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본능적으로

우식이 형을 따라 동아리 방을 다녀온 후론 하루 온종일 현주를 떠올리며 설레어했다. 기억하기론 그때도 지금과 같은 상태였던 것 같다. 과거의 20살때와 다른 점은 시간이 흐르면서 현주도 내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미리 알아봐야 별 소용도 없는 기억이다. 현주와의 기억은 여기까지가 전부다.
그때 왜 나는 현주가 아니라 희진이를 택했던 걸까? 왜 현주에겐 고백조차 하지 못했던 걸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 머리는 과거의 기억들을 너무 선택적으로 담고 있다. 어떤 일은 쓸모없는 것까지 모조리 기억하고 있는가 반면 어떤 일들은 처음 겪는 일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뭘까?
수업이 끝나자 평소와 같이 찬희와 함께 테니스를 치기위해 코트로 들어왔다. 벚꽃이 질 무렵이 되면서부터 우후죽순 테니스 동아리에 가입했던 신입생들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이쯤부터 익숙한 얼굴들로 코트 안이 채워져 있었다. 미래에 파혼을 하게 될 지현이도, 한살이 많은 수현이도 이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코트안에 희진이도······ 보인다.
희진이가 내게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넨다. 공 사건 이후로 희진이와는 서로 인사하는 사이 정도가 되었다. 그때도 숫기가 없어 희진이가 건네는 인사를 수줍게 받았었던 것 같은데······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더 경직된 표정과 부자연스러운 동작들로 희진이를 대하고 있다. 정말 많이 좋아했었는데··· 헤어지고 나서 일상생활조차 유지할 수 없을 만큼 마음 아파했는데··· 여전히 희진이를 보고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사랑했던 기억, 이별했던 기억, 모든 기억들이 교과서에 쓰여진 글자들처럼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몇 번을 희진이와 마주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대로 희진이를 좋아하게 되기는 하는 걸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와 지금이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배제할 수가 없었다.
아직은 희진이에 대한 마음이 싹을 틔우기 전이라 머릿속에는 오로지 현주에 대한 생각 밖에 없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희진이와의 추억들은 마치 난독증 환자 앞에 놓여진 장문의 글일 뿐이다. 그렇다고 희진이와의 추억들을 지워버리고 싶지는 않다···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때도 지금처럼 희진이와 현주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것 같다. 그러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희진이와 사귀게 되었다. 그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같이 컵라면이라도 먹을래?”
테니스 훈련을 마치고 기숙사로 올라가는 길. 2학년 선배가 기숙사 로비에서 컵라면이라도 먹자고 제안했다. 테니스 훈련 시작 시간과 기숙사 식당 저녁 타임이 겹쳐 요즘은 저녁을 거르기 일쑤였다. 동아리를 막 가입했을 시기까지만 해도 테니스에 대한 흥미보다 저녁 식사가 더 중요했기에 저녁 식사를 마치고 코트로 뛰어내려갔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상황이 역전되었다.
기숙사로 들어와 샤워를 마친 우리는 컵라면을 하나씩 들고 한산해진 로비로 모였다. 1학년 남자 동기 2명과 컵라면을 제안한 2학년 남자 선배, 이렇게 4명이서 컵라면을 먹으며 담소를 나눴다. 테이블에 차려진 건 고작해야 컵라면과 봉투김치가 전부였지만, 20살의 대학생이 낭만과 행복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취미생활 뒤에 사람들과 즐기는 조촐한 저녁에 대학생활을 누구보다 알차게 즐기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관심 있는 애들은 없어?”
2학년 선배가 슬쩍 떠보듯 질문을 꺼냈다. 역시 남자들끼리 모여서 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에는 여자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찬희가 먼저 망설임없이 은영이 이야기를 떳떳하게 꺼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리에서 은영이를 아는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어 거리낄 게 없었을 것이다.
“동주 형은 없어요?”
옆에 앉아 있던 호영이가 2학년 선배에게 오히려 역으로 질문을 넘겼다. 서로 신경전이라도 벌이는 듯 묘한 기류가 둘 사이에 흐르는 것만 같았다.
“나?”
“네, 형은 관심있는 사람 없어요?”
“음··· 있지.”
“정말요? 누군데요? 혹시 저희 동아리 사람이에요?”
“음··· 너희들은 모르는 사람이야.”
딱히 동주 형의 표정에서 숨기는 듯한 기색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호영이 너는? 너는 없어?”
