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숙혈사(1)

그날 저녁
은위경의 중독이 시작된 지금 두사람에게는 많은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단우진과 백검문 문주 장환의 만남은 빠르게 성사되었다.
단우진은 백검문에 있을지도 모를 혈천마교의 꼬리를 잡기 위해, 장환은 철혈방을 이어서 자기의 계략을 이어줄 수 있는 사람인지 판단하기 위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서로에게 접근했다.
두 사람은 번듯한 주루도, 그렇다고 화려한 기루도 아닌 감숙의 구석진 곳의 허름한 객잔에서 만났다.
장환은 평소에도 자주 입는 흑색 무복을 입고 떡 벌어진 어깨를 자랑했다. 단단하게 잘 단련된 몸을 가진 그는 서늘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어째 감숙에 위명이 자자하신 장환대협께서 초대해주신 것 치고는 장소가 소박하시네요”
“이곳이 겉은 허름할지 모르나 음식의 맛은 감숙 내 어디보다 뛰어나다네”
-우물 우물
“뭐 말씀처럼 음식은 참 맛있네요”
음식을 입에 문 채 웅얼거리는 단우진을 바라보는 장환의 표정은 생각이 많아 보인다.
‘이 어린 녀석이 종사각을 진짜 죽인 게 맞는 건가?’
마치 그 생각을 읽은 듯, 단우진은 피식하고 웃었다.
“흐음~ 혹시 제가 진짜 종사각을 죽인 것인지 의심하시는 중이신지요?”
자기의 생각을 읽힌 장환은 눈을 가늘게 뜨며 단우진을 유심히 쳐다봤다.
“문주님의 생각, 이해합니다. 저라도 저처럼 어린 녀석이 철혈방을 무너트리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면 믿지 않을 테니까요”
“무슨 말을 하는겐가, 난 그저 어린소협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네”
-툭
단우진은 책을 한권 꺼내서 탁자에 올렸다.
“이 책? 무엇인가?”
“한번 읽어보시지요”
장환은 탁자에 놓여진 책을 집어 들고는 읽기 시작했다.
장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책을 읽어 나간다.
“이 책 어디서 났는가?”
“종사각의 방에서 찾았습니다.”
“원본인가?”
“설마요”
단우진의 망설임 없는 대답.
단우진이 장환에게 건넨 책은 백검문과 철혈방의 금전거래에 관한 기록이 담긴 장부였다.
“그렇다면, 나에게 이 책을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를 들고 은가장을 갔다면 큰돈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황금알을 낳는 오리 이야기 아십니까?”
“···”
단우진의 질문에 장환은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는 말입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황금알을 낳는 오리의 배를 가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이 황금알을 낳는 오리인가?”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아주 당돌하구만”
“과찬이십니다.”
여전히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단우진을 바라보던 장환은 사람을 불러 음식을 치우도록 했다.
“아직 먹고 있는데 치우시십니까?”
“너무 섭섭치 말게나 지금은 더욱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 말일세”
-꿀꺽 꿀꺽
장환은 물을 마시며 입을 헹구는 단우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겐가?”
“종사각이 문주님께 큰돈을 여러 차례 받았고, 그 지원을 바탕으로 은가장을 압박하고 있었다는 정도?”
“하하하 이 책에는 안 적혀 있는 내용이 원본에는 있나 보군”
“그렇죠”
이는 단우진의 거짓말이었다. 원본에도 은가장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진중학이 알고 있는 비밀이 원본에 적혀있다는 투로 이야기 한 것 뿐이다.
“그럼 이야기가 쉽겠군. 종사각에게 주던 금액에서 조금 더 얹어주지 종사각이 하던 것처럼 계속해주게”
“정확하게 어떤 일입니까?”
“전부 알고 있는 것 아니었나?”
“전 종사각과 다릅니다. 고작 종사각이 있었던 위치에서 머무를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문주님에게 조금 더 가까운 사람이 되고 자 합니다.”
“어린 나이에 비해 야심이 크구만”
“과찬이십니다”
“그렇지만, 말이야...”
장환은 말을 하다 말고 천천히 단우진을 쳐다봤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듯 공허한 눈빛.
“난 분수를 모르고 기어오르는 자를 매우 싫어한다네”
단우진은 장환의 눈빛을 담담하게 받아넘겼다.
