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끝난 건가?

아버님의 물음에도 어머님은 유나의 눈치만 볼 뿐 아무 말씀도 하지 못하셨다.
“아빠! 혼인신고를 해야 가족이지, 결혼식도 안 올렸는데 무슨 가족이야?”
“꼭 뭔가를 해야 가족이냐? 이렇게 함께하면서 마음을 나누면 가족이 되는 거지? 젊은 애가 이렇게 앞뒤가 꽉 막혀서야. 쯧쯧. 승준아, 네가 좀 너그럽게 이해해라!”
“이해?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리고 결혼식장에 들어갈 때까지는 모른다는 말 몰라?”
“모르긴 뭘 몰라! 둘이 싸워서 연락도 안 하는 것 같더구먼. 그래서 엄마가 승준이랑 밥 먹자고 한 거잖아.”
술 때문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유나의 부모님도 눈치를 채고 계셨던 모양이다.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감정이 교차하며 느껴졌다. 귀하게 키운 딸을 결혼도 하기전부터 마음 고생을 시켰으니 내가 얼마나 꼴 보기 싫었을까? 그런데 손수 저녁까지 준비해서 대접해 주셨으니··· 어쩌면 내게 베풀어 주신 온정은 의도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받은 대로 유나에게 베풀어 달라는··· 부담스럽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유나한테 잘 했어야 했는데···”
잘하겠다는 말보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말이 먼저 떠올랐다. 솔직히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유나와 관계가 다시 예전처럼 좋아질 수 있는 건지··· 무사히 결혼은 할 수 있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냐고 말하고 싶었다.
“무슨 심려까지나. 본지도 좀 됐고 해서 부른 거니까 마음 쓰지 말게나.”
“당신은 괜한 말을 꺼내 가지고 승준이한테 부담을 줘요!”
“아니 무슨 부담을 줬다고 그래?”
“그런 이야기는 승준이 가고나서 유나한테 하면 되잖아요.”
“가만히 좀 있어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결혼하면 지금보다 더 한 일도 겪을 수 있을 텐데 이럴 때 부모로서 조언 같은 것도 해주고 그래야 하지 않겠어? 내 말이 틀렸어?”
“그거야 그렇지만··· 이제 애들도 성인인데 알아서들 하겠죠.”
“알아서 못하고 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냐?”
“그만해! 내가 알아서 할게!”
더 듣기가 거북했는지 버럭 화를 내며 유나가 부모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빠! 이제 그만 집에 가!”
얼떨결에 현관문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유나 부모님께 제대로 인사도 못했는데··· 분위기상 지금 나가지 않으면 더 큰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짧은 멜로디와 함께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무거운 마음이 여간 쉽게 가시지가 않는다. 발걸음까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아파트 입구를 빠져나오자 그때 유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려야지 그렇게 혼자 내려가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면박을 줬다. 만난 김에 이야기를 좀 하고가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제 냉전 상태를 마무리 지으려고 그러는 걸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유나는 아무 말없이 아파트 놀이터 벤치로 날 이끌었다. 벤치에 앉은 우리는 한 동안 아무 말없이 서로 한숨만 내쉬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다. 의도를 알 수가 없으니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다니 뭘?”
“몰라서 묻는 거야? 우리 결혼 말이야! 아무것도 안되고 있잖아!”
“나 때문에··· 미안해······”
“그런 말 듣자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야.”
“그럼 어떤 걸··· 혹시··· 너··· 여기서 그만하자는 말은 아니지?”
“아예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야··· 그렇다고 결론 지은 것도 아니고. 아무튼 혼자서 결론 낼 순 없으니까··· 오빠는?”
유나는 최악의 상황까지 머릿속으로 그려본 모양이다. 유나의 말에 우리 보단 유나의 부모님과 회사 사람들이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파혼까지 생각해본 적은 없어···”
거짓말이다. 나 역시 이미 최악의 상황까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해봤다.
“그저··· 전부 내 탓이니까··· 아직 내가 많이 부족하니까···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그런 것만 생각했어...”
습관처럼 순간을 모면하기위해 꺼낸 말일 뿐이다. 나 역시 우리의 결혼에 대한 확신이 흐려지고 있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말을 꺼내 놓고 유나의 표정을 살폈다. 아직도 굳어 있다. 유나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나 보다.
“순간을 모면하려고 하는 말 말고, 좀 더 진솔하게 이야기 해주면 안돼?”
“······”
“내가 먼저 말할게··· 결혼 준비하면서 단 한번도 오빠와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 오히려 외롭다는 기분만 더 들었어.”
