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창(3)

노르그렌 드워프들의 탐사를 책임지는 호그닐이 거대한 얼음 동굴 앞에 멈췄다.
“이안님, 이곳입니다.”
-흠. 용케도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정도 파냈구나. 드워프는 드워프란 말인가.
아르바토로메우스답지 않은 칭찬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음 동굴 주변은 격전의 흔적을 보여주는 전장과도 같았다.
거대한 바위 조각들이 마치 거인의 장난감처럼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바위마다 선명하게 새겨진 정과 망치의 흔적, 쐐기를 박았던 구멍들이 어지러이 표면 위를 그렸고, 몇몇 바위 조각에는 쐐기들이 박혀 있었다.
여기저기 부서진 도구들과 망치 조각들이 눈 속에 파묻혀 있었고, 얼어붙은 밧줄 조각들이 바위 사이에 얽혀 있다.
그 규모만으로도 작업의 거대함을 짐작게 했다.
“···. 고생 많았네.”
이안의 말 한마디에 드워프들이 고개를 숙였다.
-···. 쟤네 울려고 하는 것이냐?
이안은 어깨를 들썩이는 드워프들을 애써 모른 척하며, 시선을 돌려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얼음 동굴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고드름들이 둘러싸인 동굴의 입구 사이로 냉혹한 한기가 흘러나왔다.
“알바, 이거 보고 연상되는 거 없냐?”
-···. 마치 드래곤의 아가리 같구나.
입구의 가장자리에 늘어선 고드름들은 마치 날카로운 송곳니처럼 빛나며, 얼음으로 뒤덮인 기둥들은 날카로운 이빨처럼 얽혀 있었다.
깊고 어두운 청색의 공간은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숙이 이어져 있었고,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차가운 비명처럼 그의 피부를 할퀴었다.
입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는 그를 강하게 밀쳐냈다.
노르딕의 인생 역작인 방한복을 입었음에도,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안은 손끝이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레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호그닐을 비롯한 드워프들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이안의 뒤를 따랐다.
“내 발로, 드래곤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간다라···.”
이안의 입에서 나오는 하얀 김은 단숨에 얼어붙어 공중에서 얼음 조각으로 흩어졌다.
동굴 속으로 들어갈수록 이안의 부츠는 얼음으로 덮였고, 절뚝이는 발걸음 소리는 얼음벽에 부딪혀 무겁게 울려 퍼졌다.
이안은 잠시 멈춰 섰다.
-아깝군. 그대로 갔으면 결계에 부딪히는 거였는데. 쩝.
입맛을 다시는 아르바토로메우스의 말에 이안의 오른손 중지와 엄지가 움찔거렸지만. 일단 참아낸 이안이 말했다.
“알바 지금, 이 소리 나만 들리는 건가?”
-강한 마나는 느꼈지만, 소리는 듣지 못했다.
이안이 뒤를 돌아보며 드워프들을 보았다.
호그닐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역시 이안님, 결계를 느끼신 거군요!! 안 그래도 저희가 표시한 것이 있어 말씀드릴 참이었습니다”
호그닐의 말에 이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이 녀석이나, 저 녀석들이나 눈앞에 결계가 있다는 걸 말하지 않은 거지.
전자는 의도가 있었고, 후자는 내가 광룡인 줄 아나.
드래곤 레어로 추정되는 곳에 결계라고.
이안은 부글거리는 속을 참으며 말했다.
“그것보다 너희들은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나?”
“예? 무슨 소리 말씀입니까?”
지금도 이안의 귓가에는 동굴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 없는 속삭임이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그 속삭임은 그를 불러들이는 듯, 동시에 밀어냈다.
“아니, 되었다.”
이안은 평온하게 말했지만, 그의 숨은 점점 가빠졌고, 이마에 맺힌 땀이 순식간에 얼어붙어 차가운 이슬처럼 맺혔다.
