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시스템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짐 정리가 끝나갈 때쯤 노을의 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어, 수찬아. 오고 있냐?”
- 야, 네가 알려준 대로 왔는데, 여기 맞아?
“1층에 왼쪽에 편의점 오른쪽에 별 커피숍 있지?”
- 어. 있어.
“그럼 맞게 잘 온 거야. 17층으로 올라와.”
전화를 끊고는 태양에게 소식을 전했다.
“수찬이 1층이래.”
“저녁 먹기엔 시간이 좀 이르네. 올라오면 수찬이한테도 집 구경시켜 주고, 뭐 할지 의논해 보자. 뭐라고 말할지.. 어쩐지 알 것 같지만.”
“크큭.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수찬은 태양과 마찬가지로 감탄을 내뱉으며 창가로 달려갔다.
“야, 한노을. 이거 뭐냐? 너 언제 이렇게 성공했어?”
“하하. 그렇지. 내가 좀 성공했다.”
“이 부러운 자식!”
수찬은 부럽다를 연발하며 집을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그럼 이제 뭐 하냐?”
“안 그래도 너 오면 얘기해 보려고 했지. 먹기 시작하면 밤까지 달릴 텐데, 저녁 먹기엔 좀 이른 것 같아서.”
“가자.”
“역시, 거기?”
“당연하지 인마! 내가 지난주에 못 와서 일주일 더 실력을 갈고닦았다. 이거야!”
“요리 연습은 안 하고 놀기만 한 거야? 장 수습?”
태양이 깐족거리며 끼어들었다.
“아, 셰프 시켜달라고!”
“크큭. 내일 해장을 맡겨보겠어. 결과물을 보고 너의 위치를 재조정할 것이다!”
“좋아. 내가 해장의 정수를 보여주지. 일단 그건 내일 얘기고. 나가자. 내가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오면서 검색해 봤는데. 조금 이동하긴 해야 하지만 실내 오락장 있더라.”
벌써 마음은 거기에 가 있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으며 말하는 수찬.
그 모습에 태양과 노을이 졌다는 듯 웃으며 따랐다.
“그래, 가자. 가!”
“내기 걸어야지.”
“그럼 술이랑 내일 해장거리 장 봐야 하는데 그거 계산하기로 하자.”
세 친구는 전의를 불태우며 집을 나섰다.
***
2시간 후.
띠리릭-.
집으로 돌아온 세 사람.
손에는 장 봐온 봉투들이 들려있다.
밝게 웃는 두 사람과 다르게 시무룩한 수찬의 얼굴이 눈에 띈다.
“야, 아직도 그러고 있냐? 다음에 또 붙어.”
“그래, 그래도 오늘은 두 가지 모두 공동 2등 했잖아.”
위로를 건넸지만 여전히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입을 연다.
“공동 2등이면 결국 꼴찌야. 아악! 1등을 노렸는데! 왜 또 진 거야!”
“하하. 야, 나는 운동신경 좋다니까. 이기기 쉽지 않을걸.”
“그리고 한노을은 왜 잘하는 건데?”
자신에게 불똥이 튀자, 노을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답했다.
“글쎄. 나도 타고난 거 아닐까? 난 군대도 안 갔잖아. 그런데 사격까지 잘하는 거 보면, 아무래도 천재? 그런 건가?”
태연한 얼굴로 천재 드립이라니. 태양은 웃음을 터뜨렸다.
“크큭. 야. 천재는 너무 간 거 아니냐?”
“그런가? 그럼 그 비슷한 걸로 하자.”
“그래 너네 둘 다 잘 났다! 내가 언젠가 꼭 이겨주마.”
“자, 수찬이 삐친 거도 풀렸으니까 음식 주문하자.”
“야, 나 안 삐쳤거든?”
“그래. 그래. 삐쳤다가 이제는 안 삐친 장수찬.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노을이까지 놀리고 들자, 수찬은 셋이 함께 있으면 언제나 자신이 놀림감이 되는 것 같다고 느끼며 자포자기한 채로 답했다.
“난 다 잘 먹어.”
“그럼 원래 계획했던 대로 다양하게 주문할게.”
사전에 조사해 뒀던 주변 음식점에서 평점이 좋은 곳만 골라 다양한 음식을 주문했다.
온갖 음식점이 몰려있는 강남답게 평소에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음식들도 있어서 수찬을 위해 고심 끝에 주문한 것들이었다.
음식이 도착한 후, 수찬의 반응을 기대하는 태양과 노을의 시선이 한곳에 몰렸다.
