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단아한 비서, 김단비와 멕케인의 넥타이.

불혹의 재수강. 21화. 단아한 비서, 김단비와 멕케인의 넥타이.
“횬곽펑 와쑝?”
단아한 비서의 안내를 따라, 멕케인이 기다리고 있다는 ROKGO의 대표실로 들어섰을 때, 나는 기습적인 인사말에 놀라 잠시 얼어붙었다.
하지만 앞서 들어온 단아한 비서, 김단비씨는 늘 있는 일인 듯 아무렇지 않게 설명했다.
“케이블 채널 만화버스에서 방영중인 티니펑 말투입니다. 분위기를 편하게 하신다고 하는, 나름 배려로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보다 차는 어떤 걸로?”
“그···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네, 말씀 나누고 계시면, 아메리카노 한 잔과 믹스커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표정도 없고 말의 고저도 없이, 기계처럼 내가 마실 음료만 확인한 비서가 돌아 나가고, 금발의 M자 머리 브루스 멕케인이 나를 방 가운데 원탁에 마주 앉혔다.
“당황하셨군요. 요즘 딸애가 하루 종일 티니펑만 보고 있어서···. 근데 보다 보니 저도 가끔 말투를 따라하게 됩니다. 하하.”
딱히 딸 때문이라기에는···, 삭막한 대표실 한쪽 벽면에 40개쯤 되어 보이는 다양한 티니펑 피규어가 너무 잘 정돈되어 있는 거 아냐?
“아무튼, 인사가 늦었습니다. 헌터등록은 관리부서가 따로 있기는 하지만, 현곽씨는 제가 직접 다시 뵙고 싶은 욕심에 일정을 조율하다 보니, 많이 늦어졌습니다. 기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예요. 일은 늦으면 늦을수록 좋은 거죠.
“장현곽입니다. 이렇게 초대해주신 것 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나름 인생의 경험을 살려, 적당한 미사여구로 예의 갖춰 인사했다. 그러자 멕케인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까딱거렸다.
“하하, 현곽씨는 사십먹은 한국의 공무원들처럼 말씀하시네요. 평소 어려운 자리를 자주 가지시나봅니다. 하지만 편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저야 이제 공무원이지만, 현곽씨는 곧 정식 헌터가 되실 텐데, 헌터에게 나이나 자리는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같은 말을 유진과 천인국에게도 이미 똑같이 들었다.
“네, 차차 하겠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이게 편할 것 같습니다.”
“네, 현곽씨가 편한 것이, 저도 편한 겁니다. 그럼 시작하죠.”
그렇게 말한 멕케인이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마치 내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근데 나는 할 말이 없는 걸?
······.
이 자리··· 애매하다.
비서실을 통해 호출을 받고 헌터등록을 하러 찾아왔다. 일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자리는 양쪽이 서로 예의를 갖추어도 응당 갑과 을이 정해진다.
대표실이라 해서 들어왔는데, 한쪽 구석에 작은 컴퓨터용 책상만 있고, 횅하다. 가운데 원탁을 두고 서로 마주보고 앉았는데, 딱히 상석이 없다.
윗사람, 또는 상하가 없을 경우, 초대한 사람이 먼저 용무를 꺼내고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된다. 헌데 멕케인은 마치 내가 먼저 무슨 말이든 해보란 듯이, 뜨거운 눈빛으로 가만히 나를 지켜 보고만 있었다.
똑똑.
단아한 비서, 김단비가 들어오더니 유리컵을 내 앞에 먼저 내리고, 종이컵을 메케인의 앞에 내려놓더니 말없이 나간다.
일련의 상황들로 보았을 때, 이 모든 건 철저하게 계산되고 준비된 연출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런 연출이 필요한 상황은 두 가지다.
아직 알지 못하지만, 사실은 내가 의전의 대상이 되는 윗사람이었거나, 혹은 나한테 어려운 부탁을 해야 하거나.
좋다. 어디 한번 끝까지 해보자. 어느 쪽이 되었든 참지 못하고 먼저 움직이면 지는 거다.
그렇게 한참을 마주본 두 사람, 마침내 묵언의 한판승을 견디지 못한 멕케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다 됐습니다. 따로 질문이 없으신 걸 보니, 만족하신 것으로 알고, 내일부터 출근하시죠.”
응? 이건 무슨 소리? 헌터가 출근도 해?
“김비서. 계약서 띄워줘요.”
계약서? 무슨 계약서?
