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츨링은 참지않긔(2)

“후우-.”
수레 가득 짐을 실은 드워프들의 얼굴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지만, 그들의 밝은 웃음을 지울 수는 없었다.
앞장서 드워프들을 이끌던 호그닐의 코끝으로 시원한 바람이 스쳐 지난다.
“하하-. 이제 거의 다 왔으니, 모두 조금 더 속도를 내자고.”
먼지 가득 텁텁한 지하통로의 끝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리는 건, 언제나 빛이 아닌 바람이었다.
드워프들이 지하통로를 나오는 순간, 눈 부신 햇살 아래 탁 트인 하얀 설경이 노르그렌의 드워프들을 반겼다.
해가 산봉우리 위로 떠올랐다.
시리도록 맑은 하늘 아래, 만년설이 햇빛을 받아 광채를 뿜어냈다.
폭군의 창으로 오르는 내내 이제껏 보지 못했던 풍경이 이어졌다.
눈 부신 햇살 아래, 산등성이를 따라 흐르는 작은 계곡에서는 얼음이 녹아내리며 맑은 물줄기가 흘렀다.
이 모든 변화가 자연의 경이로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눈앞의 광경에 보프가 입을 벌리며 걷다가 감탄하였다.
“햇살 한점 볼 수 없는 무거운 눈보라가 내리던 폭군의 창이 이다지도 아름다운 곳이었나요?”
젊은 드워프 보프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
울컥하는 보프의 마음을 잘 안다는 듯 호그닐이 보프의 어깨를 툭 쳤다.
그들 옆에서, 이안의 요청으로 함께 산행에 오른 노르그렌의 최연장자인 그로인이
백발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산이 험준한 만큼, 찾는 이에게 이따금 이렇게 선물을 주곤 하지. 하지만 살 만큼 산 나도, 폭군의 창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구나···.”
그렇게 말한 그로인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얼음에 덮여 있던 돌들 사이로 강인한 고산식물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잎사귀는 여전히 거친 기운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안에 생명력이 느껴졌다.
그로인은 허리를 굽혀 발아래 푸릇푸릇한 싹을 매만졌다.
굳은살로 뒤덮여 있는 백전노장의 손이 떨려왔다.
“기적이군. 기적이야. 어떤 생명도 허락지 않는다는 폭군의 창에···.”
평소 우스갯소리라고는 하지 않는 호그닐이 답지 않게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습니다. 한순간에 베나룩스 전체가 변했습니다. 어제만 하더라도 이 정도로 따뜻하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온도가 변하니 덥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시기적으로 늦여름에 해당하니까. 이제 산이 제 시간을 찾은 게지.”
그로인이 끙끙거리며 허리를 펴고 웃었다.
“하하하-. 이게 다 이안님 덕분 아니겠는가.”
드워프들이 그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노르그렌의 드워프들은 어느새 폭군의 창 정상에 다다랐다.
날카로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거대한 얼음동굴 앞에서 그로인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이 폭군의 레어인가.”
“그로인님, 지금은 미르님의 레어입니다. 미르님은 귀엽, 아니 폭군이 아니십니다.”
폭군 아르크트론에 이야기는 대대로 이어졌다. 노르그렌 곳곳에는 폭군의 지배하에 엄혹했던 시절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아무리 강조하고 노력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한 진실 또한 옅어지는 법.
레드 드래곤의 태평성대가 이런 현실을 낳았다.
“쯧쯧. 이안님이 계신다고 하여 많이 풀어졌군. 폭군 아르크트론과 같은 화이트 드래곤. 그렇다면 폭군의 해츨링일 터.”
그로인의 주름진 눈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르그렌의 드워프들을 주시했다.
“이안님이 우리 곁에 항상 있어 주시지 않는다.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게.”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어디 결계를 확인하러 가보세.”
그로인은 방한복의 옷깃을 여몄다.
얼음동굴 깊숙이 들어갈수록 한기가 강해졌다.
[감히 내 영역에 발을 들이다니. 너희의 불경을 용서받고 싶다면, 무릎 꿇고 복종을 맹세하라.]
강렬한 목소리는 천둥이 치듯 얼음벽을 울리며 동굴 전체가 뒤흔들었고, 천장에 얼음 결정들이 부서져 떨어졌다.
동굴의 얼음벽에 반사된 드래곤의 거대한 그림자가 비쳤다.
그로인의 늙고 무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는 숨조차 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때 그로인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또 언제 여기 텔레포트 한 거야.”
어쩐지 지친 듯한 이안의 목소리에 그로인이 고개 들었다.
그로인의 눈에 들어온 건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공중에 떠 있는 작고 하얀 해츨링이었다.
해츨링이라고는 알고 있었으나, 그로인이 해츨링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레드 드래곤과 함께한 이안은 항상 인간인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몰랐다.
