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의 종교쟁이(1)

나무들 사이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숲속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고즈넉한 숲속, 한 남자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촉촉한 아침 이슬이 나무껍질 사이사이로 스며들며, 싱그러운 풀내음이 사내의 코를 간지럽힌다.
푸르른 녹음에 묻혀 내리쬐는 해를 받으며 반짝이는 백금발 머리카락.
마치 전래동화에 나오는 숲속의 요정이 그려진 명화 속의 한 장면과 같았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앳된 미청년의 발아래에 한 소녀가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다는 것.
소녀는 까만 머리카락과 전신이 땀에 흠뻑 젖은 채 거친 숨소리를 내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백금색 머리칼을 쓸어 넘긴 이안이 담배를 꼬나문 채 중얼거렸다.
“하늘의 분노를 담은 붉은 섬광이여, 태초의 순수한 힘을 청하노니 이 세상을 정화하소서. 메테오.”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새소리만이 흐르는 고요한 숲속에서 이안의 목소리는 크게 들렸다.
이안의 오른손에 끼워진 반지에서 작은 불꽃이 일렁였다.
“하···. 그 이후로 다시 라이터로 돌아오다니···.”
-끌끌끌, 오크 목의 진주 목걸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던전에서 위력적인 파이어볼을 쏘던 메테오반지는 다시 부싯돌로 전락했다.
던전을 나오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다시 마법을 쓸 수 없다.
이안은 용언을 커녕 마법도 부릴 수 없는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 와 있었다.
-차라리 저기 땅바닥에 누워있는 소녀에게 주면 되지 않느냐. 어차피 노예 각인으로 영혼까지 너에게 종속되었는데···.
“내가 이 반지를 어떻게 구했는데. 그리고···.”
이안은 아르바토로메우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쓰게 삼켰다.
‘하루에게 메테오 반지를 주면, 그야말로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다는 격이지.’
테라베인 제국의 여러 왕성과 마을이 그녀에 의해 채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안은 자신이 하루에게 ‘하루’라는 이름을 붙인 감에 감탄했다.
‘엘드라니아 연대기’에서 하루와 대적했던 이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미친년이라고 하였다.
웃으면서 수천의 사람을 칼로 썰어버리는 여자였으니, 미친년이라는 호칭은 타당했다.
이안은 어쩐지 자신의 주변에 미친 놈들만 꼬이는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안은 재수 없는 기운을 털어내며, 제 발아래 쓰러진 하루를 무심하게 쳐다보았다.
“그것보다도 아무래도 한 세트의 개수를 늘려야겠어. 벌써 익숙해졌잖아”
쥐 죽은 듯 누워있던 하루의 신체가 미묘하게 떨렸다.
-이런 마족 같은 해츨링이!! 저 꼴을 보면서도 그런 말을 하느냐?!
“점점, 시간이 짧아지잖아. 해를 봐 아직 오전이라고.”
-어째, 레드 드래곤보다도 더한···. 끄아아악!!
“크흠. 하루, 앞으로 움직여야 하니까. 강도는 이 정도로 유지하자고.”
이안이 쓰러진 하루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더 늘리지는 않겠다는 이안의 말에 하루는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에 슬퍼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훈련받은 개처럼 이안의 손에 손을 올렸다.
매일 동트기 전에 시작된 이안의 ‘기초’ 근육 훈련은, 절묘하게도 딱 하루가 기절하기 직전에 끝났다.
이안은 하루의 손을 잡아 강제로 일으키며, 하루의 손을 감싼 장갑을 보며 말했다.
“그것보다, 장갑을 바꿔야겠는데?”
고된 훈련에 이안이 사주었던 가죽장갑이 너덜너덜해졌다.
하루는 이안의 손에 잡힌 제 손을 빼내어 허리 뒤로 숨기며 거세게 도리질하였다.
마치 자신의 소중한 것을 뺏기기 싫어하는 아이 같았다.
하루는 씻을 때를 제외하고는 항시 끼고 있었다. 잘 때도 끼고 잘 정도였다.
하루가 가죽장갑을 애지중지 여긴다는 사실을 아는 이안이 겸연쩍게 말했다.
“가죽장갑에 냄새날 것 같···.”
“냄새나지 않습니다!!”
-독한 해츨링아, 네가 얼마나 수인 소녀를 갈취했으면, 저런 다 떨어져 가는 싸구려 가죽장갑을 뺏기지 않으려 하잖느냐.
