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좋을 텐데··· (5)

어제와 같은 아침에 해가 밝았다. 평소와 같이 찬희와 기숙사 식당에서 밥을 먹고 수업을 듣기 위해 강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일과를 마치고 동아리 사람들과 테니스를 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똑같은 일상이다. 다른 시공간에 살았었다는 걸 잊어버릴 만큼 일상에 녹아들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괴리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괴리감의 출처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혹시나 예전에 내가 있던 시공간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
샤워를 하고 나와 책상 앞에 앉았다. 휴대폰으로 문자 한통이 와있다. 현주에게서 온 것이다. 어제 내가 한 물음에 대한 답을 해준 것 같다. 좀 전의 걱정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온통 현주가 보낸 문자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 찬다.
현주는 성윤이 형에게 고백조차 하지 못했다고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친한 교회 언니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것부터였을까? 아니면 애당초 성윤이 형을 좋아했던 것부터 잘못된 일인 걸까? 그래봐야 의미 없는 생각들이라고 체념했다. 그러다 이내 통제력을 잃고 다시 생각하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사람이 아니라 날 봐줄 순 없는 걸까?
현주는 한동안 집밖에는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고 했다. 모두가 자기에게 벌어진 일들을 알고 있을 것만 같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측은한 표정으로 자기를 쳐다 볼 것만 같다는, 어떤 사람들은 자기를 비웃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현주가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텐데···
혹시나 성윤이 형이나 교회 언니를 만나게 된다면 자기가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겠다고, 통제불능이 될 것 같다고 스스로를 못 미더워했다. 그렇게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생각들과 감정들이 멈추지 않고 몰려들면 한동안 쳐다도 보지 않았던 피아노 앞에 앉아 그것들을 외면하기 위해 미친 듯이 피아노를 쳤다고 했다.
현주는 이야기를 하다 진절머리 처질 정도로 괴로워지면 말을 멈추고 침묵속에서 감정을 추스르려고 애썼다. 테이블 위로 현주의 숨소리만 들려올 때면, 반대로 내가 숨이 막힐 정도로 괴로웠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라는 것이 고작해야 현주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전부라, 해줄 수 있는 것이 이것 밖에 없다는 것이 괴로웠던 모양이다. 아니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에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괴로웠을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이성적인 표정을 지으며 침묵을 지키던 현주의 두 눈이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참고 있던 눈물이 폭발한 모양이다. 눈물을 닦아 줄 수도, 위로의 말을 건넬 수도 없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테이블 위에 세팅되어 있는 냅킨 몇 장을 건넸다.
눈물을 훔친 현주가 미안하다며 바람을 좀 쐬면 괜찮아 질 것 같다고 여기서 나가자고 말했다. 식당을 나온 우리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한동안 말로 그리고 눈물로 감정을 쏟아내기 바빴던 현주는 걷는 것으로 감정을 쏟아내는 방식을 바꿨나 보다. 멈추지 않을 것처럼 현주가 걷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보단 걷는 것이 훨씬 수월하게 느껴진다.
표정을 담당하는 근육과 신경에 과부하라도 걸린 것 마냥 현주의 얼굴에서 표정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현주의 시선에서 초점을 찾을 수도 없다. 무의식에 의한 움직임. 이게 지금 현주의 상태인 것 같다. 어쩌면 그동안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꼭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곁에 있어도 상관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아무 내색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던 현주가 내게 털어놓은 이유가 조금은 궁금하다.
어느덧 발길은 예전에 같이 왔었던 한강 공원에 닿았다. 그때와 같이 우리는 한강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직도 무의식에 의한 움직임이 전부인 현주가 그때처럼 맥주를 마시며 어두운 한강을 응시하고 있다. 촉촉하게 젖어있던 눈가도 메말라있다.
감정을 폭발시키는 일도, 눈물을 흘리는 일도, 무작정 걷는 일도 모든 것이 멈추었지만, 아직도 현주는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더 기다렸어야 했는데··· 뇌관을 섣불리 건드린 꼴이라니... 후회가 된다. 어쩌면 시간이 더 지나도 달라진 게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에 나 역시 한강만 의미 없이 바라보게 된다.