지고한 존재의 어린 시절이 이다지도 지독할 정도 귀여우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눈부신 하얀 비늘이 얼음동굴의 푸른빛을 반사해 은은하게 빛났고, 은색 눈동자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왔느냐. 나의 노예들아.]
근엄한 목소리로 자신들을 내려보는 화이트 해츨링은 기분이 좋은지 공중에서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 모습에 그로인의 얼어붙었던 표정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로인님!! 표정, 표정을 조심하십시오. 그러다가 드래곤님께서 경을 치십니다.”
호그닐이 놓았던 정신줄을 잡으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부여잡으며, 무너내리고 있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크흠. 지고하신 존재 앞에 미천한 드워프가 알현합니다.”
그로인이 부복하자, 이에 맞추어 드워프들이 해츨링 앞에 고개를 숙였다.
해츨링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드워프들을 관찰했다.
작은 몸에 비해 큼지막한 눈에는, 길게 찢어진 파충류의 은색 동공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그런 미르의 모습을 눈치챈 이안이 한숨을 쉬었다.
"네 노예가 아니라니까. 광···. 아니, 레드 드래곤의 노예들이라고."
불쾌하다는 듯 미르의 짧은 꼬리가 위아래를 툭툭 쳤다.
[이곳이 나의 레어고, 저 드워프들은 나의 영역 안에 있다. 그러니 내 노예다.]
미르는 당연한 사실을 말해주는 게 귀찮다는 듯 이안을 쳐다보았다.
이안이 이마를 짚고서 말했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냐. 지금 이곳은 광, 레드 드래곤의 구역이고, 저 드워프들은 레드 드래곤의 노예라고."
자신들을 눈앞에 두고 노예 운운하는 두 해츨링의 모습에 그로인이 힘겹게 말을 뱉었다.
“이안님, 저희는 노예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레드 드래곤님의 보호 아래에···.”
하지만 그로인의 말을 듣는 해츨링은 없었다.
[내 것을 뺏길 수는 없다. 정당히 싸워 내 것을···.]
이안이 미르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네가 무슨 4살짜리 애도 아니고 계속 내 거, 내 거라고 하냐."
[이상한 말을 하는 군. 나는 4살이 아니다. 그리고 내 것이니 내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너 같이 솜털도 가시지 않은 해츨링은 광, 아니 레드 드래곤에게 상대가 안 된다."
이안의 말에 미르의 시린 은안이 불타올랐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도망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지?]
이안은 일말의 주저없이 바로 말했다.
"살 수 있지."
이안의 대답은 단호했다.
미르는 파닥이던 날개를 접고서 땅에 내려왔다.
[살 수 있다? 그 레드 드래곤은, 해츨링인 나를 죽이지 못한다.]
미르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안은 잠시 말을 잃었다.
"... 그거 하나 믿고 까부는 거냐? 하-, 대책 없네. 먼저 경험한 내 말을 믿어. 광룡, 아니 그 드래곤은 죽음보다 끔찍한 경험들을 줄 수 있어."
[이안은 왜 계속, 그 레드 드래곤의 편을 드는 것이냐?]
“편을 드는 게 아니야. 그리고 앞으로 너는 레드 드래곤의 보호를 받게 될 거니까, 괜히 문제 만들지···.”
[나는 보호가 필요 없다.]
“떼 쓰지 마. 너는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해츨링이야.
[나는 보호가 필요하지 않다. 이제껏 혼자서 살았다.]
“현명한 너라면 잘 알잖아. 왜 해츨링이 드래곤들의 보호가 필요한지···.”
이안은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드워프들을 보았다.
마나를 거부하는 몸을 가진 이안에게 해당하지 않지만, 타 종족이 해츨링의 약점에 관해서 알아 좋을 것이 없었다.
해츨링의 약점은 낮은 마나 저항력.
드래곤의 심장은 태어날 때부터 순도 높은 마나 핵이다. 이것이 드래곤의 힘의 근원이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이 강력한 마나는 해츨링 시기에 가장 큰 약점이 된다.
해츨링의 미성숙한 육체는 이 강력한 마나의 핵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한다.
마치 어린아이의 손에 들린 예리한 검과도 같아서, 때로는 예기치 못한 마법의 폭발이나 에너지의 누출을 일으킬 수 있다.
더욱이 해츨링의 연약한 비늘은 이 순수한 마나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충분히 보호하지 못한다.
주변의 마법 에너지에 지나치게 민감한 해츨링의 마나 핵은 마치 보호막 없이 세상에 노출된 것과 같다.
의도치 않게 위험한 마법을 흡수하거나, 적대적인 마법의 영향을 받기 쉽다.
강력한 마나 핵과 미성숙한 육체 사이의 불균형은 마치 폭풍우 속의 작은 배와도 같아서, 해츨링은 종종 자신의 에너지를 제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기에 해츨링이 어덜트 드래곤이 되는 통과 의례가 탈피다.