보기 드물게 단호한 하루의 대답에 이안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게 그렇게 부려 먹었으면 진즉에 제대로 된 장비를 줬어야지. 이제껏 준 게 저 장갑밖에 없으니···.
“장비라···.”
이안도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노예 각인에 많은 돈이 들어갔기에 장비를 살 여력이 없었다.
전생에 ‘엘드라니아 연대기’에서 얻은 정보와 현생에 알게 된 지식을 고려해서 눈이 높았기에, 평범한 장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쯤 되면, 정산이 끝났겠지. 하루, 용병 길드로 가자.”
이안의 손짓에 하루가 이안의 뒤를 따랐다.
여전히 손은 등 뒤로 숨기고서.
이안이 뒤돌아 하루를 쳐다보자, 하루가 더욱 손을 뒤로 숨겼다.
이안의 양심이 찔려왔다.
여태껏 돈은 하루가 벌였는데, 정작 그 돈을 쓴 건 자신이었으니.
하루는 ‘엘드라니아 연대기’ 속 네임드로 긁지 않은 복권이다.
비록 미친년, 도살자, 학살자라는 명칭이 따라왔지만.
이안과 하루가 크레토스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하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광장은 사람들로 복작였다.
던전의 소멸로,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몰려온 탓이다.
그중에는 서대륙에서 보기 힘든 동대륙의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저거 수인족들 아니야?”
“너는 눈이 옹이구멍이라, 장님이냐? 저 꼬리와 귀를 봐봐.”
서대륙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수인들의 등장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사람들의 시선에는 호기심도 있었지만, 적대와 경멸 그리고 공포도 섞여 있었다.
서대륙인들에게 수인은 동물도 사람도 아닌 그 중간에 걸친 이상한 존재였다.
자신들이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를 대하는 인간의 무지였다.
그런 시선들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늑대 수인들은 당당히 중앙 광장을 가로질렀다.
선두에서 긴 회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걷고 있는 건장한 수인족 사내에게 다른 수인족 한 명이 속삭였다.
“타오님, 정말 용사 카리온의 파티에 들어갈 생각입니까?”
“그년이 없어지고 나서, 아버지께서 나를 달의 그림자에 넣으려고 하시는데, 그곳에서 이름도 없이 살 바에야 서대륙에서 회색송곳니의 이름을 드높이겠다.”
그 말에 타오의 뒤를 따른던 수인족들 몇몇의 얼굴이 구겨졌다.
타오에게 질문을 했던 수인 남성이 한마디를 덧붙이려고 하자, 다른 이가 그의 옷자락을 잡고서 뒤로 잡아당겼다.
“타오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달의 그림자라고 하여도, 족장님의 아드님이신 타오님을 품기에는 그릇이 너무 작지요.”
경박한 목소리에 이어지는 아첨에 흡족했는지 타오가 피식 웃었다.
“자네, 아무리 그래도 달의 그림자를···.”
하지만 그 말을 듣기 힘들었던 건지, 뒤로 물러난 수인 남성이 무어라 입을 떼려고 하자, 타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남성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곳의 우두머리는 타오였다.
이안은 멀찍이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회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늑대 수인이라, 이 시점에서 등장한 것부터 용사 카리온의 파티 일원인 타오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엘드라니아 연대기’에 몇 되지 않는 수인족 중 가장 출연이 많았던 네임드였다.
타오는 소설 속에 묘사처럼, 그의 펄럭이는 망토속에는 초승달처럼 휘어진 단검 두 자루가 보였다.
이안이 타오에게 집중하고 있을 때, 이안의 곁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루가 이안의 등 뒤에 몸을 숨기고서 제 얼굴을 덮은 망토를 만지면서 나는 소리였다.
하루는 어딘가 숨을 구멍을 찾기라도 하듯, 몸을 비트는 등 안절부절못했다.
이안은 그런 하루를 쳐다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용병길드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한 마디를 툭 뱉었다.
“걱정하지 마. 너는 내 보호 아래에 있어. 너는 내가 보호할 테니까.”
이안의 말에 하루가 이안이 옷자락을 꽉 쥐었다.
이안은 하루가 크레토스 마을 사람들이 수인에 대해 떠드는 소리에 하루가 힘들어한다고 생각하고서 뱉은 말이었다.
