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그땐···

희진이와의 마지막 데이트 날이다. 아직 입대를 하기까지 두 달이나 남아있지만, 방학이 되어 자취방을 빼고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럼에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더 남아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희진이는 그리움만 더 쌓일 것 같다며 오늘 데이트를 마지막으로 첫 휴가 때까지 만나지 말자고 했다.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가지라고 말했다. 입대 날도 따라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마음은 아프지만 나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러라고 말했다. 더 만나봐야 희진이 말 대로 그리움만 더 쌓일 것 같았다. 입대 날 따라와봐야 마음만 더 아플 것 같았다.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젖은 머리를 말리기 위해 거울 앞에 섰을 때였다. 거울에 비춰진 낯선 내 모습에 멋쩍은 미소가 지어졌다. 아직은 짧게 자른 머리가 어색하기 그지없다. 입대하기까지는 시간이 남아있었지만 제일 먼저 희진이에게 짧게 자른 머리를 보여주고 싶어 미리 잘라버렸다. 무엇이든 처음은 첫사랑인 희진이와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에 각인이 돼있나 보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학교 정문으로 먼저 나와 희진이를 기다렸다. 멀리서 희진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노란색이 유난히 더 잘 어울리는 희진이가 노란색 옷을 입고 내게로 가까이 다가온다. 평소보다 표정이 한층 밝아 보인다.
“웬 모자야?”
“나··· 머리··· 잘랐어.”
“벌써? 아직 입대하려면 두 달이나 남았잖아?”
“그게 그러니까··· 너한테 먼저 보여주고 싶더라고···”
“어머, 어떡해! 모자 벗어봐!”
“막상 보여주려니깐 쑥스러운데···”
멋쩍게 웃으며 모자를 벗어 까끌까끌 고슴도치 같은 머리를 희진이에게 보여줬다.
“우와! 신기해! 만져봐도 돼?”
“따가울 텐데···”
“괜찮아. 만져보고 싶어.”
희진이는 신기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상하지 않아? 나는 아직도 적응이 안돼.”
“생각보단···”
“생각보다 뭐···? 이상하지?”
“음··· 아니! 생각했던 것보단 훨씬 잘 어울려. 머리가 짧으니까 꼭 나보다 동생 같아 보여.”
“동생은 무슨, 이제 진짜 아저씨 되는 건데.”
“21살짜리 아저씨가 어디 있어?”
“아저씨지! 학교 다닐 때 군대에 위문 편지 쓰면 군인 아저씨라고 쓰잖아!”
“그러고 보니까 그랬던 것 같네. 어떡해? 이제 진짜 아저씨 되는 거야?”
“우울해··· 아저씨가 되는 것도··· 2년이나 넘은 시간을 군대에서 보내야 하는 것도···”
“괜찮아! 너 혼자만 가는 것도 아닌데, 뭘!”
“남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말라고!”
“남일이긴! 우리 일이지! 기분 풀어. 내가 아저씨 되는 기념으로 맛있는 거 사줄게! 헤헤”
희진이는 마지막 데이트라며 대학생 용돈으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레스토랑으로 날 데리고 갔다. 괜찮다고 무리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희진이는 2년치 데이트 비용을 몰아서 쓰는 거라 괜찮다고 웃어넘겼다. 희진이는 밥을 먹는 내내 평소보다 밝고 활기차 보이려고 애쓰는 눈치였다. 마지막 데이트라도 분위기가 우울해지는 건 몹시도 싫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그 모습이 안쓰럽고 애처롭게 보여 더 슬펐지만 그런 희진이 앞에서 슬픈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진짜 내가 내도 되는데··· 군대 가지전에 재미있게 놀다 가라고 여기저기서 용돈 많이 받았는데···”
“아니야! 오늘은 내가 사주고 싶었다니깐! 이제 그만 말해~”
“그럼 내가 용돈이라도 줄까? 아니면··· 사고 싶은 거 없어?”
“음··· 맞다! 나 너랑 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어? 뭘?”
“빨리 가자!”
“어딘데?”
“가보면 알아!”
희진이가 마지막으로 데려 간 곳은 사진관이었다.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 볼 수 있게 같이 찍은 사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왕이면 자주 꺼내 보고 싶을 만큼 아주 잘 나온 사진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짧게 자른 머리 때문에 예전 같은 모습이 아니라 못내 아쉬워 했지만 짧게 자른 머리가 꽤 잘 어울려 용서해준다고 했다.