이안은 다시 한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이곳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 안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견뎌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안은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결계를 마주했다.
결계는 투명하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기운이 그를 압도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이안은 한 발을 내디뎠다.
호그닐이 소리쳤다.
“이안님 그 앞에는 결계가!! 어?!”
그 순간, 결계의 표면이 물결치듯 일렁이며 이안을 맞이했다.
몸을 결계 속으로 밀어 넣자마자 차가운 기운이 사방에서 그를 휘감았다.
마치 얼음 칼날이 그의 피부를 스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겉보기에 이안이 아무런 무리 없이 결계를 통과했다.
이를 본 성질 급한 드워프 한 명이 이안을 뒤따랐다.
쿵!
그는 결계에 부딪힌 제 코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드워프들은 황망한 시선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역시 이안님.”
“드래곤님은 다르시구나.”
“역시 레드 드래곤의 해츨링님!!”
레드 드래곤의 해츨링이라는 말에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치 없는 드워프들은 이안의 시선이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그를 찬양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어떻게 이안이 드래곤의 결계를 통과했는지 그 이유를 아는 아르토로메우스만은 경악하였다.
-이전에도 어렴풋하게 느꼈지만, 해츨링아, 네 마나의 저항력이 더 강해진 것 아니냐?! 어찌 드래곤의 결계를!!
이안은 드워프들이 남겨진 방향을 향해 검지 하나를 결계 너머로 통과시켰다.
통증은 있었으나, 견딜만하다.
아무래도 드래곤이 마나의 품으로 돌아간 시간이 오래되었으니, 결계가 약해진 거겠지.
하지만 찢을 수 있을 정도의 결계는 결코 아니야.
제 몸 하나만 통과시킬 정도. 그게 한계였다.
이안은 손을 거두고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들어가겠다. 너희들은 알아서 자구책을 구해라.”
이안은 다시 얼음 동굴 속으로 향하였다.
주변은 깊고 어두운 청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벽을 따라 형성된 거대한 얼음 결정들이 희미한 빛을 반사했다.
동굴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이 이안을 삼켜갔다.
이안의 등 뒤로 드워프들이 일체된 동작으로 오른 가슴을 두 번 두드린 소리가 메아리쳤다.
-쯔쯔쯔. 정신 나간 드워프들인지고. 이제 걸핏하면 가슴을 치는구나. 그 의미가 가볍지 않은데···.
아르바토로메우스의 말을 무시하고 이안은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오른발의 힘이 없어 지팡이에 의존해야 하는 이안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동굴바닥의 얼음이 그의 오른 부츠에 달라붙어 더욱 절뚝일 수밖에 없었다.
동굴 안쪽으로 갈수록 한기는 점차 강해졌다.
마치 작은 칼날들이 그의 피부를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이안의 얼굴 주위로는 서리가 내려앉았다.
동굴 깊숙이 들어갈수록 한기는 점차 더 강해져 노르딕의 인생 역작 방한복은 이제 거의 쓸모가 없었다.
두꺼운 옷을 꿰뚫고 들어오는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어왔다.
동굴의 기운은 점점 더 사나워져 이안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얼음 위에 서리가 더 두껍게 쌓였고, 절뚝일 때마다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동굴 벽을 따라 울려 퍼졌다.
공기는 점점 더 차가워져 호흡조차 어려워졌다.
그의 눈썹과 속눈썹은 완전히 얼어붙었고, 그의 뺨에는 얼음 결정들이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그의 몸은 점차 더 무거워졌고, 그럴 때마다 동굴의 심연 속에서 흘러나오는 불길한 속삭임이 그의 귀에 파고들었다.
오랜 침묵을 깨고 이안이 입을 열었다.
“알바. 아까 드래곤의 결계라고 했지?”
-이곳이 드래곤의 레어인 줄 알지 않았느냐. 그러면 그 결계가 무엇이겠느냐.
시린 어둠 속 이안의 오른손 팔찌에 붉은빛이 반짝였다.