“이야, 진짜 다양하게 시켰네. 한식, 중식, 일식은 기본이고 태국에, 스페인에, 멕시칸까지.. 이거 다 먹을 수는 있는 거냐?”
투덜대는 듯 보였지만 얼굴에는 메뉴가 만족스럽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노을이가 너 맛 보여 준다고 며칠 동안 인터넷 뒤져가면서 고른 거야.”
“오. 한노을. 좀 감동인데?”
“다양한 메뉴가 좋겠다는 힌트는 태양이가 줬어. 역시 이런 게 요리에 도움이 되지?”
“당연하지.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현지 음식을 먹어보는 게 가장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우니까 이렇게라도 먹어보면 도움이 많이 되지. 두 사람 다 고맙다.”
자신을 위해 일부러 준비한 음식들임을 알게 되자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럼 술은 좀 나중에 먹고 일단 맛을 좀 보자. 술이 들어가면 미각이 좀 둔해지니까.”
“그래. 빈속에 술은 힘들지. 일단 배부터 채우자.”
이미 먹어봤던 음식도, 처음 먹어보는 음식도 맛있게 먹으며 세 친구는 만찬을 즐겼다.
결국엔 술을 이것저것 섞어 마시며 만취 엔딩을 맞이하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그 누구도 눈을 뜨지 못했다.
지이잉- 지이잉-
술에 취한 와중에도 맞춰놓았던 알람이 울리자, 수찬은 괴로운 몸부림 끝에 눈을 떴다.
거실에 널브러져 있는 친구들을 보니 어젯밤 신나게 웃고 떠들던 시간이 떠올라 피식- 웃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지난주 식당 일을 도와준 것부터 어제 자신을 위한 메뉴 선정까지.
고마운 마음을 듬뿍 담아 최고의 해장국을 끓여주리라. 마음먹고 냉장고에서 아스파라긴 함유가 높아 숙취 해소에 좋은 재료 원톱이라 할 수 있는 콩나물을 꺼냈다.
역시 해장엔 콩나물국이지.
같이 사 온 북어도 찢어서 준비하고, 무도 얇게 나박나박 썰어주었다. 이로써 간단하게 재료 준비 끝.
정성스럽게 육수를 우려주고 싶었지만 시간 절약을 위해 코인 육수를 풍덩.
일어날 때만 해도 숙취로 잔뜩 찡그린 얼굴이 펴질 줄 몰랐지만, 요리하다 보니 콧노래가 절로 나는 수찬이었다.
잠에 취해 이불 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최고의 모닝콜은 역시 주방에서 들려오는 도마소리가 아닐까. 무엇을 썰고 있는지 탁. 탁. 나무 도마에 칼이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와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겨오자, 태양과 노을은 자꾸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수찬이 언제 일어났지?”
“으.. 속 아파. 해장국 끓이나 보다.”
“그러게. 난 머리도 아프다. 일단 좀 씻어야겠다. 나 먼저 씻는다.”
노을에게 그렇게 하라는 뜻으로 손을 휘적거려 주고 다시 이불 위로 엎어지는 태양. 그러고는 잠시 눈을 감고 있는데.. 몸을 흔드는 감각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그새를 못 참고 다시 잠들었냐?”
“으하암. 그래? 그냥 눈만 감고 있었던 것 같은데.”
“눈만 감기는 무슨. 하품 그만하고, 얼른 씻고 나와 해장국 다 됐대.”
해장국이라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후다닥 씻고 나온 태양.
“이야, 냄새 죽인다.”
“그냥 콩나물국이야. 어서 앉아서 먹자.”
아일랜드 식탁에 정성스럽게 차려진 해장국을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친 태양은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잘 먹을게!”
우렁찬 인사를 건네고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어 입안으로 와앙-.
“야, 진짜 시원해. 안에 북어도 있네?”
“어제 샀잖아. 해장에 좋은 거라 같이 넣었어. 맛은 좀 괜찮냐?”
태양은 연신 국물을 마시느라 바빴고, 노을이 답했다.
“어, 맛있어. 너희 식당에서 이거 팔아도 되겠다 야.”
“하하. 식당은 지금 메뉴가 딱 좋아. 돈 주고 사 먹고 싶을 만큼 맛있다는 뜻이지?”
태양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 메뉴에 있으면 난 사 먹는다. 그리고 너! 다시 셰프로 승격! 역시, 장수찬 셰프님! 음식 솜씨가 일품이네!”
“참나. 드디어 다시 셰프냐? 나중에 또 수습으로 강등시키는 거 아니지?”
“크큭. 그건 모르는 일이지. 일단 지금은 셰프잖냐.”
