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느낌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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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과몽
작품등록일 :
2024.05.14 13:06
최근연재일 :
2024.06.13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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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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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신입생으로 리부팅 (2)

DUMMY

반도의 남쪽 끝에 위치한 고향으로 가기 위해 습관처럼 서울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습관처럼 역무원에게 고향으로 가는 고속열차 표를 달라고 요청했다. 누가 봐도 이제 막 입사한 것 같은 앳돼 보이는 역무원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새마을호를 말하는 거냐고 오히려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가야할 목적지에는 아직 고속열차가 개통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개통도 하지 않은 고속열차의 표를 달라고 했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서둘러 역무원이 건네는 새마을호 기차표를 집어 들고 기차에 올랐다.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과거와 현재를 오락가락하는 것 같다.

열차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플랫폼에 서있는 역무원의 수신호에 따라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차가 서울역을 빠져나오자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풍경이 영사기의 필름 같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어느덧 고층 빌딩 숲이 꼬마빌딩들로, 꼬마빌딩들이 논밭으로 시간을 거슬러올라가듯 창밖 풍경이 바뀌어 갔다.


며칠 전 테니스 코트에서 희진이를 만났다. 공을 밟아 미끄러졌다며, 미안하다고 내게 말했다. 그리고 내 주변으로 나뒹굴고 있는 공들을 줍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움에 온몸이 얼어 붙은 것 마냥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더는 정상적으로 훈련에 참여 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훈련 부장에게 아프다는 핑계로 테니스 코트를 먼저 빠져나왔다. 어제 훈련하다 쓰러진 여파가 아직도 테니스 코트에 남아있었던지 훈련부장 선배가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테니스 코트를 빠져나와 걷기 시작했다. 안식이 필요할 때 찬희가 소파를 찾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질 때까지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하염없이 걸었다. 이런 습관은 분명 졸업 후에나 생긴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어디까지 허락된 걸까? 감정까지 기억하는 건 욕심이라는 건가? 그건 누가 정한 거지? 여기로 데려온 이유가 뭘까?

희진이가 내게 처음 건넨 말이 미안하다는 말이었다니··· 희진이에게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도 미안하다는 말이었는데··· 그보다 더 놀라웠던 건··· 희진이를 보고도 아무런 감정적 동요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설렘도··· 그리움도··· 미워하는 마음 조차도··· 기계라도 된 것 마냥··· 기억은 그저 기록이었을 뿐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질 않았다.

걷다 보니 어느덧 익숙한 다리 앞에 도착했다. 이것도 습관이 된 것일까? 저녁시간이라 역시 인적이 드물다. 스마트 워치를 건네 준 아저씨를 만난 장소로 걸어갔다. 공사를 하고 있었던 그때와는 다르게 모든 것이 멀쩡해 보인다. 다리 밑을 바라봤다. 잔잔한 물결이 달빛에 반짝이며 일렁인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멍하니 반짝이는 윤슬을 응시하게 된다.

호주머니에 넣어둔 폴더 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찬희는 아무 말도 없이 혼자 가버려서 걱정이 됐다며, 훈련이 끝나자마자 전화를 했다고 했다. 찬희가 이런저런 질문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차마 희진이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좀 아프다는 말로 모든 변명을 대신하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가 온다. 이번에는 엄마다. 10여년 전의 엄마···


“엄마···”

“무슨 일 있어?”


엄마의 목소리에 울컥 눈물이 쏟아 질 것만 같았다.

익숙한 시공간이지만 홀로 남겨진 것만 같았다. 내가 내가 아닌 것만 같았다. 혼란스러웠다. 버겁고 힘겨웠다. 그때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엄마의 목소리. 이제서야 의지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는 안도감이 어리광과 함께 섞여 온몸으로 퍼져가는 것만 같았다.

그저 엄마라고 말했을 뿐인데··· 아들의 짧은 말한마디에도 엄마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미세한 변화를 감지해주는 그런 존재였다.


“무슨 일은··· 그런 거 없어···

“정말 없어? 목소리가 평소하고 다른데?”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니라고 정말 별일 없다고 대답했다.


“근데, 왜 전화했어?”

“왜긴, 우리 아들 보고 싶어서 전화했지.”


가족끼리는 꼭 무슨 일이 없어도 수시로 전화할 수 있는 사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매번 바보같이 이런 식의 물음을 되풀이 하고 있다.


“이번주에 집에 갈까?”

“그냥 해본 말이야. 공부하기도 피곤할 텐데 뭘 와? 기숙사에서 쉬어.”

“괜찮아.”

“안 힘들겠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 집에는 있을 것만 같았다.


“괜찮다니까. 근데, 엄마···”

“왜?”

“그게··· 있잖아··· 그게··· 아, 아빠도 잘 계시지?”

“그럼, 아빠도 잘 계시지.”

“알았어. 금요일에 봐.”

“어, 그래 금요일에 보자.”


