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스며든다.

수세기를 버텨가며 진화의 과정을 통해 세상에 적응해왔던 호모사피엔스. 어쩌면 호모사피엔스들이 이룩한 역사란 적응의 산물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나 역시 다른 호모사피엔스들처럼 의도치 않게 바뀌어 버린 시공간에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어쩌면 그리운 것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는, 다가올 미래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감정노동으로부터 해방돼 훨씬 홀가분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과거와 미래를 혼동하긴 하지만 그것 역시 삶에 소소한 에피소드 정도로 여기며 적응해 살아가고 있다.
하루가 시작되면 캠퍼스를 거닐며 친구들과 수업을 듣고, 수업 사이 공강 시간이 생기면 동아리 방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오후 6시가 되면 운동복으로 옷을 갈아 입고 테니스를 치러 간다. 이곳에 있는 순간 순간이 설렘과 행복의 연속이다. 혹여나 여기로 왔던 것처럼 예고도 없이 내가 살고 있던 시공간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까 봐 두렵기까지 했다.
오늘은 테니스 훈련이 끝난 후 동아리 1학년 동기 모임이 있는 날이다. 이젠 그들과도 스스럼없이 편한 사이가 되었다. 선배들이 시기할 정도로 그들과 끈끈한 사이가 되었다. 이것 역시 내가 과거에 오롯이 스며들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 같다. 한 가지 껄끄러운 게 있다면, 희진이와의 관계가 여전히 서먹서먹하고 어렵다는 것이다. 추억이라고 여겼던 기억의 조각이 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 같았다. 이건··· 그러니깐··· 시공간을 초월하면서 생긴 상처쯤으로 치부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렇게 점점 과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살아가고 있다.
훈련이 끝나자 모두들 약속한 대로 학교 정문 앞으로 모였다. 하나같이 땀에 찌든 모습이지만 다들 함께여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다.
기수 대표인 수찬이가 미리 예약해 놓은 식당으로 모두를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출입문과 나무로 된 칸막이, 내부에 장식된 소품들이 어우러져 서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식당의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다, 라고 생각하던 찰나, 벽에 붙여진 메뉴판을 보자 그리웠던 순간이 탁하고 떠올랐다. 인테리어만큼이나 인상적인 이 집의 메인 메뉴, 치킨 냉채. 얼마만이지? 연락할 방법이 없어 마냥 그리워만 했던 오랜 친구를 갑자기 만난 기분이었다. 겨자를 추가한 간장 베이스 소스에 각종 야채와 얇게 찢은 닭고기살, 해파리가 어우러져 톡 쏘는 시원함이 일품인 치킨 냉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다. 졸업 이후에 다시 찾았을 때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른 가게로 바뀌었다. 폐업을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그리고 치킨 냉채를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다.
모두들 500CC 맥주잔을 들고 건배를 한 뒤 치킨 냉채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그리운 맛에 감탄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추억을 한 움큼 움켜쥐고 다시 만나 반갑다는 혼잣말까지 내뱉었다.
“치킨 냉채를 좋아하나 봐?”
옆에 앉아있는 여자 동기가 말을 걸어왔다. 아마도 내가 혼자 한 말을 들은 모양이다. 말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희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앞에 있는 맥주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언제부터 내 옆에 앉아있던 거지? 추억에 심취한 나머지 내 옆에 누가 앉아있었는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
“어, 어”
동기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천천히 좀 먹으라고 한마디씩 거든다. 아직은 희진이를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희진이를 대하는 내 행동과 말투, 모든 것이 어색하고 어렵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호영이의 시선이···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하다.
“맛집 다니는 거 좋아해?”
“그런 건 아니고···”
“학교 주변에 괜찮은 맛집 있으면 추천 좀 해줘,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희진이와 이야기하고 있는 내 모습을 호영이가 지켜보고 있다.
“···잘 몰라”
호영이는 희진이에게 관심이 있다고 밝힌 이후로 시시때때로 내게 희진이와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곤 했다. 딴에는 답답한 마음에 내가 고민 상담을 해주길 혹은 그냥 속풀이용 리스너가 되어주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호영이가 그럴 때마다 부담스러웠다. 죄책감이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비밀 이야기라고 털어 놓는 친구에게 듣고 싶지 않다고 매몰차게 거절하는 짓도 못하겠다.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불편하다. 희진이도··· 호영이도··· 희진이가 계속 말을 걸어온다. 여전히 서먹서먹하고, 어려운 분위기도 싫다. 희진이의 질문에 대답할 말도 떠오르지가 않는다. 무엇보다 호영이한테 눈치가 보여 입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술자리는 게임이지, 게임하자!”