머지않아 자신은 또 장 수습이라 불리겠구나. 직감한 수찬은 셰프이면 어떻고 수습이면 어떠랴 싶었다. 어차피 친구들이 장난삼아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마음대로 불러라. 일단 먹자.”
그 말을 끝으로 식탁에는 크허. 캬. 하는 감탄만 들려올 뿐 말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럼 나는 이만 가봐야겠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반쯤 누운 채로 TV를 보던 중, 수찬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 벌써? 조금 더 있다가 가지.”
“어제 쉬었으니, 오늘은 가게 일 도와야지.”
“주말에 일 도와주러 오신다는 이모님 계시잖아?”
“어. 그런데 그냥 놀기에는 내가 마음이 불편해. 너네 이렇게 누워만 있을 거지?”
“아마도? 숙취가 아직 남아있으니까 이렇게 쉬어줘야지.”
“핑계는. 아무튼 쉬는 것도 좋지만 나는 식당 일이 더 좋으니까. 가볼게.”
“그래, 알았다. 조심히 가고. 또 보자.”
떠나는 수찬을 배웅하고 다시 소파에 앉은 두 사람.
“수찬이 자식, 효자네. 효자야.”
“아무래도 어머니 혼자시니까, 신경을 더 쓰는 것 같아.”
“수찬이 아버지는 돌아가신 거야?”
“이혼하신 거로 알아. 나도 자세히는 몰라, 나중에 수찬이 만나면 조심스럽게 물어봐. 굳이 숨기는 얘기는 아니라서 말해줄 거야.”
“그렇구나. 식당에도 늘 어머니만 계시고 따로 아버지에 관련된 언급이 없길래. 안 계시는가 보다.. 생각은 했는데.. 나중에 분위기 봐서 이야기 꺼내도 실례가 아니구나 싶을 때 슬쩍 물어봐야겠다.”
“그래. 어설프게 짐작하거나 알고 있으면 의도치 않은 말실수가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확실히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노을의 말에 태양도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 더 소파와 한 몸처럼 누워있다가 태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자.”
뜬금없는 제안에 노을이 물었다.
“어딜?”
“그동안 틈틈이 퀘스트 해서 포인트 모았잖아. 할아버지들 체력 물약 드리러 가자.”
“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부분을 태양이 챙기자 노을은 감탄을 내뱉었다.
“오, 강태양. 의외로 세심하단 말이야.”
“세심하면 세심한 거지, 의외는 또 뭐야? 딱 봐도 섬세한 남자잖냐.”
“딱 보면 그냥 무섭게 생긴 남자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는 노을을 향해 반박의 말을 우다다- 쏟아내려다가 외모로 싸우는 것만큼 유치한 게 없다는 생각에 한마디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래 봬도 나 호감형이야.”
“그냥 형 아니고?”
“호감형이든 그냥 형이든 됐고. 얼른 준비하고 나가자.”
한바탕 더 놀리고 싶었지만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는 태양을 보며 노을도 준비를 서둘렀다.
***
할아버지들 드실 간식거리를 사서 도착한 병원.
5층 데스크에서 이선희 간호사를 마주쳐 간단하게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병원엔 어쩐 일이세요?”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뵈러 왔어요.”
“할아버지요?”
“그때 대신 찾아뵀던 김문복 할아버지요.”
급한 마음에 부탁했던 당시의 상황이 빠르게 떠오르며 이선희 간호사가 놀라서 물었다.
“정말요? 다시 찾아오실 줄은 몰랐어요. 우와 감동인데요?”
“하하. 한번 인연을 맺었으니까요. 할아버지랑 많이 친해지기도 했고요.”
“정말 다행이에요. 요즘은 친구분이랑 붙어있으시긴 하지만, 그래도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힘이 나는 법이거든요.”
간호사를 마주친 김에 할아버지의 건강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할아버지는 좀 어떤가요?”
“생각보다 잘 버텨주고 계세요. 친구를 만나시는 게 좋게 작용을 한 건지 전보다 기운도 좀 나시는 것 같고.”
기운이 나는 건 아마도 물약 덕분이겠지. 때맞춰 상점 기능이 오픈되어서 참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분인 할아버지도 건강이 좀 나아지셨나요?”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7층 쌤들한테 들었는데, 그 할아버지 환자분도 김문복 할아버지를 만나기 전보다 상태가 조금 호전됐다고 하더라고요.
두 분 다 병원 치료로는 더는 회복이 힘든 상태였는데.. 저희끼리는 기적이라고 하고 있어요.”
간호사가 전해주는 할아버지들의 건강 상태를 들으며 태양도 노을도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정말.. 다행이야.
시스템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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