그렇게 통화가 끝나버렸다. 아직도 엄마의 목소리가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는데··· 몇 십년 동안 엄마와는 이런 식으로 밖에 대화하지 못했던 탓에 살가운 말한마디 조차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스피커에서 곧 종착역에 도착한다는 안내 음성이 들려온다. 목적지까지는 새마을호로 다섯 시간 정도를 가야하는 먼 거리지만, 전혀 길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뇌로는 쓰나미처럼 몰려드는 생각들을 처리하기에 턱없이도 부족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기차가 멈춰 서고 출입문이 열리자 비릿한 바다 내음이 뒤섞인 익숙한 향기가 제일 먼저 날 반겨주었다. 기차역을 나와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아 탔다. 차 유리에는 엑스포 유치를 홍보하는 스티커가 붙어있다. 기차역을 나오면서부터 엑스포 유치를 희망하는 홍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몇 년 후엔 모든 시민들이 열망하는 엑스포가 기대에 부흥하며 유치되긴 하지만 기대만큼 도시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엑스포보단 엑스포 개최쯤에 소개된 노래 한 곡이 작은 항구 도시의 변화를 일으키는데 더 크게 일조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초입에서 택시를 멈춰 세웠다. 몇 년 후면 엑스포 유치로 사라지게 될 오래된 정취를 간직한 골목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초저녁이지만 문을 닫은 가게들이 제법 눈에 들어왔다. 개중엔 비어 있는 곳들도 있었다. 한때는 저녁 늦은 시간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번화한 곳이었는데··· 도시가 얼마만큼 변화를 갈망하는 지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길게 쭉 뻗은 골목길을 걸어가다 보면 슈퍼마켓이며, 분식점, 세탁소 같은 상점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블록 사이 사이를 추억이 서려 있는 조그만 골목들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골목 중간쯤 이르렀을 때 익숙한 문구점 간판이 보인다. 우리 집이다. 몇 십년 동안 어업으로 생계를 일구셨던 아빠가 고심 끝에 배를 팔고 장만한 이층집. 아빠와 엄마는 위험하고 고된 어업 대신 생계를 위해 일층을 개조해 문구점을 차리셨다. 벌이는 줄었지만 두 분이 행복하게 일하며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문구점 옆으로 검은색으로 칠해진 대문이 보인다. 초인종을 누르자 아무런 저항없이 대문이 열린다.


“오느라 고생했다.”


아빠가 두 팔로 안아주며 반겨주었다. 거친 파도와 맞서며 생계를 일궜던 바닷사람답지 않게 다정다감한 분이시다. 만약 아빠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아닌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더라면 좀더 섬세하고 부드러운 직업을 택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가슴 한곳이 아린다.


“한두번도 아닌데요, 뭘.”

“배고프지? 밥부터 먹자.”


엄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준 저녁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같이 앉았다. 편했다. 이런 기분은 과거에도 똑같이 느껴졌다. 너무 좋았다. 이곳에서는 안식을 찾아 하염없이 걸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집에 있는 이틀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집 밥을 먹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부모님과 담소를 나눴던 일상이 이렇게 소중한 것이었는지 내가 있는 곳에서는 알아채지 못했다.


“갈게요.”

“서울까지 가려면 고생하겠다. 조심히 올라가라.”

“네.”


옆에 있던 엄마가 스리슬쩍 아빠의 옆구리를 찔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여자 신경 쓰이지 않게 잘해.”

“당신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부탁한 말만해요?”

“알았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


“엄마가 너한테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말을 안 해준다면서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아냐? 밤에 잠도 못 자고. 아무튼 엄마가 시킨 대로 통장에 용돈 넣어 놨으니 엄마 걱정 안 하게 잘해. 안 그러면 내가 피곤하다. 알았냐?”

“···별일 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틀 동안 편했던 건 나 혼자였다니··· 죄송스러운 마음에 대문을 열다 말고, 멋쩍게 뒤돌아서 양팔로 엄마와 아빠를 어색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철들고 나서 한번도 해보지 못한 말을 가까스로 우물거렸다.


“사랑합니다.”


어색하고 오글거리긴 했지만 정말 잘한 일이라며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시공간이 바뀌어 혼란스러웠다. 때로는 혼란스러움에 힘겹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이제는 버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힘겨울 때마다 찾아갈 사람들과 장소가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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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2. 좋을 텐데··· (1) 24.06.10 24 0 10쪽
21 21. 스며든다. 24.05.31 30 0 10쪽
20 20. 기차안에서 24.05.30 38 0 10쪽
19 19. 본능적으로 24.05.29 43 0 9쪽
18 18. 첫눈에 반하다. 24.05.28 58 0 10쪽
» 17. 신입생으로 리부팅 (2) 24.05.27 68 0 10쪽
16 16. 신입생으로 리부팅 (1) 24.05.24 74 1 10쪽
15 15. 찬희의 첫사랑 (2) 24.05.24 76 1 10쪽
14 14. 찬희의 첫사랑 (1) 24.05.23 83 1 10쪽
13 13. 다시 20살···? 24.05.23 88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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