“무례하게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닐세, 아니야. 나도 자네처럼 치기 어린 시기가 있었지.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천히 서로에 대해 알아가면 되지 않겠나”
장환에 말에 수긍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단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천천히 알아가시죠 문주님”
“그럼 내일 점심 다시 이곳으로 오게나 그럼 그대의 황금알을 낳는 오리가 황금을 두었을 것이니, 해야 할 일도 같이 적어둘 테니 것이니 그리 해주게”
장환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객잔을 빠져나갔다. 돌아서서 나가는 장환의 표정은 처음과 다름없이 여전히 무표정했다.
단우진은 객잔을 빠져나가는 장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의 신형이 점처럼 작아지는 순간까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흠···천천히 알아가자라···시간이 조금 걸리겠는데?’
이로써, 두 사람은 서로가 던진 줄을 붙잡았다. 이 줄의 양 끝에는 날카로운 칼이 서로의 목을 겨누고 있었지만, 두사람은 기꺼이 잡았다. 서로의 목적을 위해서 위험 따윈 얼마든지 감수하겠다는 의지였다.
***
백검문의 장원 백검문 문주 장환의 방
장환의 방은 탐욕적이거나 욕심이 많다고 알려진 성격처럼 화려할 것 같았지만, 방안에는 침상과 탁자 의자 몇 개만이 넓은 방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다만 일반적인 방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창을 검게 칠해두어 낮에도 해가 한점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끼익
한 남자가 문을 열고 장환의 방으로 들어온 뒤 침상 뒤편을 건드렸다.
그 순간
-드드드득
침상 뒤편의 바닥이 꺼지며 계단이 나타났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넓은 공동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붉은 피로 그어진 여러 선들이 어지럽게 그어져 있었다.
남자는 공동의 가운데로 걸어가 오체투지를 한 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다.
한참을 중얼거리던 남자는 고개를 들어 벽을 쳐다보고는 상의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품에서 채찍을 꺼내 자기의 등을 때리기 시작했다.
-촤악
-촤아
남자의 등에서 피가 튀기 시작한다.
등에서 튄 핏방울들은 바닥에 긴 선을 긋기 시작한다.
남자는 외친다.
혈천재림 만마앙복!
-촤악
혈천재림 만마앙복!
공동에는 남자의 진언과 자기를 때리는 채찍소리 그리고, 피가 튀는 소리만이 가득하다.
***
단우진은 다음 날 점심 즈음이 되어서 장환과의 약속을 위해 허름한 객잔을 다시 찾았다. 역시나 객잔에는 손님이 없었다.
‘흠···이 객잔은 아무래도 장환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곳인가 보군’
단우진은 걸어서 2층으로 향했다.
전날 장환과 식사를 하던 그곳에, 어떤 남자가 앉아서 탁자에 전표 뭉치를 올려둔 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단우진은 그의 곁으로 다가가 자연스레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단우진이에요. 저도 아직 식전인데, 같이 먹어도 되죠?”
남자는 눈을 움직여 단우진을 쳐다보고선 이내 다시 음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께 듣던 대로 건방지네”
“흐음~ 문주님의 아드님이신가 보네요. 반가워요.”
“···”
“과묵하시네요.”
“네놈이 말이 많은 거지”
“그쪽은 말이 짧구요.”
단우진의 말에 장서한은 꿈틀했다.
“난 아버님과 다르게 네놈의 오만방자한 꼴은 두고 보지 않는다. 네놈 주둥이 간수 잘하거라.”
“워낙에 자유분방한 주둥이라 하하하”
-쾅!!!!
장서한이 내려친 탁자는 부서지며 탁자 위에 놓여있던 전표와 음식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이 새끼 건방 떨지 말라 했을 텐데”
“아이참···진짜 아비나 자식새끼나 음식 아까운 걸 몰라 왜”
장서한은 앉아있는 단우진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았다.
“뭐라 했느냐?”
“또 말해줘?”
장서한의 주먹이 단우진을 얼굴을 향해 날아간다.
주먹에 맞아 쓰러질 단우진을 예상한 장서한은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단우진은 그의 예상을 산산이 조각내며 고개를 돌려 피했다.
-퍽
주먹이 빗나가자 멍하게 서 있는 장서한을 단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걷어찼다.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장서한
-꽈당
-퍽 퍽 퍽!!
단우진은 장서한을 사정없이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빠각
“으아아아악!!!!”
단우진은 넘어져있는 장서한의 팔을 발로 밟아 뼈를 부쉈다. 넘어진 채 부서진 팔을 부여잡고 고통에 소리치는 장서한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봤다.
“멱살 같은 건 함부로 잡는 게 아니랍니다.”