“미안해···”
현주가 뜬금없이 내게 말을 건넸다. 이제 내가 옆에 있다는 걸 느낄 정도로 감정이 추슬러진 것일까?
“뭐가?”
“넌 듣고 싶지 않을 수도 있는데···”
“아니야.”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이야기하고 나니까, 후련하긴 하다.”
“그나마 다행이네. 그런데··· 말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아무한테도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쏟아낸 걸 보면 그동안 정말 답답하긴 했나 봐.”
“성윤이 형은 아직도 모르는 거야?”
“아마도···”
“왜 비밀로 하고 싶었던 거야?
“그냥··· 오빠의 원 오브 뎀이 되는 것만 같아서 싫었거든···. 그리고 오빠만 모르면 평소와 다를 게 없을 것 같았거든···”
“두 사람을 보면서 평소와 같을 수 있겠어?”
현주는 손에 쥐고 있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괜한 질문을 했나?
“휴~ 힘들겠지··· 근데··· 바보같이··· 미련이 남는다.”
“미련? 무슨···”
“한바탕 쏟아내고 나니까··· 속상한 마음이 가시기는 하는데··· 왜 또 생각이 날까?”
아직도 성윤이 형에 대한 미련이 앙금처럼 현주에게 남아있나 보다. 그 사람은 아니라고 강하게 말하고 싶지만··· 내게 그런 말을 할만한 자격이 있기는 한 걸까?
“고백··· 하려고···”
“아니··· 그냥··· 차라리 잘된 것 같아. 설사 잘 된다 하더라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거야.”
혼자 품은 의문을 혼자 해결하는 걸 보면 아직도 현주안에서 수많은 자아가 충돌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뭘?”
“혼자 좋아하는 거 말이야···”
현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맥주 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생각처럼 쉽게 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한동안은 정말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싫었거든··· 생각나면 뇌를 꺼내서 씻고 싶을 정도로 싫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잊혀지는 게 아니라 더 보고 싶어 지더라··· 그러다 다시 진절머리 날 정도로 싫고··· 다시 생각나고···”
현주의 말에서 불현듯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나도 한때는 뇌를 꺼내서 씻고 싶을 만큼 잊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 질 줄 알았다. 하지만 잊혀지는 게 아니라 나 역시 더 보고 싶어졌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고 생각에 더 그리워졌었다. 그런 시간의 고비를 지나 망각이 더 짙어질 때쯤 정말 잊혀졌다고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빈자리를 채웠다고 여겼다. 하지만 모두 착각이었다. 잠시 흐려졌을 뿐이었다.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거겠지?”
현주의 물음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느닷없이 던진 내 말에 현주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
“축하해줘야 하는 거지?”
“아직은··· 나도 혼자 좋아하는 거라서...”
현주처럼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답답했다. 무의식 중에 생긴 용기에 기대서라도 고백하고 싶었다.
“나··· 너 좋아해.”
“승준아?”
“지금 답할 상황이 아니라 거 잘 알고 있어. 언제가 돼도 상관없어, 기다릴 게.”
그 말을 뒤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묵혀 놓은 숙제를 했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현주가 느끼고 싶었던 후련함? 성취감? 이라는 것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기분이겠지?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해도 괜찮다. 그렇게 내가 경험했던 과거에는 없었던 일을 새롭게 만들어 가고 있다.
답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현주에게서 빨리 답이 왔다. 어떤 답변이 쓰여 있을지 문자를 보기가 조심스럽다.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열어 문자를 확인했다. 아직은 엉킨 실타래 같이 복잡한 상황이라 조심스럽지만, 새로운 인연이 나라면 좋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긍정적인 답변이다. 기쁨으로 벅차 올랐다. 망설일 사이도 없이 현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주의 목소리도 어제보다 훨씬 나아진 것 같이 느껴진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냥 설레고만 있다.
현주와의 설레는 통화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웠다. 문득 머릿속으로 누군가가 떠오른다. 그리고 하루 종일 날 괴롭혔던 괴리감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불길함? 불안함? 지금 느끼고 있는 행복함이 사라질 것 같아 초조해진다.
어렵사리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깨어났다. 알람을 끄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휴대폰을 들어 액정화면을 쳐다봤을 때 출처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의 원인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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