이 과정을 통해 드래곤은 마나 핵을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는 단단한 비늘을 얻게 되고, 내부의 마나 회로가 완성되어 그 강력한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다.
마치 거친 바다를 항해하던 작은 배가 견고한 전함으로 변모하는 것과도 같다.
결국, 해츨링에게 있어 성장이란 단순히 몸집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강력한 힘과 조화를 이루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이 완성될 때까지, 그들은 보호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정 보호가 필요하다면 이안, 네가 나를 보호하면 되는 거 아닌가.]
“미르, 떼 쓰지 마. 나는 내 갈 길이 있어. 이곳에는 그저 잠시 들른 것뿐이야.”
미르의 몸에 하얀빛이 퍼졌다.
[이안은 바보다. 바보 드래곤이다.]
그 말을 끝으로 미르는 사라졌다.
-저 어린 해츨링이 너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느냐.
이안은 있을 리 없는 두통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알바, 아무리 해츨링이라고는 하나, 드래곤이야. 지고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의지할 리 없잖아. 그저 욕심이 많아서, 제 뜻대로 되지 않으니 심술부리는 것뿐이겠지.”
백금발을 쓸어올린 이안이 결계 너머로 지나갔다.
이안의 몸 주변으로 파동이 일어나며 결계를 통과했다.
이안의 얼굴이 찌푸려졌으나, 이를 눈치챈 드워프는 없었다.
-반푼이 해츨링. 아무리 네가 마나를 거부하는 특이한 몸을 가졌다고는 하나, 하루 종일 결계를 드나들었다. 결국 몸에 과부하가 올 수밖에 없다.
“하···. 그로인. 내가 부탁한 건 가져왔어?”
부복하고 있던 그로인이 수레에서 물건을 가져왔다.
겉이 투박해 보이는 아티팩트들이었으나, 아티팩트 장인인 그로인이 직접 만든 마나 저항력을 높이는 물건들이었다.
그로인이 결계 앞에서 아티팩트들을 늘어놓았다.
“이안님도 아시겠지만, 마나 저항력을 높이는 아티팩트에는 크게 세 가지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마나를 흡수하여 분산시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마나를 반사하여 되돌려 보내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나의 효과를 상쇄시키는 반대 속성을 가진 물질 사용하는 것입니다.”
살아온 세월만큼 깊어진 그로인의 갈색 눈동자에는 평생을 바쳐온 삶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흘렀다.
***
음식과 아티팩트로 가득 실었던 수레는 텅 비었다.
노르그렌의 드워프들은 빈 수레를 끌고 베나룩스 산맥을 내려갔다.
보프가 뒤를 돌아 텅 빈 수레 중 하나를 보았다.
보프의 시선 끝에는 하룻밤 사이에 100년은 더 늙어버린 듯 하얘진 그로인이 초점 없는 눈으로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로인의 중얼거리는 작은 속삭임은 보프로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생경한 욕들이었다.
“그로인님 저대로 두어도 괜찮을까요?”
보프가 걱정스레 말하자, 호그닐이 말했다.
“지금은 시간을 들이자.”
호그닐의 말에 곁에 있던 성질 급한 드워프가 거들었다.
“괜히 지금 건들면 우리만 주옥 되는 거야. 너 같으면 평생 갈아 바친 물건들이 이안님 손에 순식간에 부서지는 것을 계속해서 지켜본다면 어떻겠냐.”
보프가 떠올리기도 싫은 생각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욕하고 싶지만, 상대가 이안님이니 감히 욕하지도 못하고,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어도 이안님이 막을 수도 없고···.”
“그러니까,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을 드리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보프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잠시만요.”
보프가 얼음이 녹아 질척해진 땅을 만져본다.
“이것 좀 보세요.”
노르그렌의 드워프들은 자신들의 노스텔지어를 지키기 위해 흔적을 지우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그리고 이곳은 드워프들이 베나룩스 산맥을 지나다니는 비밀 길목. 그런데 땅에는 발아한 새싹이 짓뭉개져 있었다.
성질 급한 드워프가 말했다.
“날씨도 따뜻해지니까, 집 나갔던 산짐승들이 들어온 거겠지. 발자국이 없잖아.”
성질 급한 드워프 말에도 호그닐은 바닥 주변을 살폈다.
“아니야. 풀이 누운 자리가 네발짐승이 아니네. 누군가가 발자국을 지운 거야. 그것도, 다수가···.”
호그닐은 두 해츨링이 있을, 어느새 점이 되어버린 폭군의 창 정상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외쳤다.
“어서 노르그렌에 가자!! 마을의 드워프들에게 어서 말해야 해. 폭군의 창으로 향하는 근방에 경계를 세우라고!!”
베나룩스 산맥에 다시 암운이 드리우고 있었다.
- 작가의말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