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창 아래(2)

무너진 얼음 동굴 벽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깨진 얼음 조각들이 바닥에 흩어져 희미한 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어둠 속 미르의 은빛 눈동자가 번쩍였다.
미르는 마법을 쓰려하였지만, 그의 의지와는 달리 마법이 구현되지 못했다.
미르의 심장 속에서 의지대로 마나가 꿈틀거렸지만, 마치 가는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힘없이 흩어져갔다.
미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작은 몸이 긴장으로 떨렸다.
‘마나가 흩어진다. 이곳에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섣불리 저들의 구역으로 들어왔어.’
미르는 제 등 뒤에 있는 무너진 벽을 의식하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침입자들이 미르가 빠져나가도록 둘리 없었다.
미르의 은빛 눈동자가 얼음 조각처럼 차갑게 빛나며, 침입자들 사이를 날카롭게 훑었다.
미르가 들어온 순간부터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이들이 미르 주변을 사방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동굴 안은 이미 침입자들의 검은 망토로 가득 찼다.
그때 미르의 시선이 동굴 한쪽에 놓인 거대한 수정에 멈췄다.
미르의 눈이 커졌다.
[저 수정들이, 내 마나를 흩트리고 있는 것인가?]
미르의 목소리는 낮고 위협적이었지만, 그의 떨리는 꼬리 끝에서 불안과 공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수정은 푸른빛을 내뿜으며 미르의 마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자신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미르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침입자들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들의 발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그들의 발소리는 마치 죽음의 시계 초침 소리처럼 미르의 귓가를 울렸다.
검은 망토를 두른 침입자들이 원을 그리며 미르를 에워싼 채 거리를 좁혔다.
미르는 몸을 낮추고 꼬리를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미르의 새하얀 비늘이 시린 빛으로 반짝였다.
비록 마법은 쓸 수 없었지만, 미르의 몸 자체가 얼음의 화신이었다.
그의 비늘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가 주변의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하지만 침입자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날카로운 발톱이 얼음 바닥을 긁으며 불꽃을 일으켰다.
[감히 내 영역을 침범하다니!]
미르가 으르렁거렸다.
그의 이빨이 차갑게 빛났고, 눈에서는 얼음처럼 차가운 분노가 번뜩였다.
그의 작은 몸이 공격 자세를 취했다.
동굴 안의 긴장감이 얼음처럼 차갑게 엉겨 붙었다.
미르는 무너진 벽과 가장 가까운 침입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작은 몸이 공중을 가르며 가장 가까운 침입자를 향해 돌진했다.
미르의 날카로운 발톱이 공기를 가르며 내리꽂혔다.
날카로운 발톱이 망토를 찢고서 그대로 사람을 찢었다.
단말마도 없이 살과 뼈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망토가 흩날렸다.
그 잔혹한 손속에도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이들이 미르에게 달려들었다.
미르는 광폭한 야수로 변했다.
그의 발톱이 침입자들의 살점을 파고들었고, 그의 꼬리가 휘둘러질 때마다 얼음 바닥이 산산조각났다.
피와 얼음 조각이 동굴 안을 춤추듯 날아다녔다.
하지만 곧 겁없는 다른 이의 손이 미르의 짧은 다리를 붙잡았다.
미르의 비늘에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얼어붙었어야 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그 태도에 미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미르의 짧은 꼬리가 휘둘러지며 큰 파공음이 울리며 미르의 발을 붙잡은 이의 얼굴이 터졌다.
미르는 그대로 자신의 밑에 있는 사람을 밟아 으스러트리고서, 꼬리로 얼음 바닥을 부숴 다가오는 이들을 저지했다.
[더러운 것들이 어디에 감히 손을 대려고 하는 것이냐.]
미르의 분노가 동굴 전체를 울렸다.
미르의 은안에서는 얼음보다 차가운 분노가 타올랐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차가운 기운은 마치 꺼져가는 불씨처럼 희미해져 갔다.
이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이가 웃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키와 덩치가 두 배는 커 확연히 눈에 띄는 이였다.
“하하. 고작 저런 새끼 드래곤에게 쩔쩔대는 모습이라니.”
쇠못으로 칠판을 긁는 듯 귀를 찌르는 기분 나쁜 음성이었다.
그의 눈이 차갑게 빛나며 그는 말을 이었다.
“아무리 시간 끄는 소모품이라지만. 크크큭."
쇳가루를 굴리는 듯한 거친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그의 말이 신호가 된 것처럼 침입자들이 뒤로 물러섰다.
