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10점 만점에 10점.

“아! 선물! 잠시만요.”
노을이 현관 앞에 놓여있던 짐을 하나둘 옮겨 왔다.
“뭘 이렇게 사 왔어. 다음부터는 이런 거 사 오지 마. 알았지?”
“네.”
고분고분 대답은 하지만, 다음에는 뭘 사 올지 머릿속이 분주했다. 그런 노을을 꿰뚫어 보고 태양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는 태양이가 아버지 생신 선물이라고 산 거예요.”
노을은 멀뚱히 있는 태양 대신 선물을 강호준에게 건넸다. 옆에 앉은 손경애가 강호준 앞으로 건네진 선물을 가져와 뜯어보았다.
“아니, 돈도 없을 텐데. 뭐 이런 걸 사 왔어.”
“비싼 거 아니야. 그거 살 정도는 벌어.”
“발 마사지기야? 어머. 잘 됐네. 밭일하다 보면 자주 움직일 수밖에 없는데, 이걸로 하루 피로 싹 풀리겠다. 그렇죠, 여보?”
“그래. 고맙다. 잘 쓰마.”
대답은 무뚝뚝했지만, 마사지기를 이리저리 돌리며 구경하는 강호준의 모습에 태양은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태양이가 이것저것 따져보고서 좋은 걸로 고른 거예요. 매일매일 하고 주무세요.”
“그래. 그래야겠네. 고마워 아들.”
태양은 멋쩍은 듯 말을 돌렸다.
“얘도 사 왔어. 엄마 것도 같이.”
“어머. 내 것도? 나는 생일도 아닌데?”
노을이 영양제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꼭 생일에만 선물 드리나요. 별건 아니고요. 두 분 영양제예요.”
“이거 비싼 거 아니야?”
역시 건강에 관심이 많은 부모님은 한눈에 영양제의 가격대를 유추해 냈다.
노을은 가격을 알면 부담스러워하실까 염려되어 서둘러 답했다.
“아녜요. 안 비싸요.”
“여보. 이거 우리 단톡방에 올라온 그거 맞죠?”
“응. 맞는 거 같은데? 영길이네 부부가 선물 받았다고 자랑했던 거.”
“무슨 단톡방?”
이야기를 듣던 태양이 물었다.
“아빠 대학 동기들 부부 동반 모임 있어. 거기에 아빠 친구 중에 거래처에서 선물 받았다고. 비싸고 좋은 영양제라고 자랑했던 적이 있거든. 근데 이게 그거 같아서.”
“그거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노을이가 엄마 아빠 건강 생각해서 사 온 거니까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 잘 챙겨 드셔.”
“그래. 아들이 사준 건데 내가 너무 가격을 신경 썼다. 미안해 아들.”
“아녜요. 태양이랑 저랑 영양제에 대해서 잘 몰라서 직원이 추천해 준 거로 샀어요. 가장 인기 좋은 제품이라고 하니까. 이것도 매일매일! 챙겨 드세요.”
“호호. 그래. 매일매일 발 마사지도 하고, 영양제도 챙겨 먹고. 아들들 덕분에 아플 틈이 없겠네.”
“잘 챙겨 먹으마. 고맙다.”
강호준도 보기 드문 미소를 지으며 고마움을 전했다.
노을은 마지막으로 남은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뭐가 또 있어?”
“이건, 태양이가 아버지 드린다고 따로 챙긴 건데요. 한번 뜯어보세요.”
강호준은 아들을 한번 쓱- 바라보고는 종이가방 속에서 박스를 꺼내 보는데, 자신이 즐겨 마시던 양주가 들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태양에게 시선을 옮겼다.
“예전에는 집에 많이 있었잖아요. 다시 하나씩 채워가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리고···.”
원래의 시간선에서 강호준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는 태양.
“.. 다음에 올 때는 소주 사 올게요. 같이 마셔요.”
아버지와 마주보기 위해 냈던 용기를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
“같이 한잔하기에도 소주보다는 이게 나을 것 같아서. 나나 노을이가 올 때··· 같이 한 잔씩 마시자고요.”
아들에게서 처음 들어보는 말.
강호준과 손경애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손경애는 환한 미소를. 강호준은 옅은 미소를 띠었다.
“당신 좋겠네. 그렇게 아들이랑 한잔하고 싶어 하더니. 오늘 저녁에 한잔하면 되겠네.”
“그래. 안주 적당한 걸로 준비해 봐.”
부모님의 대화를 듣던 태양이 끼어들며 말했다.
“새로 할 거 없어. 음식 많이 남았던데 그걸로 대충 먹으면 되지.”
“얘는. 양주 안주에 그게 어울리니?
