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이런 데서 자면 입 돌아가요!

병원 정문을 벗어나자 김문복과 박영길은 똑같이 하늘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영길이, 하늘 보니까 좋지?”
“좋구먼..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아..”
“그렇지? 허허..”
다시 말 수가 줄어들며 그저 사연 많은 시선으로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도 좋지만 사람들도 좀 보세요. 저기 춥지도 않은지 술래잡기하는 아이들도 있네요.”
노을의 말에 고개를 내려 주위를 둘러보고는.
“허허. 애들한테는 날씨가 상관이 없지요. 저렇게 뛰어놀 친구만 있으면 그곳이 놀이터가 되니까요.”
“우리도 그렇게 여기저기 뛰어다녔지. 앞산으로 뒷산으로. 온 동네를 그렇게 다니면 어른들이 감자 하나, 옥수수 하나 그렇게 쥐여줬는데 말일세.”
“그랬지. 따라온 누렁이한테 하나 뺏기고 나면 둘이 반씩 나눠 먹던 그게.. 어찌나 맛있던지..”
금세 추억여행을 떠나 즐겁게 한참을 얘기한다. 그동안 태양과 노을은 뒤에서 조용히 휠체어를 밀었다.
어느덧 의사가 허락한 10분이 지나고. 아직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할아버지들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입을 여는 태양.
“이제 슬슬 들어가셔야 할 것 같아요.”
“벌써 그렇게 됐나?”
“허허. 오랜만에 세상에 나온 게 즐거워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네요.”
웃으며 말하지만 얼굴에 진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오늘만 날인가요. 또 산책하러 나와요.”
“그래. 다음에 또 나옴세. 너무 아쉬워하지 말아.”
“다음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구먼. 그래.. 아직 내게도 다음이 있었지. 좋구먼.”
두 대의 휠체어는 다시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꽁꽁 싸맸던 담요를 풀고 외투를 벗고.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아직 산책의 여운에 잠겨있는 듯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할아버지들을 향해 태양이 물었다.
“춥진 않으셨어요?”
“시원했지. 춥기는.”
대답을 들으며 할아버지들 손을 만져보며 너무 차진 않은지 한 번씩 체크해 본다.
“혹시 몸이 으슬으슬 춥다거나 그러면 꼭 간호사한테 말씀하셔야 해요. 아셨죠?”
“알았네.”
잔소리라고 생각할 만도 하지만, 자신들의 건강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좋은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야기를 나누고 안마를 해드리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그래. 잊지 않고 늙은이들 보러 와줘서 고마웠네.”
“잊기는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럴 일 없습니다.”
“맞아요. 또 올게요.”
이별은 언제나 아쉬운 법. 김문복과 박영길은 최대한 아쉬움을 드러내지 않으려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늘 고마웠어요.”
“조심히들 가거라.”
“네. 다음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요.”
“그럼 갈게요.”
등을 돌리는 두 사람의 뒤로 닿은 김문복과 박영길의 따뜻한 시선은 문이 닫힐 때까지 떨어질 줄 몰랐다.
***
병원을 나와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
“아, 이제 너랑 나랑 다른 지하철 타네?”
“그러게. 학교 가는 시간도 더 길어졌어. 더 좋은 집으로 간 건 좋은데 이런 건 안 좋네.”
“크큭. 또 노을 씨. 욕심이 과합니다. 하나를 얻었으니 하나를 포기해야지.”
“쳇.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래도 내일 차 받으러 가니까. 등교는 문제없을 것 같아.”
“이야, 드디어 내일이냐?”
“내일 수업 끝나고 받으러 갈 거야. 운전 연습 좀 해야지. 같이 갈래?”
“어딜? 너 운전 연습하는데?”
“어. 내가 너 첫 번째로 태워준다고 했잖아.”
“그게 태워주는 거냐? 그리고 따라가고 싶어도 아르바이트 때문에 안돼.”
“아. 너 요즘 주말에 쉬어서 잠깐 깜박했다.”
“감사하지. 평일로 시간 조정해 주셔서.”
“아르바이트하는 도중에 퀘스트가 발생한 적은 없어?”
“있지. 왜 없겠냐. 그래서 테미한테 최대한 아르바이트 시간 피해서 달라고 말해놨어.
이후로는 정말 긴급한 퀘스트 아니면 잘 안 뜨더라고.”
“그건 다행이네. 나는 너 아르바이트 그만둘 줄 알았어. 아무래도 퀘스트 하는데, 제약이 걸리니까.”
