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첫눈에 반하다.

“뭐하냐?”
“그냥 앉아있는데요.”
오전 수업이 전부 끝나자 평소와 같이 찬희와 함께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다 먹을 때쯤 1학년 과대표가 하나 있는 오후 수업이 휴강이 됐다며 문자를 보내왔다. 할 일이 없어진 우리는 느긋한 마음으로 식당을 나와 학교 벤치에 널브러져 앉아 게으름을 피웠다. 마침 화창한 4월이라 캠퍼스에 앉아 봄날을 만끽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그때 점심을 먹고 막 식당밖으로 걸어 나오는 같은 과 1학년 형이 보였다. 재수를 해 1살이 많은 형이지만 아무도 스물한살로 보지는 않았다. 복학생 형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수더분한 외모에 패션 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옷차림이 그 형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하지만 시원시원하고 꾸밈없는 성격으로 낯선 사람과도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성격이 그 형의 가장 큰 장점으로 같은 과동기들 모두가 형을 잘 따랐다.
“오후 수업 휴강이라며?”
“네, 과대가 문자 보냈더라고요.”
“그럼 오늘 오후에 아무것도 없는 거 맞지?”
“네.”
“이제 뭐 할 거야?”
“모르겠어요. 그냥 좀 벤치에서 쉬었다가 테니스나 칠까 하는데요.”
“너희 둘 다 테니스 동아리야?”
“네.”
“테니스는 언제 치러가는데?”
“6시요.”
“그럼, 아직 시간 많이 남았네.”
“그렇긴 한데··· 왜요?”
“그때까지 둘 다 할 일 없지?”
“왜 그러는데요? 피시방이라도 가려고요?”
“아니, 할 일 없으면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어디 가는데요?”
“가보면 알아.”
“맞다! 저는 룸메이트 형이랑 기숙사에서 보기로 해서요, 가봐야겠어요.”
옆에서 눈치를 보던 찬희가 누가 봐도 어설퍼 보이는 거짓말을 해대며 자리에서 다급하게 일어났다.
“무슨 약속?”
“룸메이트 형이랑 기숙사 로비에서 잠깐 보기로 했는데, 깜빡했네요. 승준아, 미안! 나 먼저 갈게. 이따 테니스 코트에서 보자!”
“승준이 너는 괜찮지?”
“저, 저요?”
찬희가 저렇게 다급하게 빠져나가는 걸 보면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불길하다.
“가자, 승준아!”
거절할 겨를도 없이 우식이 형에게 끌려 동아리 방들이 모여 있는 건물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쉼 없이 걸어 올라가던 우식이형이 4층에서 멈춰 섰다.
“들어가자!”
형이 멈춰선 동아리방 문 앞에는 기독교 동아리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형, 저 교회 안 다녀요?”
“안 다녀도 괜찮아. 그냥 놀러 온 거야.”
“교회도 안 다니는데··· 제가 왜···?”
“잘 됐네, 이번 기회에 한번 경험해 보는 것도 좋아!”
“네?”
이런 일들까지는 기억 속에 남아있지가 않았다. 혼자서 쏙 빠져나가버린 찬희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에 살았던 동네에는 집 앞에 큰 교회가 있었다. 큰 건물 하나와 몇 개의 작은 건물들 그리고 넓은 마당까지 있었던 아주 큰 교회로 기억하고 있다. 하긴, 어릴 때는 그렇게 커 보였던 학교 운동장이 성인이 되고나서 서글퍼질 정도로 작게 느껴졌으니, 집 앞에 있던 교회 역시 미취학 아동에게나 커 보이는 것 일 수도 있겠다.
그땐 교회가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그저 놀이터 마냥 교회 마당에 있는 미끄럼틀이며 그네를 타고 놀며 신나 했었다. 큰 교회는 주말이 아님에도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특히 평일에는 교회 안에 있는 병설 유치원의 원복을 입고 있는 형들과 누나들로 붐볐다. 나 역시 일곱살이 되자 병설 유치원의 원복을 입고 그곳을 공식적으로 드나들기 시작했다.
내가 알고 있는 교회는 신앙이라기 보다는 유치원이자 놀이터였다. 물론 아주 가끔씩 유치원에서 보고 배운 신앙의 흔적들이 남아있기는 했다. 일요일이면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호주머니에 쑤셔 넣은 내가 구멍가게로 뛰어가다 말고 교회로 들어갔었던 일이 종종 있었으니 말이다. 그 후로는 교회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하고 담을 쌓고 살았다.
기독교 동아리 방안으로 들어서자 서너 명 정도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행복하게 웃으며 노래 부르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라 이질감 같은 게 느껴져서 더 인상 깊었는지도 모르겠다. 대충 동아리방에 있는 사람들과 간단하게 일면식을 가진 후 자리에 앉았다.
동아리 방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교회를 안 다닌다는 말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곤 이것 저것 질문을 쏟아냈다. 상냥한 목소리들이 오고 가긴 했지만 내성적인 나에겐 매우 불편한 상황이었다.
[야! 너! 알고 있었지?]
[뭘? 어딘데?]
잠시 대화가 소강상태에 이르자 찬희에게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기독교 동아리 방··· 약속 있다는 것도 거짓말이지?]
