는 전봇대에는 가로등이 위태롭게 걸려있다. 가로등이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홀로 쓸쓸히 비추고 있다.
“어디야? 너무 오랜만에 와서 못 찾는 건 아니지?”
“다 왔어. 금방 들어 갈게.”
더는 걸음이 사거리 안쪽으로 내디뎌지지가 않는다. 찬희의 재촉 전화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찬희가 알려준 호프집으로 발길을 돌려야겠다. 모임 장소는 학교 앞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진 빌딩 2층에 위치한 생맥주집이다. 오히려 이런 곳이 마음이 편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그런 곳······
“야! 뭐하고 이제와? 오늘 같은 날은 일찍 일찍 좀 퇴근하고 그래라! 혼자만 일하냐?”
호프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열댓 명쯤 되는 대학 동기들이 왁자지껄 떠들다 말고 일제히 나를 보며 반겨줬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있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익숙한 사람들이지만 어색하게 느껴진다.
자리를 잡고 앉은 다음 처음으로 눈길이 간 곳은 지현이었다. 생각보다 표정이 밝아 보인다. 다행이다. 꼼꼼한 성격이라 뭐든 완벽하게 해내는 걸 좋아해 작은 실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친구였는데... 그런 친구였기에 파혼이라는 오점을 견뎌 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했다. 사실 오늘 모임에 안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승준아, 오랜만이야! 결혼한다며?”
“어? 어...”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챘는지 지현이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뭘 그렇게 놀래냐? 파혼한 사람이 결혼이야기를 꺼내니까 이상해? 헤헤”
“어? 아, 아니, 그, 그게 아니고······”
“혹시 나 파혼한 거 모르는 건 아니지?”
많이 취한 걸까? 세월이 지나면 성격도 바뀌는 모양이다. 소탈한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비밀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찬희를 바라봤다.
“내가 말해줬어. 이 자식 파혼 할지도 모르니까 네가 선배로서 조언 좀 해줘라!”
“뭐? 승준이 너도?”
“아, 아니야! 그냥 요즘 여자친구랑 사이가 좀 안 좋을 뿐이야.”
“사이가 왜? 혹시 너··· 아직도 희진이 못 잊고 그러는 건 아니지? 너 그런 거면 여자친구한테 몹쓸 짓 하는 거야!”
“지현아! 지현아!”
찬희가 화들짝 놀라며 지현이를 불렀다.
“너 취했어? 누가 누굴 못 잊어?”
“그래서 승준이가 동기 모임에도 잘 안 나오고 그랬던 거 아니었어? 그러고 보니까 희진이가 오늘 안 왔네.”
벌써 10년전 일인데··· 그냥 불편했을 뿐인데···
“희진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하자! 나중에 나랑 따로 이야기해!”
사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제일 먼저 희진이가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희진이도 모임에 잘 안 나오는 걸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긴 했지만 없어서 마음이 편하다는 생각이 더 컸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동기 모임에 자주 참석했던 모양인데··· 왠지 찜찜하다. 그나저나 찬희는 지현이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거지? 내가 알면 안되는 이야기라도 있는 건가?
“그러니까 자주 좀 오고 그래!”
지현이와 오고 가던 난해한 대화들은 찬희의 핀잔으로 매듭지어졌다.
“그나저나 승준아, 결혼 날짜는 잡혔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수현이었다. 재수를 해 한살이 많았던 수현이는 첫만남부터 자기를 누나라고 부르거나 존댓말을 쓰면 가만 안 두겠다고 겁박했다. 처음엔 그게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누나를 누나라고 부를 수 없다니··· 1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 생각해보니 그때 수현의 겁박을 따랐던 것이 옳았다. 물론 선택의 여지는 없었지만···
“아직······ 예식장을 못 잡았어.”
“그래, 예식장 잡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더라고. 뉴스에선 결혼 안 한다고 난리더만 빈 예식장은 또 없다니까!”