그런 이안의 머릿속으로 아르바토로메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흐음, 수인 소녀와 같은 늑대 수인이구나. 아무래도 수인 소녀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털색이 다르니···.
아르바토로메우스의 말에 이안이 머리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이안은 청각이 예민한 하루가 들릴 정도로만 작게 속삭였다.
“하루 너 늑대였어?”
이안의 말에 땅만 쳐다보던 하루의 얼굴을 벌떡 들어 이안을 쳐다보았다.
드래곤은 망각하지 않는다.
이안은 이 표정을 본 적 있다.
이안인 363년 전 광룡에게서 본 표정이었다.
한마디로, 뭐지 이 병신은? 하는 표정.
-···. 너는 그러면 이제껏 수인 소녀가 무슨 수인족이라고 생각했느냐?
어느새 용병길드에 다다른 이안이 길드의 문을 열며 말했다.
“개라고 생각했는데?”
하루의 샛노란 눈동자가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본 이는 아르바토로메우스밖에 없었다.
-해츨링, 너는 정말 못됐다.
아르바토로메우스의 말을 흘려 보내던 이안의 눈앞에, 문 뒤로 거대한 근육질에 사내 둘이 보였다.
이안은 서둘러 문을 닫았다.
“이런···.”
이안은 나오려는 욕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닫히는 문 사이로 반짝이는 대머리의 헤이즐넛 색 눈과 마주쳤다.
이안의 예상대로 굳은살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솥뚜껑만 한 손이 문을 잡았다.
덩치답지 않은 민첩도였다.
“이안군 아닌가? 그리고 그 옆에는···.”
이안을 바라보는 따스한 헤이즐넛 색 눈동자에서는 호감이 뚝뚝 떨어졌다.
이안이 던전 탐색 중 낙오 또는 도망갔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 걸까? 그럴리 없을텐데···.
벨라토르 교단에서 던전으로 파견된 추기경의 위치라면, 지금쯤 이번 던전 공략에 대해 무수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을 터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발라드로스 추기경의 관심은 이안보다는 하루에게로 쏠렸다.
”하루양!! 내 자네를 찾았으나, 그대가 깨어나 곧장 나갔다는 말만 전해 들었지. 자네를 찾을 수가 없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이것이야말로 거룩하신 벨라토르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하루는 깨어남과 동시에 이안의 손에 이끌려 기초 근력 훈련을 하기 위해 외딴 숲속에서 이제껏 두문불출하였다.
덕분에 이제껏 발라드로스 추기경과 마주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안은 자신의 가혹한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저 대머리가 우리 수인 소녀에게 수작질하는 건 아니겠지?
이안은 속으로, 아르바토로메우스가 언제부터 하루를 ‘우리’라는 칭호를 쓰게 된 건지 묻고 싶었다.
매번 하루를 수인 소녀, 수인 소녀라고 하더니. 이제는 우리라···.
그렇다면 그 우리에 이안도 포함된 것인가?
반면 발라드로스의 손에 붙잡힌 하루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발라드로스의 말에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이안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흘렀다.
"하루양! 자네는 위대하신 벨라토르님의 가호를 입어야 할 선택받은 자네!
피로 물든 언데드들의 사체 속에서 피로 물든 자네의 모습은 광전, 아니 전사로서 성스러운 전쟁의 현현이었소!
수많은 언데드들을 난도질하며 저주받은 고블린 왕까지 살육한 자네의 근력, 아니 투지는 그야말로 벨라토르 교단에서 추구하는 광전사, 아니 전사의 귀감 그 자체 아닌가.
전쟁터에 핏빛 죽음의 향연을 벌이는 자네야말로 벨라토르님의 뜻에 가장 적합한 전사네.
자네는 이 세상 만물에 공포와 참혹함을 선사할 인재, 아니 존재야!
자네는 당장 우리 교단에 입교하여 신성한 전쟁과 전투를 치르며, 피의 제단 위에서 검과 방패를 휘둘르며 칼춤, 아니 광란, 아니 이것도 아니지. 어쨋건 자네의 광기는, 벨라토르님 앞에 바쳐질 최고의 찬미가 될 걸세!"
하루가 속사포로 쏟아지는 발라드로스 추기경에 일장연설에 아연실색하며 이안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이안은 웃으며 용병 길드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렇게 하루는 발라드로스 추기경의 손에 붙잡힌 채 한참 동안 이어지는 저에 대한 찬사와 벨라토르 교단의 입교 권유를 들어야 했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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