[ㅋㅋㅋ 미안! 일요일에 교회 나갈 자신도 없고··· 나랑 진짜 안 맞아!]
우식이 형은 모태신앙으로 모든 가족이 독실한 크리스천이라고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눈에 띄는 동기들을 동아리방으로 매번 데려갈 정도로 전도에도 열심히라고 했다. 오늘은 그 타깃이 나와 찬희가 되었고, 이미 다른 동기들에게 이야기를 들은 찬희는 나만 남겨놓고 홀로 빠져나갔던 것이다.
[그렇다고 너만 쏙 빠지냐?]
[ㅋㅋㅋ 다 널 위한 거야! 거기 예쁜 신인생들도 많다고 하더라고. 이참에 종교도 생기고 여자친구도 만들고 좋잖아! 나는 은영이도 있고··· 다른 사람한테 눈 돌릴 틈도 없어. ㅋㅋㅋ]
[나도 교회는 내 스타ㅇ ㅣ ]
찬희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을 때 동아리 방문이 열렸다. 동아리 방안으로 신입생으로 보이는 여자 세명이 들어온다.
쿵쿵! 쿵쿵! 쿵쿵! 심장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심장 소리는 온몸으로 울려 퍼져 귓바퀴 밖으로까지 그 소리가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신입생 세명 중 마지막에 들어온 아이를 보자 떠올랐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가을이 짙어져도 잊혀지지가 않았던 내 짝사랑 아이가 바로 저 아이라는 것을···
찰랑거리며 반짝이는 긴 생머리. 붉은 입술을 더욱 붉어 보이게 하는 새하얗고 작은 얼굴. 호수같이 맑은 큰 눈, 그 안으로 보이는 선명한 검은 눈동자. 청바지에 하얀색 면 티 만으로도 누구보다 돋보이는 아우라를 뿜어내는 신비로움. 누구나 한번 보면 빠져 들 수 밖에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얼굴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아래로 떨구어진다. 그 아이의 모습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궁금해지면 조심스럽게 눈을 치켜 뜨고 슬쩍 그 아이의 모습을 아주 잠깐 눈에 담을 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신입생 세명은 동아리 방안에 있는 사람들과 오래전부터 친했던 사람들인 것처럼 스스럼 없이 대화를 주고 받았다. 부러웠다. 나도 이 사람들처럼 그 아이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오빠, 옆에 있는 분은 누구예요?”
세명 중 제일 활발해 보이는 여학우 한 명이 우식이 형 옆에서 새빨간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내게 호기심을 보였다.
“승준이라고, 같은 과 신입생이야.”
“그래요!” 대답과 함께 내게로 시선을 옮긴다. “안녕, 난 중어중문학과 1학년 나영이라고 해, 김나영.”
“어, 어, 안녕. 환경공학과 1학년 최승준이라고 해.”
같이 방으로 들어온 신입생들도 한 명씩 내게 인사하기 시작했다.
“나는 같은 과 이현주라고 해.”
붉은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심장이 더욱 더 격렬하게 요동쳤다. 현주구나, 이현주. 붉은 입술에서 나온 앳된 목소리 때문인지 흔한 이름조차 특별하게 느껴졌다. 현주도 나처럼 수줍음이 많은 걸까? 말하는 와중에 하얗던 얼굴이 붉어져 갔다. 지금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잠시도 눈을 땔 수가 없었다. 짧은 인사였지만 가슴이 설레다 못해 아리기까지 했다.
“저희 수업이 있어서 먼저 일어 날게요.”
나영이가 일어나자 옆에 있던 현주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동아리 방을 나갔다. 현주와의 짧은 만남이 끝나 버렸다. 아쉬웠다. 이대로 보내고 싶진 않았지만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 밖에 할 수 없었다.
동아리 방이 텅 비자, 우식이 형과 나도 동아리 방을 빠져나왔다.
“형, 동아리 방에는 얼마나 자주 가요?”
“어···? 공강 시간에는 대체로 동아리 방으로 가지. 근데 왜?”
“아니, 그냥, 뭐··· 저도 종교에 관심이 조금 생겨서요··· 그래서··· 가끔 형 따라 갈까 하고요.”
“갑자기? 아까는 안 들어온다고 그렇게 뻐팅기더니. 뭐야?”
“그냥 다들···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 좋아 보이더라고요.”
“솔직히 말해! 너 현주 때문에 그러는 거지?”
동공이 확장되며 침이 꼴깍 삼켜졌다. 숨긴다고 숨겼는데 티가 많이 났던 것일까?
우식이 형한테는 들키거나 말거나 상관없지만, 아직은 현주에게 들키고 싶지가 않았다. 고작 인사 한번 했을 뿐인데··· 가벼운 사람으로 보여지는 게 싫었다. 내 딴에는 진중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여겼기 때문에 더욱 그런 모습이 용납되지 않았다.
“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현주하고 인사할 때는 귀까지 빨개지더구먼. 명심해라! 신입생부터 선배들까지 현주를 노리는 남자들이 엄청 많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맞고 아니고는 지켜보면 알겠지. 아무튼 갈때마다 말해 줄게. 그리고 다음주 주말에 야유회 가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갈 수 있으면 가자!”
“야유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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