-크흠. 해츨링 네가 알아서 잘만 멈추어 놓고서는 무슨···. 어허, 얼른 그 오른손에 힘 풀 거라.
떨리는 아르바토로메우스의 목소리에도 이안은 몸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알바,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나? 현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드래곤의 복수는 어떨까?”
-···. 아니, 드워프들의 보고로 결계가 단순 차단마법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너에게 큰 위협은 되지 않는다고···.
“오늘따라, 우리 알바가 혀가 기네.”
이안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걸로 때리면 망가진다! 고통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그러니 어서 주먹을···.
[너는 누구냐.]
마치 천둥이 치듯 동굴의 벽과 천장이 진동하며 떨렸다.
벽면을 따라 늘어선 고드름들이 서로 부딪치며 부서져 내렸고, 얼음 결정들이 반짝이며 떨어졌다.
-이럴 리 없다. 어떻게 여기에 드래곤이?!!
아르바토로메우스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나 말이다. 어떻게 드래곤이 있을 수 있을까.’
이안은 차마 말할 수 없는 욕들을 씹어 삼켰다.
이안이 상상했던, 절대 일어날 리 없다고 믿은 최악의 시나리오
-어서 폴리모프를 풀어라!! 그리고 어서 해츨링이라고 말해. 그래야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
아르바토로메우스의 말에도 이안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소리의 진원지에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해츨링은 모든 드래곤들의 보호를 받는다.
결코 이안은 이곳에서 죽지 않을 터.
오히려 저 드래곤의 보호 아래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이안에게 최악은 죽음이 아니다.
광룡이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약한 드래곤이다.
광룡에게서 이안을 보호할 수 있을 리 없다.
아니, 광룡을 이길 수 있는 드래곤이 과연 존재할까.
결국 다시 광룡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과연 도망칠 수 있을까.’
이안이 대답이 없자, 드래곤의 분노를 표현하듯, 그 목소리는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며 동굴을 뒤흔들었다.
[어떻게 이곳에 왔지?]
바닥 아래 얼음층이 흔들리며 균열이 생겼고, 깊은 곳에서부터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이안은 발밑에서 전해지는 진동을 느꼈다.
마치 동굴 전체가 살아있는 생명체인 듯, 그 목소리에 반응하며 요동쳤다.
공기는 무겁게 울렸고, 차가운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어왔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얼음 동굴 속에서 이안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요동치는 드래곤의 분노가 오히려 이안의 머리를 차갑게 식혀주었다.
‘분노한 드래곤, 자신의 레어를 침입한 자. 그런데도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
광룡이었으면 이미 브레스를 한 번 뱉어주고 끝났을 일이었다.
이안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알바, 이거 어쩌면 잭팟인데?”
-지금 뜻 모를 말을 할 상황이 아니다!! 어서 빨리 폴리모프를 풀고 해츨링이라고 말하거라!! 네가 아무리 반푼이라고 해도 해츨링이다!!
아르바토로메우스의 절절한 목소리를 무시하고, 이안은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내달렸다.
그의 발아래서 얼음이 미끄러지며 부서졌고, 그 소리는 동굴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냐!]
드래곤의 분노에 찬 포효가 울려 퍼지자, 얼음 동굴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요동치는 동굴에 거대한 얼음 동굴 벽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천장에서는 거대한 얼음덩어리들이 떨어져 내렸다.
이안은 비처럼 쏟아지는 날카로운 고드름들을 피하며 소리가 들리는 깊숙한 동굴을 향해 달렸다.
[감히 나의 레어를!!]
동굴바닥은 마치 지진이 난 듯 갈라졌고, 얼음 기둥들이 무너지며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고, 그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얼음 결정들이 공중에서 빛나며 회오리치듯 날아다녔고, 차가운 안개가 순식간에 동굴을 가득 채웠고 드래곤의 분노에 맞춰 신음하듯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안의 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동굴의 투명한 얼음벽이 은은한 푸른빛을 내뿜으며 그의 주변을 밝혔고, 그 빛은 마치 또 다른 세계로 그를 안내했다.
