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애프터 1000 기능 오픈.

손경애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집 안.
강호준은 안마 받는 손경애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말은 안 했지만 자신 때문에 시골에 와서 고생만 하는 게 늘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다.
태양은 그런 강호준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와 엄마한테 미안한 마음을 갖고 계셨다는 건 알 것 같아. 느리더라도 한 걸음씩 다가가 보자. 그러다 보면 아빠를 이해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
망설임 끝에 강호준을 향해 말을 건네는 태양.
“어디 아픈 데는 없으세요?”
예상 못 했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강호준은 잠시 대답을 못 하고 태양을 바라만 보았다. 태양의 목소리에 묻어 있는 건 자신의 건강에 대한 염려였다.
“큼큼. 그래. 아주 건강하다.”
오랜만에 이어지는 부자간의 대화에 손경애는 숨을 죽이며 귀를 기울였다.
“건강은 무슨. 딱 보기에도 지난번보다 마르셨어요. 간단한 운동이라도 하세요.”
“밭일하는 게 운동이지 뭐···.
큼. 알았다.”
핑계를 대려다가 태양의 눈빛에 그러겠노라. 약속한다.
“안마··· 좀 해드려요?”
“됐어. 네 엄마 다 끝나면 마사지기만 좀 해보지 뭘.”
모처럼의 제안을 사양하자, 노을과 손경애가 끼어든다.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러냐. 빨리해 드려.”
“당신 여기저기 쑤신다면서. 아들이 안마해 준다는데 그냥 받아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노을의 말에 슬금슬금 강호준의 등 뒤로 이동하는 태양. 그런 태양의 움직임을 못 본척하는 강호준.
두 사람의 어색한 모습에 손경애와 노을은 속닥거리며 웃음 지었다.
“어쩜 둘이 저렇게 똑같은지.”
“태양이 성격이 아버지를 닮았네요.”
“날 닮았으면 저렇게 어색해질 일도 없었을 거야.”
“앞으로는 점점 좋아질 거예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대화가 다 들렸지만, 태양은 아무것도 안 들리는 것처럼 강호준의 등 뒤로 가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작고 왜소해진 이 등이 넓게만 보였던 적이 있었다. 태양은 복잡해지는 감정을 속으로 삼키며 묵묵히 손을 움직였다.
잠시 후, 마사지기의 작동이 멈추고. 손경애는 노을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덕분에 몸이 가벼워진 것 같네. 고마워 아들.”
“다음에 또 해드릴게요.”
“정말? 호호. 알았어. 기대하고 있을게. 당신, 이거 해봐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뻐근하던 발이랑 다리가 아주 편해졌어.”
아직 안마 중인 태양에게 강호준이 말했다.
“이제 됐다. 시원하네. 고맙다.”
“당신 가서 발 씻고 와요.”
“아니, 나중에 해도 되는데.”
“아들이 사 온 건데 바로 써봐야지. 저녁에는 애들이랑 술도 한잔한다면서. 지금 해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뭐라 반박할 말이 없는지 강호준은 헛기침을 하며 일어서서 욕실로 들어갔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며 티브이를 보고 있는 태양과 노을에게 미안한 듯 말을 걸어오는 손경애.
“시골이라 심심하지?”
“아니요. 이게 쉬는 거죠.”
“동네 한 바퀴 돌아볼래?”
태양이 노을에게 제안하고. 옆에서 손경애가 거들었다.
“그래. 볼 거는 없지만, 그래도 시골만의 정취라는 게 있으니까. 한 바퀴 돌아보고 오는 것도 괜찮겠네.”
“그럼, 아버지 나오시면 마사지기만 켜드리고 갈게요.”
“아까 하는 거 봐서 나도 할 줄 알아. 여기 설명서에도 자세히 쓰여 있던데. 신경 쓰지 말고 나갔다 와.”
“그래. 가자.”
태양이 외투를 챙기며 현관으로 향하자, 노을도 뒤를 따랐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다녀와.”
손경애의 배웅을 받으며 집 밖으로 나섰다.
“생각해 보니까. ‘다녀오겠습니다’,‘다녀와’라는 인사를 정말 오랜만에 들은 것 같아.”
“그래?”
“보통 집을 나설 때 하는 말이잖아. 집에는 당연히 나 혼자 있으니 들을 일이 없었고. 보육원에 살 때도 다녀오겠다는 말은 자주 했는데, 잘 다녀오라는 말은··· 들은 적이 없네. 지금 생각해 보면 재성이한테는 해줬으면서 나한테는 해준 적이 없었어,”
“참나, 인사로도 차별을 했단 말이야? 그런 사람이 어떻게 보육원 원장을 하고 있었던 건지. 생각할수록 미스터리다.”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는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한 건지···. 에이. 이제는 굳이 궁금하지도 않다.”
