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한국에서, 만남들 (3)

21 한국에서, 만남들 (3)
강릉에 도착한 유진은 먼저 가족들이 있는 추모원을 찾아 자신의 귀국을 알렸다.
"지난해도 잘 보냈어요. 올해도 건강하게 잘 있을 게요. 거기서도 잘들 계셔야 해요."
유진은 추모원에서 처음으로 웃으며 납골함이 들어 있는 창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바로 김 변호사의 사무실을 찾았다.
김 변호사는 유진을 환영하였다.
"진아. 내가 프랑스 배구를 열심히 찾아보고 있다. 내가 보기에 네가 제일 잘하는 것 같아."
몇 마디 덕담이 오간 후 유진은 본론을 꺼냈다.
"왜. 갑자기 서두르는 걸까요?"
"요즘 유진산업 상황은 알고 있지?"
작년 이맘때 방문 이후 계속 김 변호사와 진행 상황들에 대해 이메일로 주고 받고 있었다.
"네. 김 변호사님께서 보내주신 자료도 읽었고 그 동안 제가 찾아본 영상이나 자료도 많아요."
3년 전부터 유진산업은 다시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유진의 아버지 유명훈 사장이 회사에서 제일 신경 쓴 부분이 제품의 품질이었다.
유진산업의 제품 품질은 타제품들에 비해 뛰어나 몇 년 지나지 않아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었다.
더불어 회사 내의 신제품 개발과 재료, 생산 관리 또한 신경을 많이 써 많은 자금을 들여 관리 시스템을 구축했었다.
최근 몇 년 사이 SNS와 유튜브를 통해 식품 산업들의 불결한 재료와 비위생적인 생산 공정들이 많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음식을 발로 만들거나 제품에 쥐가 돌아다니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방송을 탔다.
사람들이 음식에 대한 불안함이 그에 고조되었을 때.
한 유튜브 영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제작자는 유진산업의 한 생산직 사원으로 개인 방송을 위해 제품의 생산 과정을 몰래 촬영하여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렸다.
'이 영상은 조작된 영상이다. 아니다 실제 생산과정이다.'라는 진짜 가짜 이슈와 함께 곧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였다.
곧 방송국의 [이슈, 실화 탐사]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유진산업으로 방문하게 되었고,
공장 내부를 보고 놀란 MC가 유명한 멘트를 남겼다.
"이곳에서 만드는 것이 어묵인가요? 아니면 반도체인가요?"
이 말은 "이곳에서 만드는 것이 XXX인가요? 아니면 YYY인가요?"라는 여러 형태의 밈으로 SNS에 퍼졌다.
밈이 퍼질수록 상대적으로 유진산업의 위생 상태가 계속 비교되며 국민에게 가장 안전한 먹거리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
매출이 급격하게 늘어나 얼마 전에는 관련 상품의 시장점유율 1위를 찍었다.
또 이전에 개발했던 제품이 이런 영향에 힘입어 역주행해 국민 간식으로 등극하였고.
그동안 꾸준히 개발했던 다양한 제품들이 미국과 유럽, 러시아의 판매에 성공함으로써 매출액 기준 수조 단위의 종합식품 기업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유명훈 사장의 회사 경영 방침이 본인이 죽은 후 수년이 지나 빛을 발한 경우였다.
"최근 Z 은행 상태가 좋지 않아."
"몇 년 사이에 자원 개발 관련 프로젝트 파이낸싱에서 대출금 회수에 실패한 경우가 제법 많고 금액도 상당해."
"그래서 유진산업을 매각해서 자금을 마련하려는 것 같구나."
Z 은행은 자신들이 관리 중인 유진산업을 최고 가격에 매각할 계획을 세웠지만 이 매각 계획의 최대 걸림돌이 바로 유씨 집안과의 오랜 소송이었다.
Z 은행은 소송을 빨리 마무리 하기 위해 재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당시 대출 회수가 유진산업의 방만한 기업경영과 극심한 매출 감소가 원인으로,
'은행의 대출 회수는 이런 기업의 위험에 대하여 적극적인 방어를 한 것이다'라고 재판부에 피력하고 관련 자료들을 다시 제출하고 있었다.
유진이 보기에는 벌써 8년째 이어진 긴 소송 기간은 김 변호사팀과 관계자들 모두를 지치게 만들었다.
이들에게서 새로운 돌파구를 기대하기에는 무리인 것 같았다.
그 동안의 메일로 본 리포트와 오늘 김 변호사에게 들은 새로운 사실들에 대해 유진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너무 빨라. 시간이 더 필요해. 김 변호사님이 맥시멈 얼마나 끌어 주실 수 있을까?'
'지금까지 모은 자료들이 시간을 끄는 데 도움이 될까?'
"김 변호사님. 이 자료를 한번 봐주시겠어요."
유진이 가방에서 한 묶음의 문서를 꺼내 김 변호사에게 내밀었다.
"최근에 확보한 자료인데 Z 은행에서 유진산업의 대출을 담당했던 조 이사의 9년 전 행적이에요."
김 변호사는 문서를 받아 들고 서너 장을 넘겨보다 놀라 다시 물었다.
"라스베거스?, 마카오? 이런 자료를 어디에서 찾았니? 따로 조사를 하고 있었어?"