이따가 앞에 슈퍼 가서 과자 좀 사 와야겠다. 엄마가 왕년에 네 아빠 술상을 어지간히도 봤잖니. 간단하게 먹을 거 만들어 줄게. 집에 있던 과일이랑 너희가 사 온 과일도 있고. 안주는 금방 만들어.”
손경애는 서먹하기만 하던 부자지간이 드디어 전환점을 맞이한 것 같아 기쁜 마음에 이미 머릿속으로 안주상을 어떻게 할지 다 구상을 마친 상태였다.
“어머니, 장 보실 거 더 있으시면 저랑 차 타고 같이 읍내 가요.”
“읍내에? 운전하려면 피곤하지 않겠어?”
“에이. 피곤하긴요. 멀쩡합니다.”
읍내라는 말에 반응하는 걸로 보아 ‘어머니가 읍내에 가고 싶으신가 보다.’ 파악이 끝난 노을과 태양은 읍내 구경을 나가기로 했다.
“그래. 가자. 노을이는 이 동네 처음이니까 읍내 구경도 하고 좋지.”
“어머. 그러니? 구경 가고 싶어? 사실 오늘 장날이라 구경거리는 많을 거야.”
차 타고 오며 봤던 읍내 풍경을 떠올리고는 노을이 말했다.
“아, 아까 보니까 읍내가 북적북적하더라고요. 장날이라서 그랬구나.”
“시장 가서 군것질도 하고 그러면 되겠다. 당신도 어서 준비해요.”
아들들과 시장에 간다는 사실에 신이 난 손경애는 여전히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는 강호준에게 외출 준비를 재촉했다.
“나도? 난 됐어. 셋이 다녀와.”
“꼭 이런다니까. 모처럼 아들들이랑 나가는데, 당신만 쏙 빠지게요? 너희 아빠가 이런다. 너네도 한마디씩 해.”
“같이 가요, 아버지. 장날이면 꽈배기. 그런 것도 있지 않아요? 막 튀긴 거. 그런 것도 먹고 바람 쐬고 와요.”
“소화도 시킬 겸 걷는 게 좋아요.”
손경애의 전략이 통했다. 아들들이 같이 가자고 말하니 군말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외투를 걸치고 나온다.
그 모습을 본 손경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 짓고는 말했다.
“자, 그럼 가자!”
그 말을 신호로 네 사람은 읍내로 출발했다.
***
노을의 차를 타고 순식간에 도착한 읍내.
“아들, 덕분에 편하게 왔어.”
“제가 있는 동안에는 어디 이동하실 일 있으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호호. 그래. 그래.”
손경애는 매일 혼자 오던 읍내를 가족과 함께 나와 기분이 좋은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양쪽으로 태양과 노을의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데, 강호준은 혼자 뒤에서 따라왔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일행인 줄 전혀 모를 모습이었다.
노을은 뒤를 돌아보고는 혼자 걸어오는 강호준에게 달려가 팔짱을 끼고 함께 돌아왔다.
그렇게 완성된 넷이 나란히 팔짱을 낀 모습. 손경애는 그게 그렇게 흐뭇한지 목소리도 평소보다 한 음 올라가 있었다.
“아들이 이렇게 애교가 많은 줄 처음 알았네. 노을이 같은 아들만 있다면 딸 있는 집이 안 부럽겠어. 그렇죠?”
“큼. 그래.”
“하하. 제가 딸 같은 아들 하죠. 뭐.”
시장 입구부터 사람이 가득했다. 근처의 다른 오일장보다 크게 열리는 탓이었다.
“와. 사람이 진짜 많네요.”
“오일장이 좀 크게 열리거든. 근처 시골에서는 다 여기로 장 보러 오니까 사람이 많을 수밖에. 아들들. 혹시 떨어지면 바로바로 전화해서 다시 합류하자.”
“네. 그것보다 절대 안 떨어질 거예요.”
더욱 힘주어 팔짱을 끼는 노을. 그 모습이 귀여운지 손경애는 크게 웃었다.
“저기 전 파네. 옆에 떡도 있고. 맛 좀 보고 갈래?”
“네. 밥 먹은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조금씩만 먹어요.”
분명 조금씩이라고 그랬건만 노을은 위대했다. 가족들이 한 입 먹을 때 세입을 먹으며 주문한 음식을 다 비워버린 것. 남으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잘 먹는 노을의 모습이 손경애의 눈에는 예쁘게만 보였다.
“잘 먹네. 뭐 좀 더 달라고 할까?”
“아니요. 다른 것도 먹어요. 저 장날에 이렇게 돌아다니는 거 처음이라 너무 신나요!”
“그랬어? 장날엔 볼거리가 많지. 자 이제 돌아다녀 보자.”