“그래. 중요한 거는! 이제는 네 인사에 제대로 된 답을 들려줄 사람이 생겼다는 거지.”
“하하. 맞아. 그래서 기분이 너무 좋아! 앞으로 아버지, 어머니 뵈러 자주 오자.”
“나 시간 안 되면 너 혼자라도 다녀가. 두 분만 계셔서 적적하실 텐데 너 오면 좋아하실 거야.”
“좋았어! 차 뽑은 보람이 있구나.”
“크큭. 보람이 여기 왔다 갔다 하는 거냐?”
“그럼! 차고 넘치지!
솔직히. 돈도 있겠다 남들 다 있는 차, 나도 한대 뽑아보자. 하고 지름신이 강림한 거였는데. 잘 뽑은 것 같아.”
한껏 들뜬 상태라는 것이 표정과 목소리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덩달아 태양까지 기분이 좋아지며 미소를 짓는데,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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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1000 기능 오픈.
퀘스트 수행 이후, 천 일 동안. 당사자들의 행복지수가 늘어나면 한 달에 한 번씩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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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애프터 1000 기능?”
“그게 뭐야?”
“지금 막 창이 떴는데. 기능이 하나 오픈됐데. 설명에 쓰여 있는 건···.”
태양은 시스템 창에 떠 있는 글을 그대로 읽어주었다.
“그러니까, 이미 끝난 퀘스트의 대상자들이 퀘스트 이후로 행복을 느낀다면 포인트를 주겠다는 거지? 천 일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이야. 포인트 수급처가 하나 생긴 거네.”
“이런 알짜배기 기능이 숨겨져 있었네? 안 그래도 포인트 쓸 일은 많은데 쌓이는 게 더뎌서 막막하던 참이었는데.”
두 사람은 새로 오픈된 시스템의 기능에 관해 이야기하며 동네를 돌아다녔다.
“동네가 참 조용하다.”
“아무래도 시골이니까. 인구도 적고, 주민들 연령대도 높은 편이지. 대신 조용히 쉴 곳이 필요할 땐 여기가 제격이고.”
“응. 조용해서 마음에 드네. 너나 나나 시끄러운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잖아.”
“전에는 여기서 엄마가 고생한다는 생각에 이곳이 그저 싫기만 했는데. 이젠 장점은 장점으로 보이기 시작했어.”
“네 걱정보다 어머니는 여기서 잘 지내시는 것 같아. 집에서도 편안해 보이시고, 동네 사람들이랑도 많이 친해지신 것 같고.”
읍내에서 동네 사람을 마주쳤을 때, 밝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손경애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러게. 그동안 내가 너무 색안경을 끼고 있었나 봐. 서울에서 살던 엄마는 시골에서 사는 게 힘들 거다. 말은 안 하시지만 서울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을 거다. 하면서.”
“그게 아닌 걸 이제는 알겠지?”
“.. 어.”
“그런데 서울로 오시는 건 나도 찬성이야. 가까우면 더 자주 뵐 수 있으니까. 아버지, 어머니도 좋다고 하면 서울로 모시자. 여기는 별장처럼 다니면서 힐링이 필요할 때 쉬러 오는 거야. 어때?”
“그래. 돈 좀 벌면 설득해 보자.”
부모님 이야기로 시작해서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까지. 대화를 주고받으며 걷고 있는데, 앞에서 할머니 한 분이 다급하게 집에서 뛰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태양의 눈앞에 떠오르는 퀘스트 창.
**
[퀘스트 발생!]
두 생명을 구하라!
아직 출산 예정일이 남아 걱정 없이 시골에 방문한 한 임산부가 있다. 하지만 갑자기 양수가 터지며 응급 상황 발생!
아기 아빠는 차를 타고 볼일을 보러 나간 지금. 산모를 병원까지 데려갈 차를 구하기 위해 옆집에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옆집은 비어있는 상황. 지체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산모와 아기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 산모를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 두 생명을 구하자.
성공: 포인트 +7
실패: 한 달간, 마을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미움받음.
**
태양이 퀘스트 창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노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으신 것 같은데?”
“어, 도와드려야 할 것 같아. 특히 네 차가 필요해.”
“차?”