커플 사진을 받아 들고 사진관을 나왔다. 어느새 밖은 캄캄한 저녁이 되어 있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어렵게 내디디며 희진이를 집에 데려다 주기위해 함께 걸어갔다. 걸어가는 동안도 분위기는 더 없이 밝고 활기찼다. 하지만 점점 더 짙게 드리워지고 있는 슬픔을 모두 지울 수는 없었다.
어느덧 희진이 자취방 근처에 있는 사거리까지 와버렸다. 이제 정말 헤어질 시간이 코앞까지 다가와버린 것이다. 사거리 귀퉁이 전봇대에 걸려있는 가로등 불빛이 분위기를 더욱 애잔하게 만드는 것 같다.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자.”
“왜? 집까지는 좀 더 가야 하잖아!”
“아니야.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자. 몸 조심이 잘 갔다 와!”
덤덤하게 희진이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마지막 인사가 뭐 이래?”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무슨 마지막 인사야? 기다리지 말라는 소리로 들리네?”
“네 마음대로 해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있네. 딴 남자들은 쳐다도 안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와. 헤헤”
“···”
“작별 인사로 이정도면 됐지?”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빨리 헤어지고 싶어하는 눈치다.
“알았어, 연락 할게.”
“흠······”
“왜? 막상 작별인사까지 다 하고 나니까 아쉬워?”
“음··· 아니! 그냥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서?”
“부탁? 뭔데?”
“다른 게 아니고 머리··· 한번만 더 만져보면 안되?
“머리?”
“까끌까끌한 촉감이 또 생각날 것 같아서. 헤헤”
“나 심각해! 장난 칠 기분 아니라고?”
“나도 장난 아닌데? 그러지 말고 모자 한번만 더 벗어봐!”
“참네, 알았어. 이제가면 언제 볼지도 모르는데 만져라.”
모자를 벗어 머리를 숙이자 희진이는 까끌까끌한 내 머리를 오른 손으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잠시··· 희진이가 손을 멈추고 두 팔로 내 몸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티셔츠 너머로 따뜻하고 촉촉한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조심이 잘 갔다 와. 기다릴 게···”
희진이는 그렇게 내 손에 조그만 쇼핑백을 쥐어 주고 뒤돌아 가버렸다. 내 티셔츠에는 희진이의 눈물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눈물만은 보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렇게 서둘러 헤어지려고 했었나 보다. 하루 종일 애써 참고 있었던 눈물이 그제서야 비집고 나왔던 모양이다. 희진이의 슬퍼 보이는 뒷모습을 당장이라도 뛰어가 와락 껴안고 싶었지만··· 왠지 그러면 안될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두워진 골목길 사이로 희진이의 모습이 자취를 감춰도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씁쓸한 슬픔이 온몸을 휘감았다. 한참을 사거리에 홀로 방치된 가로등처럼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사거리를 뒤로하고 집으로는 되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핑백을 붙들고 있을 만한 정신은 있었는지 오른손에 쇼핑백이 들려 있다. 아직도 남아 있을지 모를 희진이의 흔적이 사라질세라 조심스러운 손길로 쇼핑백 안에 있는 선물을 풀었다. 쇼핑백 안에는 희진이가 준비해 준 디지털 시계와 쪽지가 들어있었다. 쪽지에는 군대에서 꼭 필요한 물건이라며 자기가 꼭 시계는 사주고 싶었다고 쓰여져 있었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시계를 보라고 했다. 힘들어도 시간은 흐르고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은 가까워지고 있다며...
군대에 있는 2년 동안 희진이가 사준 시계와 사진을 보며, 시간은 흐르고 우리가 만날 날은 가까워지고 있다고 수천 번 아니 수만 번도 더 되뇌며, 견디고 또 견뎠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술을 마시다 익숙하게 유나를 떠올렸다. 그러다 유나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다른 기억을 들추었다. 하지만 떠오르는 건 희진이와의 추억뿐이었다. 그 기억마저 멈추기 위해 다른 기억들을 더듬거리다 이런 저런 기억들 중 며칠 전 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중 신발 속 모래알 같이 거슬리는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렇게 불편한 기억 한 줌과 알코올이 만나 오랜 추억을 회상하게 했다. 나와 시계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그런 사이 인줄로만 알았는데···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래도 기억이 나는 그때 그 시절. 나도 그때는 왼쪽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런 거추장스러운 물건에 추억까지 깃들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기억속에 희진이도 함께 있었다. 그때 희진이가 사준 그 시계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기억은 가슴속 어딘가에 나도 모르게 간직하고 있었나 보다.
오른손에 묵직한 물건 하나가 쥐어져 있다. 나와는 상관도 없는 이 물건이··· 왜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걸까?
오른손에 쥐어진 스마트 워치를 충전기에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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