“······저도 있어요.”
“누군데?”
호영이의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게”
“동아리 사람인가 보구나? 말하기 좀 그러면 안 해도 돼.”
“아니요. 말해도 상관없어요. 사실··· 저···”
호영이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우리에게 공포했다.
“희진이한테 관심 있어요.”
호영이가 희진이를 좋아했었나? 더 당황스러운 건··· 호영이의 말에 동주형의 얼굴이 굳어져버렸다는 것이다.
“형도 희진이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었어요?”
“나?”
“네, 형도 희진이한테 관심 있는 걸로 보였는데, 아닌가요?”
호영이의 질문에 동주 형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동주 형도 희진이를 좋아하고 있었나? 이것도 기억에 있질 않은데···?
“아, 아니··· 희진이는 아니야.”
이것 역시 동주 형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승, 승준아 너는?”
다급하게 화제를 내 쪽으로 돌리는 것이 더 수상하게 느껴졌다.
“저요?”
“희진이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 같던데, 너도 혹시 희진이한테 관심있는 거 아니야?”
“그, 그게···”
과거의 기억을 쫓는다면 희진이라고 말하는 게 맞겠지만 이런 복잡한 관계에 끼어들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지금 내가 좋아하는 아이는 희진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기억을 쫓아 희진이라고 말하는 게 맞을까?
“정말 너도 희진이야?”
동주 형의 뒤를 이어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호영이가 질문을 했다. 그들과의 경쟁에서 빠지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나중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희진이가 아니라 해도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 테니··· 괜찮겠지?
“아니야.” 호영이를 바라보며 두 팔로 손사레를 쳤다. 그리고 동주 형을 바라봤다. “저는 따로 있어요. 우리 동아리 사람도 아니고요!”
“그럼 누군데?”
찬희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 말에 집중했다.
“기독교 동아리 갔다가 만난 1학년 있어요.”
“너, 이 자식, 없는 척하더니만! 그때 우식이 형이랑 가서 만나 거야?”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쟁자가 한 명 줄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주 형과 호영이의 표정이 한결 편해 보였다.
동주 형은 수석 입학까지 한 수재로 수려한 외모에 입담까지 좋아 여자 남자 할 거 없이 모두에게 인기가 많다. 호영이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서인지 모난 부분 없이 밝다. 더구나 스노우 보드, 서핑, 골프 등 경험해보지 않은 레저가 없을 정도였고, 입학선물로 부모님께 자동차까지 받아 친구들에겐 선망의 대상이다. 그에 비하면 한참 초라한 나인데··· 굳이 나까지 경계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더 의아스러운 건 과거에 희진이가 나보다 나아 보이는 남자들을 전부 마다하고 나하고 사귀었다는 것이다.
“무슨 과야? 이름은?”
“중국어··· 이현주라고··· 아직 인사 정도만 한 사이라, 걔는 내 이름도 기억 못하고 있을 걸?
현주에 대한 마음은 변함없지만, 막상 현주라고 말하고 나니 후련함 보단 찜찜한 기분이 먼저 들었다. 아무래도 희진이와의 추억 때문일 것 같다고 짐작된다.
“예쁘냐?”
찬희의 질문에 아무런 저항없이 머리속으로 현주의 얼굴이 그려진다. 설렌다.
“어···”
“내가 뭐라고 했어? 기독교 동아리에 예쁜 애들 많다고 했잖아! 내 말 듣길 잘했지? 거짓말을 했다는 둥, 혼자 빠져나갔다는 둥 엄청 뭐라고 하더니!”
“아, 뭐···”
“이제 기독교 동아리방에 죽치고 앉아있겠네? 이제 교회도 다니겠어?”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현주 쫓아다닌다고 테니스 동아리에 소홀하기만 해봐라!”
“아니라고!”
“지켜 보면 알겠지, 뭐!”
“너나 잘해!”
“거긴 MT 같은 건 안 간데? 그런 걸 좀 가줘야 현주랑 더 빨리 친해 질 건데?”
“안 그래도 이번 주에 야유회 간다더라고.”
기억에 연연하지 않을 순 없지만, 지금 같아서는 희진이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일 같은 건 없을 것 같았다. 희진이에 대한 생각은 그저 기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본능은 일방적으로 현주에게 기울어져 있다. 더구나 지금은 야유회때 현주와 어떻게 자연스럽게 친해질지가 최대의 관심사다.
야유회때··· 현주를 다시 만날 수 있겠지···?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