"네. 조사는 할아버지 때부터. 보시면 당시에 1년에 5, 6회 정도로 라스베거스나 마카오를 방문했어요."
"도박했다는 말이구나. 음! 개인 일탈이라고 주장할 것 같은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4년간은 가지 않았어요. 5년 전부터 다시 그쪽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그때면 조 이사가 유진산업 관리 이사로 자리를 옮긴 때인것 같은데 맞니?"
"네. 유진산업의 자금 횡령에 관여한 게 아마 도박 자금이 필요해서 그러지 않았나 예상돼요."
"은행 관리 이사의 횡령과 해외 도박이면 도움은 될 것 같긴 한데. 9년 전 당시의 상황과 연결되지 않으면 대세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 같지는 않구나."
"그때 도박자금의 규모와 어디서 자금을 구했는지 지금 알아보고 있어요."
"그래!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네. 이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가고 있어요. 시간이 필요해요."
'그리고 사람이 필요해요.' 유진은 나오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김 변호사는 죽은 유명훈을 알고 지낸 지는 30년이 넘었다.
한번 보고 들은 것은 거의 기억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고 사물에 대한 이치나 근본을 단번에 캐치해 낼 정도로 영리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사람이 좋아 주위 사람을 잘 믿었다.
강릉수산과 유진산업의 자문 변호사로서 옆에서 그러지 말라고 많이 충고하였다.
유명훈은 제품 개발을 하거나 재료나 생산 관리에는 아주 유능했지만, 사업가로써 냉정하지 못한 면이 많았다.
'차라리 유창석 사장님을 많이 닮았으면 그렇게 가지 않았을 텐데.
그런 면에서 진이 훨씬 유창석 사장님을 많이 닮았지.'
유씨 집안과 오랜 연을 맺고 있어 앞에 앉아 깊은 고민에 빠진 유진을, 아장아장 걷던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자라면서 가끔 주위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똑똑하고 영리했다.
“변호사님 우리는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해요. 이제까지 Z 은행에서 시간을 끌었다면 이제 우리가 시간을 끌어야 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회사 매각을 지연시켜 주세요.“
“필요하면 변호인단을 더 꾸려서라도. 그리고 가능한 우리 쪽에서 아무런 방법이 없어 시간을 계속 끄는 것처럼 보여주세요."
말하는 유진의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김 변호사의 눈을 보고 있었다.
김 변호사는 자신을 또렷하게 보며 말하는 유진을 보며 속으로 ‘유진. 네가 뭔가 방법을 찾았구나.’라고 생각했다.
예전의 어린 유진도 이렇게 상대방을 또렷하게 쳐다보며 어른들이 놀랄만한 말들을 했었다.
"진아. 알겠다. 이 자료들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2년 가까이 끌어 볼 테니, 좀 더 확실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물론 우리도 찾겠지만."
"네. 알겠어요."
그 후로 어떤 방법을 써야 할지, 그리고 향후 방향성에 대해 김 변호사와 유진은 오랫동안 의논했다.
유진은 2일간 김 변호사팀과의 미팅을 가지며 속으로 ‘이건 정말 파리팀과 경기하는 것보다 더 지친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진은 하루 여유를 가지며 옷가지와 음식을 챙겼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기 예보를 확인하고는,
"오늘 같은 좋은날은 바다에 나가는 것도 좋겠어요. 할아버지."
그리고 배낭을 메고 호텔을 나와 민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강릉항으로 향했다.
"어떠냐? 준비는 다 됐니?"
"네. 이제 이 보트는 다시 우리 것이에요."
유진은 민 할아버지에게 보트의 대금을 지불하고 모든 서류를 받았다.
"민 할아버지. 아직 제가 보트를 구매는 하였지만 프랑스에서 계속 배구 해야 하잖아요. 또 보트 관리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유진은 언제가 될는지 모르지만, 이 보트를 항해해 니스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꾸나. 나야 이제 시간이 많으니."
민태수는 자신은 아직 팔팔하다고 보트를 충분히 관리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민태수는 얼마 전 유진이 재기해서 프랑스에서 유명한 배구선수가 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보물은 보물이구먼. 형님은 죽어서도 좋겠소. 저런 손주를 남겨 두었으니."
항상 유진을 자신의 보물이라고 말했던 고인이 된 유창석 씨를 생각해 강릉에서라도 힘껏 유진을 도와줄 생각이었다
"기름은 충분하고, 돛은 나가서 바로 펴보면 되고, 청수는 지금 보충하고, .. 보트 상태는 조금 몰아보면 알 테니 됐고,"
민태수는 갑자기 출항 준비를 위해 보트를 체크하는 유진을 보며 물었다.
"어디를 가려고?"
"기상 상태도 좋으니, 울릉도에 잠시 다녀올게요. 예전에 할아버지와 몇 번 갔었어요. 지금이 10시. 충분히 20시간 잡고 내일 6시에서 8시 사이에 저동항에 도착해서 연락드릴게요."
"그래. 보트 상태는 괜찮을 거야. 체크한지 얼마 안 돼. 지금은 물길도 바람도 괜찮으니, 조심해서 다녀와."
곧이어 떠나는 보트를 보며 민태수는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저 아이는 확실히 형님의 핏줄이 맞는 가 보오. 바다를 저렇게 좋아하니."
유진을 태운 보트는 방파제를 벗어나 메인세일과 집세일 올리며 바람을 타고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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