그를 본 미르의 새하얀 비늘이 희미하게 빛나며 뻣뻣하게 섰다.
[너는···. 인간이 아니구나.]
미르의 코에서 차가운 콧김이 새어 나왔다.
평소라면 그 숨이 얼음으로 변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희미한 안개로 사라질 뿐이었다.
“나에게는 안 덤벼드나? 아까 그 당당한 태도는 어디 간 거지? 우습군. 광룡, 광룡 하기에 드래곤이 무슨 대단한 존재인 줄 알고 기껏 나섰는데, 그냥 새끼잖아.”
[감히 이 몸을···.]
미르는 몸을 낮추고 꼬리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의 비늘이 서서히 일어서며 작은 칼날들처럼 빛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 힘이 빠져나감을 느꼈다.
그런 미를 조롱하듯 덩치 큰 사내가 말했다.
“그 작은 몸에서 나오는 괴력이, 단지 육체적 능력인 줄 알았느냐? 드래곤의 육체가 강한 건, 그 심장에 흐르는 마나 때문이지.”
녹슨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듯한 거친 그의 말에, 미르의 작은 몸이 마치 폭풍 전야의 바다처럼 요동쳤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이 심하게 오르내렸다.
“이제야 저 수정들이 제값을 하는군. 저거 한 개가 웬만한 왕국을 살 정도의 금액이라는 거 아는가? 저 정도의 마나 소멸 수정이라면 서대륙은 거뜬히 살 금액이지. 어쩌면 네 몸값보다 더 비싸지 않을까?”
덩치 큰 이가 비아냥대며 미르에게 다가왔다.
[꺼져라!]
미르의 위협은 공허한 메아리로 동굴을 맴돌았다.
침입자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더 길게 미르를 덮쳐왔다.
갑자기 사방에서 날아오는 차가운 쇠사슬이 미르의 몸을 감았다.
[놓아라! 이 더러운 것들아!]
차가운 쇠사슬들이 미르의 몸을 옥죄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야. 너에게는 아주 과분한 사치스러운 물건들을 준비해 놓았더라고.”
[아—!]
미르가 고통에 몸부림을 쳤지만, 미르의 몸을 옥죄는 쇠사슬들은 오히려 더 강하게 압박해 올 따름이었다.
덩치 큰 이는 절규하는 미르의 모습을 즐기는 듯 목청 크게 웃었다.
“하하하-”
특유의 쇳소리가 나며 갈라지는 음산한 목소리가 미르의 비명과 함께 울려 퍼졌다.
“아 웃겨. 지고한 존재라며. 아참! 해츨링은 아직 미성숙해서, 자신의 마나를 온전히 보전하지 못한다지? 그래서 마법 저항력이 약해서 이렇게 마법 저항력이 강한 도구에는 꼼짝을 못 한다며? 하하하- 스스로 지고한 존재라고 떠드는 존재가 고작!”
역시나 덩치 큰 사내는 해츨링의 약점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미르는 새어 나오는 신음을 억누르며 힙겹게 입을 뗐다.
[닥, 쳐···.]
미르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동굴 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미르가 쇠사슬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발버둥 치는 꼴이 우습군. 이게 드래곤?”
덩치 큰이의 옆으로 망토를 뒤집어쓴 이가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
“아직 해츨링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다들 광룡, 광룡 떠들어대기에, 드래곤이면 엄청 대단한 존재인지 알았지. 이런 녀석이었다면 내가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덩치 큰 이는 언제 웃었냐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낮게 말하자 쇠를 긁는 듯한 소리가 강해져,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으나, 덩치 큰 이의 옆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그래도 드래곤입니다.”
그 말에 덩치 큰 이가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언제 이 녀석을 키워 써먹겠다는 건지. 그냥 제물로 바치는 게 더 낫지 않나.”
“쓸모가 없다면, 제물보다도 실험체로 쓰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그 분의 뜻···.”
덩치 큰 이의 옆에 있던 이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자 덩치 큰 사내가 콧방귀를 꼈다.
“흥! 그분의 뜻인지, 아니면 결국 인간일 뿐인 그 녀석의 의지인지 네 녀석이 알 수 있겠느냐.”
고개를 조아리던 이가 고개를 들고서 말했다.
“인간일 뿐이라니요,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는 이이신데, 언사가 지나치십니다. 그런 호칭은 삼가십시오.”
그러자 검은 망토 속에 감춰져 있던 덩치 큰 사내의 눈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덩치 큰 사내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순식간이었다.
그의 거대한 손아귀에 잡힌 부하의 머리가 마치 장난감처럼 들어 올렸다.