동굴의 심연에 다다른 이안이 숨을 고르며 잠시 멈춰 섰다.
그는 얼음벽에 새겨진 고대 드워프들의 문양과 기호들을 눈으로 훑었다.
수천 년의 세월을 거쳐 온 조각들.
벽면을 스치는 이안의 손끝에서 차가운 기운이 퍼져 나갔다.
“알바, 빙고다.”
이안의 눈에는 드래곤본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제단과 그 위에 산처럼 쌓인 고대의 유물들과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희귀한 광석들이 비쳤다.
[동족인가? 동족이라 하더라도 감히 나의 레어에 침범하다니!! 잠시만, 아닌데? 무언가 이상한데···]
-···. 해츨링아 저건···.
산처럼 쌓인 보물에 눈이 돌아갔던 이안도,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이안은 제단을 지나쳐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제단 뒤편에 있는 작은 샘이었다.
샘물의 표면에는 고대의 문양이 희미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안의 눈에 샘물 위에 내려앉은 시린 빛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순백의 눈처럼 깨끗하고 맑은 비늘이 은은한 광채를 발하며, 얼음의 결정처럼 반짝였다.
그것은 한 생명체에서 흘러나오는 빛.
“앗, 젠장···.”
이안은 느껴질 리 없는 두통에 머리를 짚었다.
아니 이번에는 정말 아픈 것 같다.
비늘에 덮인 작은 몸체, 아직 앳된 모습의 화이트 드래곤 해츨링.
그 존재만으로도 주변은 얼어붙었고, 작은 얼음 결정들이 그의 주변에서 반짝이며 빛을 반사했다.
해츨링이 숨을 쉴 때마다 차가운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저게 베나룩스 산맥을 몇 년째 혹한의 겨울로 만든 원인이겠구나.
이 어린 숨결이 바로 죽음의 숨결이었다.
깊고 푸르른 샘물 위에 내려앉은 화이트 드래곤 해츨링이 이안을 보며 은안을 껌벅거렸다.
[뭐지? 화이트 드래곤도, 골드 드래곤도 아닌데. 드래곤 같으면서도 드래곤 같지 않은데?]
이안의 백금색 눈동자와 눈보다 하얀 은안이 서로를 마주했다.
시간이 멎은 듯한 그 순간, 두 해츨링의 시선이 얽혔다.
시린 은안에는 자신의 레어를 침범한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과 차가운 적의가 서려 있었다.
이안은 이 해츨링과의 만남이 골치 아팠다.
차라리 어덜트 드래곤이었으면 그저 죽였을 것이다.
어차피 광룡의 손에서 죽나, 이안의 손에서 죽나 드래곤 입장에서 결과는 같다.
다만 그의 유산이 누구에게 가느냐가 다를 뿐.
그런데 하필이면 해츨링이다.
그것도 아직 알껍데기가 붙어있는 아주 어린 해츨링.
어떻게 하면 좋지? 죽일까?
적대적인 은안과 피곤한 이안의 시선은 어쩐지 서로 같은 방향성을 향해 나아가며 무언의 대치가 이어졌다.
그 순간.
[꼬르륵!!]
어린 해츨링의 뱃속에서 울려 퍼진 소리가 샘물과 동굴 전체를 흔들었다.
그 소리는 얼음벽을 타고 메아리치며, 앞서 있었던 긴장감 넘치는 대치 상황을 순식간에 무색하게 만들었다.
화이트 해츨링은 자신의 배에서 나온 웅장한 소리에 이안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뗐다.
[아니, 이것은···]
하지만 해츨링이 말을 마치기도 전.
[꼬르르륵!!]
화이트 해츨링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이은 위장 소리가 크게 울렸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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