“어.. 나도 고민해 봤는데. 아직 시스템으로 돈을 모으는 단계는 아니니까. 그전까지는 아르바이트해야지 싶어.”
고개를 끄덕인 노을이 답했다.
“그래. 정말 돈이 필요할 때는 정보를 사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어. 포인트 잘 모아두고.”
“그래. 다시 포인트가 한 자릿수가 됐으니 부지런히 모아야겠다.”
“그런데 너 아르바이트 얘기했더니 치킨 당긴다. 저녁은 치킨으로 먹자.”
“어? 그러면 너 집까지 뺑 돌아가는 건데?”
“치킨 앞에서 그게 무슨 소용이야! 자, 가자!”
“참나. 그래. 가자.”
그날 저녁은 치킨과 생맥으로 가볍게 먹고 헤어졌다.
***
다음날. 아침부터 내리는 비로 날씨가 한층 더 쌀쌀해졌다.
수업이 끝나고 태양은 바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매일 함께닭’
딸랑-.
“어, 태양아 어서 와라.”
“안녕하세요. 와 진짜 춥네요. 눈만 오면 완벽한 겨울이에요.”
“비가 와서 더 춥지. 배달 갈 때 장갑 꼭 챙겨 다녀.”
“그럼요. 이 날씨에 맨손으로 오토바이 탔다가는 손이 다 얼 거예요.”
사장님과 가볍게 대화를 나누고 가게 정리를 도왔다.
그때 진동하는 스마트폰.
지이이잉-. 지이이잉-.
“어. 차 찾았냐?”
- 어. 지금 막 키 건네받았어.
캬, 역시! 휠 바꾸길 잘한 것 같아. 진짜 멋지다니까!
전화기 너머 노을의 흥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휴. 그래. 네가 좋으면 됐다. 나중에 후회하면 또 어때. 일단 지금이 만족스러우면 됐지.”
-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크큭.
“이제 운전 연습하러 가냐? 근데 날씨가 이래서.. 괜찮겠어?”
- 어. 사람 없는 곳으로 갈 거야.
“거기가 어딘데?”
- 거기 있잖아. 나 사고 날 뻔했던 곳. 거기 근처에 사람도 없고 공간 넓잖아.
노을의 말을 들으며 태양은 기가 막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미친놈아!”
갑자기 욕을 하는 태양의 모습에 가게 직원들의 시선이 태양에게 향했다. 하지만 태양은 이미 흥분한 상태.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지 못하고 다다다- 잔소리를 내뱉었다.
“거기가 어디라고 거길 가? 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냐? 진짜 너 그때 떨어지면서 머리 다치거나 그런 거 아니지?”
- 뭐 어때. 거기가 그 깡패들 본거지도 아니고. 그냥 폐건물인데.
“하···. 야, 아무리 그래도 나쁜 기억이 있는 장소는 웬만하면 피하지 않냐?”
- 나쁜 기억? 아닌데? 내 뒤를 지켜주는 사람들 속에서 원하던 응징을 할 수 있었잖아.
노을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노을에게는 나쁜 기억이 아닐 수 있겠다 싶었다.
오히려 그 장소는 다른 시간선의 기억을 안고 있는 태양에게 최악의 장소였다.
“그래. 네 말마따나 그 장소는 그놈들에게 이용당한 것뿐. 놈들의 본거지는 아니지.. 그래도 조심해.”
- 알았어. 그런데 거기까지 운전해서 가는 것도 일이야. 가는 동안 운전 연습이 끝나지 않을까 싶기도 해.
“하하. 그래. 그렇기도 하겠다. 그럼 다녀와서 연락해라. 안전운전하고!”
뚝.
전화를 끊고 어쩐지 조용한 가게 안을 돌아보았다. 사장 부부부터 같이 일하는 형과 동생까지 하던 일을 멈추고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크게 흥분했었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사과의 말을 전했다.
“아, 죄송해요. 너무 시끄러웠죠?”
“아니, 아직 손님 없으니까 괜찮아. 그런데 무슨 일 있는 거야? 너 그렇게 큰소리로 욕하는 거 처음 본다.”
사장의 질문에 태양이 멋쩍어하며 대답했다.
“아뇨. 일은 무슨. 노을이 전화였는데. 이놈이 사람 걱정시키는 말을 좀 해서요.”
“하하. 그래 너도 친구랑 있을 때는 욕도 하고 그럴 수 있지.
이야. 태양이의 새로운 모습을 봤네. 하하.”