수찬이가 리더답게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게임을 제안했다. 30대에 접어 들면서 술자리 게임은 끊었지만, 수찬이의 제안이 가뭄에 단비처럼 반갑게 느껴진다. 더 이상 희진이에게 질문을 받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호영이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하던 게임을 멈추고 자연스럽게 진실 게임으로 넘어갔다. 남의 비밀을 알아서 뭐 하겠냐고, 이런 게임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보면 나 역시 다른 친구들처럼 남의 비밀 이야기가 듣고 싶은 모양이다.
술래가 몇 번 바뀌었지만, 딱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이제 기장인 수찬이의 차례다. 처음 질문으로 어김없이 좋아하는 이성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비슷한 루틴의 질문들에 이제 좀 지겨워졌다.
“있어. 이미 고백도 했는 걸.”
수찬이의 고백 발언에 모두들 흩어졌던 집중력을 끌어 모았다.
“결과는?”
“여자친구 생겼어?”
“누군데?
모든 이목이 집중된 수찬이에게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다른 동기들처럼 수찬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나 역시 궁금했다.
“결과는 실패··· 하지만 아직도 진행 중이야. 그리고 누군인지는··· 이걸로 내 대답을 대신할 게.”
수찬이는 대답을 하는 대신 음료수 잔에 가득 담겨있는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수찬이 벌칙주로 대답을 대신하자 말해달라고 동기들이 아우성을 질렀다. 그럼에도 수찬이는 미소만 지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럼, 다음은 호영이.”
수찬이가 소주를 가득 따른 잔을 호영이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질문을 했다.
“이자리에 좋아하는 사람 있어?”
둘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진 것 같다.
“나도 이걸로 내 대답을 대신할 게.”
호영이도 수찬이처럼 소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곤 소주잔을 희진이한테 넘겼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너한테 고백한 사람 있어?”
삼각관계? 동주형까지 사각? 아님 나까지 오각 관계?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희진이는 호영이의 질문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기를 잠시 희진 앞에 있는 잔을 수찬이가 들어 마셔버렸다.
“흑기사”
수찬이의 행동으로 수찬이 좋아하고 있는 아이가 희진이라는 걸 모두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도 질문이 있어. 희진아, 혹시 동기들 중에 관심있는 사람 있어?”
희진이는 다시 채워진 술잔을 보고 머뭇거리기 시작한다. 그런 희진이를 바라보는 호영이와 수찬이가 초조해 보인다. 이런 상황이 보기 불편한 건 비단 그 셋만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희진이 앞에 있는 잔에 손이 갔다. 그리고 잔에 가득 채워진 소주를 모조리 마셔버렸다.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고요하다. 눈앞에 호영이와 수찬이가 보인다. 예상 못한 상황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 그 옆으로 찬희도 상황 파악이 안되는지 그들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옆에 있는 동기도, 그 옆에 앉아 있는 동기도··· 시끌벅적했던 분위기가 일순간 정리가 되었다.
“또 흑기사야? 재미없게.”
“그만하자.”
“이제 기숙사 문 닫을 시간이야.”
모두 하나같이 풀리지 않은 궁금증을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숙사로 올라가는 길, 동기들이 하나같이 왜 그랬냐고 묻는다. 하지만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까는 고마웠어.”
희진이가 내 옆으로 다가와 인사를 하고 간다.
그때 희진이는 벌칙주가 아니라 질문에 답을 하려고 했다. 희진이가 입을 여는 순간 희진이가 말하려고 하는 이름의 초성이 내 귓가에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초성을 듣고 본능적으로 벌칙주를 들어 마셔버렸다. 제발 호영이가 듣지 못했기를 바라면서······
호영이가 내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한다. 그리고 다른 동기들과 같이 아까는 왜 그런 거냐고 물어본다. 딱히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고마웠다고 말했다. 무슨 의미일까? 들은 걸까? 그리고 현주와 잘 되길 응원하겠다면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말했다. 나도 잘 되길 바란다고 호영이에게 말했다. 막상 말하고 나니 모래알을 씹은 듯 입안이 텁텁하다. 왜 지? 눈앞에 희진이의 뒷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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