웨딩플래너를 만났어야 예식장을 알아보기라도 할 텐데······
한참을 왁자지껄 시끄럽던 모임은 결혼한 친구들이 먼저 하나 둘 빠져나가고 나서야 단출해졌다.
“우리 동아리방에 가보지 않을래?”
지현은 집에 가도 반겨주는 사람 하나 없는 외로운 사람들끼리 동아리 방에서 2차를 하는 게 어떠냐고 남아있는 동기들에게 물었다. 모두들 오래된 사진첩이라도 꺼내 보는 듯 동아리 방에서 술잔을 주고 받던 시절이 떠올랐는지 지현을 따라 나섰다.
테니스 동아리방은 동아리 방들이 모여 있는 5층 건물 꼭대기 층에 자리잡고 있다. 한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무렇지 않게 오르락내리락 했던 곳을 다들 헉헉거리며 힘겹게 걸어 올라갔다. 세월이 많이 지나긴 했나 보다.
헉헉거리며 동아리 방에 겨우 도착한 우리는 동아리 방 문 앞에서 또다른 난관에 부딪혔다. 바뀐 건 우리들의 체력만이 아니었나 보다. 동아리 방문을 여닫는 방법까지 바뀌어 있었다. 예전엔 문 밑에 연결된 줄을 잡아당겨 줄 끝에 매달린 열쇠로 여는 아날로그 방식이었다. 그런데 예전엔 없었던 낯선 도어락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흔하디흔한 도어락이 이렇게 낯설게 보이기도 힘들 것이다. 오지랖 넓은 찬희는 언제 알게 되었는지 동아리 회장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그리곤 동아리 회장이 말해준 대로 비밀 번호를 눌렀다. 1984. 동아리 창립 연도다. 문이 열린 동아리 방은 테이블이며 소파, 캐비닛 모두 새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익숙했던 이 곳이 어느덧 낯선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동아리 방 입장에서도 오랜만에 찾아온 우리가 낯설게 느껴지겠지···
“이것 좀 봐! 이건 그대로 있네.”
지현이 가리킨 벽에는 동아리 커플이었던 선배들의 결혼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신입생 때 봤던 그대로다. 액자만 낡아서 바꿔 낀 모양이다. 한 때는 나도 이곳에 사진을 걸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철없던 시절에 꾸었던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이야기다.
의자에 하나 둘 자리를 잡고 앉자 다들 각자의 추억에 젖어 들기 바빴다. 누구는 테니스 대회, 누구는 엠티, 누구는 사랑 이야기. 한참 추억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던 친구들은 하나 둘 인생사를 읊어 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 둘 현실로 돌아오고 나서야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다들 택시를 태워 보낸 후, 혼자 학교 앞에 남게 되었다. 다시 그곳으로 가보고 싶었다. 내 추억 팔이는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쓸쓸한 가로등 불빛이 비춰진 사거리. 내 가슴속 깊이 새겨진 추억이 시작된 곳. 오래된 기억을 쫓아 왼쪽 골목길로 걸어 내려갔다. 골목 양옆으로는 새로 지어진 건물들과 오래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던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며 서있다. 조금 더 내려가면 오른쪽에 조그만 공원이 보인다. 공원에는 여전히 그네 두개와 등나무 그리고 그 밑에 벤치 몇 개가 자리하고 있다. 이것들 모두 새것으로 바뀌었겠지만, 느낌만은 그대로 인 것 같다. 공원을 좀 더 내려가자 내가 찾고 있던 그곳이 나왔다. 다행히 그대로 있다.
중앙 계단 양옆으로 2개씩 원룸이 짝지어져 있는 3층짜리 빨간 벽돌 건물. 그중 2층 왼쪽 두번째 방. 창문으로 불이 켜져 있는 게 보인다. 지금도 연락하면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웃으며 날 반겨 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함께 조그만 공원 벤치로 가서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읊어 대며 투정을 부려 줄 것만 같았다.
한참을 불이 켜진 창문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이젠 낯선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예전처럼 창문에 불이 꺼지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여길 다시 왜 온 거지?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는 걸까?
······오늘 희진이는 왜 안 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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