구경하러 다니며 도넛, 꽈배기는 물론이고, 주전부리도 잔뜩 사고 말았다. 노을이 입맛을 다시는 모습만 보면 어느새 부모님은 계산하고 그 음식을 장바구니에 넣고 있었다. 그리고 노을은 시장에서 파는 양말이나, 집에서 편하게 입을 조끼 같은 것들을 쇼핑해 부모님에게 선물했다.
넓은 시장을 돌아보며 필요한 것과, 필요 없지만 손이 가는 것들을 사고. 양주 안주에 필요하다는 치즈를 사러 근처에 있는 나름 대형 마트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걸어가다가 다리를 두드리는 손경애의 모습이 노을의 시선에 잡혔다.
“다리 아프세요?”
“오래 걸으니까, 다리가 슬슬 아프네. 집에 가서 태양이가 사 온 마사지기 해야겠다.”
“발은 마사지기에 맡기고 다리랑 어깨는 제가 주물러 드릴게요!”
“호호. 정말? 아들 안마 솜씨 좀 봐야겠네.”
“네, 기대하셔도 좋아요.”
걸어가며 노을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생각하느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번뜩! 생각이 나서 태양을 툭툭- 건드리며 걸음을 늦췄다.
“빨리 안 따라오면 놓친다.”
아이들이 뒤처지자, 손경애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 금방 따라갈게요.”
둘이 뭔가 할 얘기가 있나 보다 싶어 다시 걸음을 옮기는 부모님.
걸어가는 부모님을 바라보다가 노을이 말했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너 상점에서 살 수 있는 물약. 그거 부모님께 드리는 게 어때?”
“물약을?”
“그래. 체력 회복이잖아. 아픈 사람이 아니더라도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체력이 떨어지니까. 부모님이 드셔도 건강에 도움이 될 거야. ”
노을의 말에 망치를 맞은 듯 큰 깨달음을 얻은 태양이 입을 열었다.
“맞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이 바보! 당연히 도움이 되겠지. 이야. 또 노을. 한 건 했네?”
“이제 내 부모님이기도 하거든? 나도 오래오래 부모님 뵙고 싶어.”
“그래. 네 덕분에 우리는 부모님과 오래오래··· 함께 하게 될 거야.”
이야기가 마무리되어 갈 때, 앞에서 걷던 손경애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안 오고들 뭐해?”
“가요!”
태양을 두고 노을이 달려가 손경애의 팔짱을 꼈다.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던 태양도 미소 지으며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
읍내 구경을 마치고 돌아온 집.
노을의 말을 기억하고 있던 태양은 바로 주방으로 가 물 잔을 두 개 꺼내 물을 따랐다.
그리고 부르는 시스템.
“시스템! 테미야. 상점 창 띄워줘.”
여전히 두 개의 물품뿐인 상점. 도대체 다음 단계는 언제쯤 열리려나 잠시 생각하다가, 시스템에게 말했다.
“테미야, 최하급 체력 물약 하나 줘.”
손 위에 나타난 물약. 뚜껑을 열어 물 잔에 반씩 따랐다. 물 잔 두 개를 들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아 있는 부모님께 드리는 태양.
“물 한 잔씩 드세요.”
“고마워, 아들. 안 그래도 목말랐는데.”
두 분의 목을 타고 넘어가는 물약. 혹시라도 무슨 변화가 나타날까, 태양과 노을은 물을 마시는 부모님을 집중해서 바라봤다.
“아, 시원하다. 갈증이 싹 가시네.”
아주 작은 변화라도 보였던 할아버지들과는 다르게 부모님에게서는 변화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았을 뿐, 분명 건강에 도움이 됐으리라.
“다리 아프다고 하셨잖아요. 발 마사지기 지금 써보실래요?”
“아빠 선물인데 내가 개시해도 되려나?”
“둘이 같이 쓰라고 사줬지. 뭐 나만 쓰라고 사 왔겠어? 어서 해봐.”
손경애가 욕실에 들러 발을 깨끗하게 씻고 나오는 사이 노을이 마사지기를 세팅해 놓았다.
“여기에 발을 넣으시고요.”
매장에서 들었던 설명을 되새기고 사용 설명서도 확인해 가며 마사지기 사용을 돕는 노을.
“이제 작동시킬게요.”
동작 버튼을 누르자 손경애는 움직이는 기계에 신기해하며 감상을 말한다.
“이름만 발 마사지기고 종아리까지 마사지가 되니까 너무 좋다. 너무 세지도 않고 시원해.”
평점을 줄 수 있다면 고민도 하지 않고 10점 만점에 10점을 줄 것 같은 후기였다.
노을이 일어나 손경애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어깨도 같이 마사지 받으시면 더 시원하시겠죠?”
“아이고. 시원하다. 마사지기보다 아들이 해주는 안마가 더 시원하네. 호호.”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댓글,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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