“그러게요. 태양이 너 평소엔 욕 안 하길래, 보기와는 다르게 바른생활 청년인가 했다. 지금 보니까 평범한 대학생이네.”
같이 배달 일을 하는 형이 장난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태양은 괜히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졌다.
“당연하죠. 저 아직 풋풋한 대학생입니다.”
“에이. 야, 풋풋은 아니지.”
태양으로 인해 한바탕 웃으며 기분 전환을 하고, 가게가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배달을 다녀오고 다시 포장된 봉투를 챙겨 주소를 체크하며 가게를 나서는 태양.
“진마 아파트 309동. 갑니다.”
“그래. 운전 조심해라.”
잠시 비가 그쳤지만 여전히 길은 미끄러웠고. 바람은 매서웠다.
마스크와 장갑으로 최대한 무장을 하고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막 출발하려는데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
[퀘스트 발생!]
이런 데서 자면 입 돌아가요!
하루 종일 내린 비로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 이런 날씨에는 따뜻한 집에서 치킨 뜯으며 좋아하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는 게 최고의 힐링!
하지만 오늘 거래처와 술자리가 있었던 김동진 씨는 최고의 힐링은커녕 최악의 상황에 처해있다. 만취한 채 집으로 가는 도중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잠이 들어버린 것. 그런데 잠이 든 장소가 좋지 못하다. 가로등이 꺼진 인적 드문 골목길에서 주위에 있던 박스까지 끌어와 덮고 있는 바람에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동사로 사망할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 한 가정의 가장인 그를, 기다리는 가족의 품에 돌려보내 주자. 서둘러 경찰에게 인계하라!
성공: 포인트 +2
실패: 48시간 동안 장갑을 껴도 보온 효과를 못 봄.
**
시스템에게 부탁했던 대로 정말 위급한 상황의 퀘스트가 맞았다. 입김이 모락모락 나오는 이런 날씨에 길거리에서 잠이 들다니. 태양의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일하는 중. 어떻게 해야 하나 짧은 고민 끝에 사람 살리는 일을 뒤로 미룰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배달해야 하는 집과 퀘스트에 안내된 장소가 비교적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태양은 다시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사장에게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자신의 잘못이 가게의 잘못이 될 수 있기에 간단하게라도 사정을 말하고 움직여야 했다.
딸랑-.
“사장님, 배달 15분 안에만 가면 되죠?”
“어. 15분. 왜?”
“제가 아까 운전하고 오면서 얼핏 봤는데, 어떤 아저씨가 길거리에서 잠든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찝찝해서 잠깐 확인하고 가려고요.”
태양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에 조금의 거짓을 섞어 사장에게 설명했다.
“뭐? 이 날씨에?”
“네. 제가 본 게 맞는다면 큰일이다 싶어서요. 방향은 진마 아파트 방향이랑 같아서 잠깐 확인하고 가려고요.”
“그래. 가봐. 혹시 늦어질 것 같으면 전화해 주고. 그러면 그때, 손님한테는 내가 전화해서 양해 구할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태양은 대답과 동시에 가게 문을 닫고 나와 오토바이에 올랐다.
부르릉- 부와앙-.
우렁찬 엔진 소리를 울리며 퀘스트 속 언급된 장소로 달려갔다.
“여기 근처인데.”
태양은 여러 갈래로 뻗어있는 골목길을 뛰어다니며 내비게이션 기능을 떠올리고 있었다.
“후.. 내비게이션 기능.. 이럴 때 쓸 수 있으면 진짜 좋을 텐데. 쩝..”
아쉬움에 중얼거리면서도 다리와 눈은 쉬지 않았다. 그렇게 세 번째 골목길을 달리고 있을 때. 골목길 끄트머리에 박스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박스 위로 사람 머리카락이 보였다.
살짝 들춰보고 덜덜 떨며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아저씨를 깨워봤다.
“아저씨. 아저씨! 일어나세요!”
“으음.. 추..워..”
“아저씨 집에 가서 주무셔야죠! 여기서 자면 진짜 큰일 난다니까요!”
아무리 큰 소리로 외치고 거칠게 흔들어 봤자. 아저씨는 춥다고 중얼거릴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면 집으로 돌려보낼까, 했더니.. 안 되겠다.”
더 무언가를 하려는 건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손에 쥔 스마트폰을 들어 112를 눌렀다.
예전엔 경찰이라고 하면 괜히 무서웠는데, 이젠 정말 친근하다, 친근해..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댓글,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