바닥에 흩어진 전표를 챙긴 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장서한의 품을 뒤졌다. 단우진은 아마 장환이 시키고자 하는 일을 따로 적어 챙겨줬을 것이라 생각했다.
-바스락
그때 손에 잡히는 한장의 종이
종이를 꺼내 펼쳤다.
-은가장 사업체에 대한 지속적인 압박
‘역시 별 내용은 없네’
단우진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장서한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다 몸을 돌려 객잔 밖으로 나갔다.
-뿌드득
‘저···개···새끼···꼭 죽이고 말 테다!!!!’
장서한은 바닥에 쓰러진 채 고통에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는 자기에게서 등을 돌려 객잔 밖으로 걸어 나가는 단우진을 쳐다보며 이를 갈았다.
***
은가장은 철혈방이 무너지고, 재정에 숨통이 트이는가 싶더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가 나타나 다시 재정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제는 가주인 은위경마저 병환으로 자리에 들자 은가장의 가세는 그야말로 가파르게 기울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이렇게 가문이 어려울 때에 이 아비가 너에게 큰 짐을 맡기는 거 같구나”
연신 기침을 하는 은위경의 몸은 그사이 중독이 더 진행되었는지, 눈은 붉게 충혈되고 도드라진 검붉은 핏줄들이 드러난 몸 위에 솟아올라 있었다.
“아닙니다. 아버님 저희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시고 어서 쾌차하셔야죠. 가문의 일은 저와 진겸이가 도울 터이니 아버님께서는 건강에만 신경 쓰셔요”
-콜록 콜록
연신 기침을 하다 지친 은위경을 침상에 뉘이고, 은진아는 방을 나왔다.
‘하아···말은 아무렇지 않게 했다만···걱정이네··· ’
은가장은 당장 다음 달에 무인과 하인들에게 지급할 월봉조차 아슬아슬한 상황까지 오고 말았다. 아버님의 지인들이 십시일반 도움을 주고 있지만, 이마저도 이제는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고민에 수심이 얼굴에 드리우는 그때, 은진아에게 하인이 다가왔다.
“아가씨, 백검문 장공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장공자, 백검문 장환의 아들 장서한이었다. 은진아는 권위적이며, 욕심이 많고 자기에게 은근히 욕망을 드러내는 무례한 장서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가문을 찾은 손님을 내칠 수 없었던지라 은진아는 불편한 마음을 감추고 장서한이 기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겻다
은가장에 위치한 조그만 정자에 앉아 장서한은 은진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후후 며칠 후면 이곳이 내 것이란 말이지, 게다가 은진아 까지 후후후’
혼자 생각에 빠져 연신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던 그때, 장서한을 달콤한 상상에서 현실로 데려오는 차갑지만, 매력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어쩐 일이십니까?”
장서한은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은진아를 마주 봤다.
‘흥. 뻣뻣한 년, 언제까지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지 두고 보자꾸나.’
장서한은 이내 얼굴에 능글맞은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나 은진아를 맞이했다.
“지나는 길에 은소저를 잠시 뵐까 싶어 찾아왔습니다.”
능글맞은 웃음.
저 웃음은 언제나 은진아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
“그러시군요.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거북한 속내를 숨긴 채, 장서한에게 차를 권했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주로 장서한의 지치지 않는 질문과, 은진아의 단답으로 점철된 대화를 했다.
.
.
.
“이제 시간이 많이 되었네요. 일이 바빠 먼저 들어가 보아야 겠습니다.”
명백한 축객령.
은진아는 장서한을 돌려보내기 위해 적당한 핑계를 대며 몸을 일으켰다.
은진아가 몸을 일으키려는 찰 나.
“제가 드린 제안 생각해보셨습니까?”
은진아는 몸을 일으키다 말고 장서한을 노려봤다.
“그 제안이라면 받아들일 일이 없을 거라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은진아의 철벽같은 거절에도 장서한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은가장이 최근 사정이 어렵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장서한의 말에 은진아는 냉정하게 유지하던 이성이 살짝 흔들렸다.
“그래서요. 저희 가문의 사정을 이용해서 그쪽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여전히 능글능글 웃음을 짓는 장서한
“진정하시오. 은소저. 그저 제가 은가장을 도울 수 있다. 말을 하는 겁니다. 저 역시 아버님께 부탁해야 할 터인데, 아무런 이유 없이 부탁드릴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한번 다시 생각해 보시구려”
“···이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정자를 빠져나가는 은진아를 보는 장서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큭큭큭 네년이 그렇게 굴 날도 머지않았다. 큭큭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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