“퀘스트 떴어. 설명은 나중에. 가자.”
발을 동동거리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태양.
“괜찮으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옆집 대문 앞에서 머리가 새하얘진 할머니는 말을 걸어오는 청년의 팔을 덥석 잡았다.
“우리 며늘애가 지금 애가 나올 것 같아요. 얼른 병원에 가야 하는데 아들이 차를 갖고 아침에 나갔어. 옆집에 부탁하려고 했는데 집에 사람이 없나 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눈앞의 청년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 사정을 줄줄이 털어놓았다.
“읍내에 있는 병원으로 가면 되나요?”
“옆에 보섬시로 가야 해요.”
급박한 상황에 이야기를 하고 있는 시간도 아까웠던 노을이 등을 돌리며 태양에게 말했다.
“내가 이리로 차 끌고 올 테니까. 산모 조심히 데리고 나와.”
“알았어.
산모는 집 앞에 있는 거죠?”
“네. 집에 있어요. 지금 데리고 나올까요?”
“네, 차 금방 올 겁니다. 괜찮으시면 데리고 나오는 거 도와드릴게요.”
“이쪽이에요.”
태양이 할머니의 안내를 받아 집 안으로 들어설 때, 노을은 집에 들러 빠르고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아무 말 없이 차 끌고 사라지면 걱정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엄마! 요 앞에 시냇물 따라서 가다 보면 나오는 파란 대문 집 며느리가 지금 애가 나올 것 같데요. 근데 차가 없어서 병원까지 데려다줘야 해요. 보섬시까지 좀 다녀올게요!”
달칵.
빠르게 닫히는 문.
“뭐? 누가 애가 나와?”
노을도 마음이 급했기 때문에 손경애의 질문을 들을 새도 없이 바로 차를 향해 달렸다. 자신이 처음으로 손경애에게 그렇게 벼리고 있던 ‘엄마’라고 말한 것도 깨닫지 못한 채였다.
“여보. 지금 노을이가 엄마라고 한 거죠?”
“허허. 그랬어.”
“호호. 정말 아들이 한 명 더 생겼네요.”
“큼. 나도 아직은 아빠 소리 듣고 싶은데··· 태양이 이 녀석도 아버지라고 하니···.”
행복하게 웃고 있는 손경애 옆에서 부러움에 투덜거림이 멈추지 않는 강호준이었다.
부르릉.
노을이 차를 몰고 할머니를 만났던 집 근처까지 도착하고 보니 태양과 할머니가 양쪽에서 두꺼운 외투를 걸친 임산부를 부축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임산부는 불안함에 표정이 많이 어두워 보였다.
탁-.
차에서 내린 노을이 뒷좌석 문을 열고 임산부를 태우는 걸 도왔다.
“조심조심. 다 괜찮을 겁니다. 마음 편히 가지고 계세요.”
할머니는 며느리 옆에. 태양은 조수석에. 모두 착석하자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차 안에서는 며느리에게 말을 걸며 다독여 주는 할머니의 목소리와 긍정의 말을 내뱉으며 좋은 기운만 주려 노력하는 두 청년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때, 울려 퍼지는 구수한 노랫가락. 할머니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이놈아! 지금 애 나온다, 애 나와!”
“갑자기 양수가 터졌어. 지금 병원으로 가는 중이야. 너도 빨리 와.”
아들에게 빨리 병원으로 오라며 다그치고 있는데, 어렴풋이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에 긴장이 풀린 것인지 산모가 눈물을 흘리며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 나 무서워. 빨리 와.”
며느리의 목소리에 스마트폰을 며느리 귀에 대주는 시어머니.
“옆에 있었어야지. 어딜 간 거야.”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웠다는 걸 알지만 야속한 마음에 남편을 탓하는 말이 나와버렸다.
“응. 응. 그런데 아직 예정일 남았는데. 아기 잘못된 거 아니겠지? 우리 아기 어떡해···.”
“.. 맞아. 난 엄마야. 안 울고 씩씩하게 우리 아기 만날 거야.”
역시 남편의 말은 힘이 되는지 금세 눈물을 그치고 아기를 위해 힘을 내겠다며 다짐하는 임산부.
노을은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통화 소리를 들으며 안전하게 그리고 규정 속도를 칼같이 지키는 선에서 최대한 속도를 내며 병원을 향해 달렸다. 태양도 초조한 마음에 자꾸 내비게이션의 남은 거리와 남은 시간에 초 단위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후···. 도착까지 앞으로 30분!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댓글,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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