“그건 너도 알다시피 우리 팀장이···”
“알고 있어. 같은 회사 다니는데 내가 왜 그걸 모르겠어. 때론 그것 때문에 속상해서 오빠한테 짜증 낼 때도 있었지만, 그거 때문만은 아니야. 아니, 그런 건 잠시 화만 나게 했을 뿐 진짜 날 힘들게 했던 이유가 아니야.”
회사일로 번번히 약속을 어긴 일 말고 유나를 힘들게 만들만 한 일들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만한 일들은 떠오르지가 않는다.
“···그게 ···뭔데.”
“오빠의 우선 순위가··· 이제 우리가 아닌 것 같아... 다른 사람 같이 느껴져.”
“어? 그게 무슨 소리야···”
유나는 결혼 준비를 하면서 내가 변했다고 했다. 예전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일을 우선 순위에 놓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지금은 우리 일에 관심이 전혀 없는 것 같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건 오해야!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우리가 우선이라고!”
유나의 말에 동의 할 수 없어 외치듯 내뱉긴 했지만, 나 역시 동의하는 부분이 조금은 있는 듯하다. 말을 내뱉고 나니 마음 한곳이 불편했다.
“내가 오해한 거 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프로포즈 이후 오빠의 모습을 돌아봐봐.”
“어? 뭘 돌아보라는 건지 모르겠어···?”
“휴~ ······오늘은 여기서 그만 이야기 하자. 그리고 오빠··· 우리··· 각자 시간을 좀 가지자···”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간이 다가왔다. 더는 할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도대체 내가 뭘 어쨌다는 거지? 짜증이 났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놀이터를 빠져나왔다. 최소한 나는 내 감정을 숨기고 어떻게든 유나를 달래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이라곤 이별 전야 같은 기다림이라는 시간이다. 이런 류의 기다림의 결말은 이미 경험해본 터라 잘 알고 있다.
돌아보라고? 칫, 생각하기 조차 싫다. 뭐가 변했다는 건지. 너도 변했다고 일갈하지 못한 게 오히려 분했다. 결혼 준비 전에는 내게 잔소리 한번 하지 않았었는데 결혼 준비를 시작한 이후로는 만나기가 무섭게 잔소리를 해대지 않았냐고 화를 냈어야 했다. 차라리 잘됐다. 나도 이미 결혼에 대한 확신이 희미해지고 있던 터였다. 시간을 가질 필요도 없다. 이제 나는 혼자다. 자유다. 결혼 준비 같은 걸로 신경 쓰고 눈치 볼 필요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결혼을 하는게 더 나락으로 빠지는 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유나의 사진으로 설정되어 있는 모바일 메신저의 프로필 사진을 예전부터 가고 싶었던 휴양지 사진으로 바꿔버렸다. 휴양지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움과 평화로움이 꽤나 만족스럽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유나의 프로필 사진을 찾아봤다. 유나 역시 프로필 사진 이력에서 내 모습을 모두 지워버렸다. 시간은 무슨 얼어 죽을 시간··· 우린 이제 끝난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편의점에서 산 소주와 안주거리들을 봉지에서 꺼냈다. 그리고 TV를 보며 소주를 마셨다. 그래도 아직 옆에 놓인 휴대폰이 신경 쓰인다. 하지만 미동조차 없다. 간격을 두고 몇 번을 반복해서 휴대폰을 쳐다봤지만 여전히 미동조차 없다. 홧김에 휴대폰을 집어 들고 휴대폰 사진첩에 있는 유나의 사진들을 하나씩 지우기 시작했다. 이제 유나 역시 과거일 뿐이라며 불편한 마음을 토닥이며 멈추지 않고 사진들을 전부 지워버렸다. 그걸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SNS에 들어가 남아 있는 유나의 흔적까지 모두 지워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막상 SNS에 있는 유나의 사진들을 보자 지우기가 꺼려졌다. 정말 이것까지 지우면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제 과거일 뿐인데 지우지 않는 것도 우습다. 한참을 SNS 피드 앞에서 혼자 실랑이를 버렸다. 그리곤 휴대폰이 꺼져버렸다. 배터리가 다 됐다. 바보 같지만······ 사진과 자존심 모두를 의도치 않게 지켜냈다.
이제 더 이상 유나 생각을 하면 안된다고 다른 생각들로 유나에 대한 생각들을 모두 밀어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처음 생각난 기억은 한동안 꿈속에 나타났던 희진이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있을 지도 모르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결혼은 했을까···? 혹시 이미 엄마가 돼있는 건 아닐까···? 희진이는 유나보다 더 오래된 과거의 일일 뿐이다. 다시 마음을 다 잡고 머리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과 감정들을 모조리 외면하기 위해 다른 기억들을 들추려 바둥거렸다.
그때였다. 찜찜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