동굴 안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 광경에 고정됐다.
미르조차 숨을 멈췄다.
“크윽-!”
덩치 큰 사내의 손에, 얼굴이 잡힌 이에게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호오, 감히 인간 따위가 나에게 고개를 드는 것인가?”
덩치 큰 사내가 웃으며 손아귀에 잡힌 머리통을 달걀 부수듯 으스러트렸다.
노른자가 터져 나오듯 튀어나온 뼈들 사이로 피와 척수액이 터져 나왔다.
덩치 큰 사내는 이미 명이 끊어진 이를 바닥에 툭 내려놓고서 깨진 머리통을 다시 한번 짓밟았다.
퍼석 소리가 나며 머리통이 형체도 없는 피곤죽이 되었다.
“나는 내가 부르고 싶은 대로 그 녀석을 부를 것이다. 그러니 불만 있는 놈들이 있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라. 친히 이 손으로 죽여줄 테니.”
그렇게 말한 덩치 큰 사내의 시선이 바닥에 달라붙은 미르에게로 향했다.
“호오라. 그래도 드래곤이라는 건가? 아직 눈에서는 투기가 살아있네?”
덩치 큰 사내는 미르의 곁으로 다가와 마치 구경이라도 하는 듯 미르를 바라보았다.
미르의 덩치 큰 사내를 향해 은안을 불태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빛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은안속에 불씨가 희미해지는 만큼 덩치 큰 사내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번졌다.
“이제 갈 때가 다 되었군. 자, 그러면 이제 그 물약을 가져와라. 어서 빨리 끝내지.”
덩치 큰 사내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뒤로 손을 내밀었다.
이제껏 조용히 미르와 덩치 큰 사내를 지켜보던 이가 품속에서 호리병을 꺼내어 건넸다.
덩치 큰 사내는 호리병을 확인하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호리병의 윗부분을 그었다.
마치 칼로 종이를 자르듯, 깔끔한 단면으로 호리병 입구가 떨어져 나갔다.
덩치 큰 사내는 미르의 입을 거칠게 벌렸다.
미르의 목구멍 속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들이 밀려들었다.
흐릿해지는 시야 속 미르는 생각했다.
‘안 돼···. 이럴 순 없어···.’
태어나서 줄곧 이 레어에 갇혀 있었다.
굶주림에 죽어가는 나날이 이어졌다.
하지만 죽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죽으면 죽는 거였다.
자신은 이 생의 순환을 아는 현명한 드래곤.
언제가 다가올 죽음이 그저 저에게는 일찍 찾아온 것일 뿐이었다.
삶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보는 아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드래곤을 만났다.
처음으로 따뜻한 음식을 먹었다.
그때 깨달았다.
활자로만 익힌 지식은 앎이 아니라는 것을.
아직 나는 경험해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을
그는 저를 이곳에서 꺼내 준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는 마나도 다루지 못하는 반푼이 드래곤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나를 꺼내 줄 거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이 있는 레어는 만년설이 있는 베아룩스 산맥의 최정상부.
그와 함께 나간다면 처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눈일 터.
‘눈···. 함께 보고 싶었는데···.’
감기려는 눈 사이로 세상이 흐릿하게 보인다.
미르의 눈에서 차가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이 얼음 바닥에 떨어지자 작은 꽃 모양으로 얼어붙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미르는 환영을 보았다.
[이···. 안···.]
미르의 목소리는 이제 겨우 들릴 듯 말 듯한 속삭임으로 되뇌었다.
“크크. 지금 드래곤이 우는 것이냐?”
순간, 동굴 안의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빛이 번쩍였다.
팡-! 덩치 큰 사내의 뒤에서 무언가가 빛과 같은 속도로 날아왔다.
덩치 큰 사내는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몸을 틀어 주먹을 날렸다.
공기가 폭발하듯 갈라지며 날아온 물체와 그의 주먹이 충돌했다.
덩치 큰 사내의 입에서 쇳소리가 긁히듯 낮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나 소멸의 수정?”
뒤늦게 덩치 큰 사내의 뒤에서 무언가가 날아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이가 몸을 돌려 외쳤다.
“누구냐?!”
그 뒤로 절뚝이는 소리가 고요한 얼음동굴에 울려 퍼졌다.
“누구? 지금 이 자리에서 너희들의 숨통을 끊어놓을 사람.”
앳된 청년의 맑은 목소리에 담긴 살기는 칼날보다 날카롭게 동굴 안을 가르며, 얼음동굴의 한기보다 더 차갑게 울려 퍼졌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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