“저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방금 브리핑 영상과 계약조건, 다 보셨···. 아!”
멕케인이 벌떡 일어나더니 원탁을 돌아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이런···. 이거 고쳐 놓으라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메케인이 앉아 있던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정확히 내 얼굴이 있었을 높이로 원탁 중앙에 증강현실 화면이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엔 나에 대한 정보로 보이는 것들이 무수히 많이 띄워졌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현곽씨. 그냥 다시 말로 설명 드려야겠네요. 단비펑은 좀만 기다려줘요.”
대한민국 국가정보원과 활동이 비슷하다더니, 이들은 이미 나에 대한 정보를 전부 수집해서 자기들끼리 판단하고 결정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당신의 능력이 이러니, 이런이런 일을 하시면 됩니다.’라고 통보하는 게 헌터 등록 절차의 전부인 것 같았다.
“이거 참, 저희가 그래도 현곽씨의 경우는 마녀의 보증도 있고 해서, 최선을 다해 준비한 브리핑이었는데···. 일단,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현곽씨는 2차장실 휘하의 헌터관리팀 중에 하나로 내근직부터 시작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것이 저희 쪽 분석팀 판단입니다.”
“헌터관리팀? 헌터가 헌터도 관리하나요?”
잘은 모르지만 관리팀이면 뒤치닥거리나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어차피 회귀전에 막노동부터 온갖 범죄에 가까운 밑바닥 일을 고루 해본 내가, 딱히 직업에 귀천을 두고 그런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게이트를 막고 세상을 지켜야 할 헌터에게 내근직은 너무 재능낭비 아닌가?
“아니죠. 헌터나 게이트, 언론이나 정치적인 관리는 저희 같은 공무원들이 합니다. 뭐 게 중에도 저처럼 헌터였던 사람들이 제법 있기는 하지만, 굳이 헌터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 헌터 안되는 거예요, 그럼?”
“아닙니다. 헌터 등록은 이미 처리 중입니다. 아마 방 밖으로 나가실 때면 바로 확인이 가능하실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고. 혹시···,
“아, 그럼 헌터가 되면 다 내근직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다른 헌터 선배들 따라다니면서 일도 배우고···.”
“그럴리가요. 게이트는 계속 생겨나고, 공략할 헌터는 부족하고···. 저희가 만들 수만 있으면 동네 길냥이라도 잡아다가 헌터로 만들어서 동원하고 싶은 걸요. 단지, 현곽님 재능이···.”
뭐야, 방금 나 졸지에 길냥이만도 못한 사람이 된 거야?
“하, 어차피 브리핑에 있었던 내용이니 그냥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현곽씨, 싸움 좀 하십니까?”
싸움? 초등학교 이후로 해본 적 없다. 박기태의 코뼈를 한 방에 부러뜨리기는 했지만, 그건 기습이었고, 그 날 손이 퉁퉁 부어서 보고서도 제대로 못 쓰지 않았는가.
“무기 사용은요?”
무기? 이래봬도, 정치하겠다고. 내가 자식인 걸 지워버리고 싶어 안달이 나서, 미국에서 사는 것처럼 조작한 사람이 내 유전적 아버지다. 노출될만한 흔적 남기지 않으려고 군대는 가보지도 못했는데···.
“마법이나 초능력, 기타 육체능력은 병원에 입원해 계신 동안 이미 저희도 확인했구요.”
퇴원 후 일주일간 헬스장을 매일 나가고 있기는 한데···. 김교수님 과제 보상으로 ‘운동효과증진’을 받은 게 있어서 매일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긴 하지만···. 어제 풀업 시도가 이마까지는 올라갔다.
그래도 달리기. 달리기랑 지구력은 확실히 일반인은 아닌 것 같은데···.
“자료를 보면 달리기는 확실히 준 헌터급이기는 하신데···. 저희가 괴물들과 올림픽 종목을 겨루지는 않을거라.”
뭐, 뭐가 더 있는데?
“정신분열증이나 망상 증세가 약간 있지만, 이건 거의 모든 헌터들에게 조금씩은 있는 거고, 특이사항이랄 것도 없습니다.”
자, 정리해보자. 싸움도 못하고, 무기도 못 다루고, 마법이나 초능력도 없는데, 달리기만 잘하는 애매한 정도의 정신병자.
그게 나라는 거잖아.
“장현곽씨는 많이 약합니다.”
단호하게 뼈를 때리는 멕케인의 얼굴이, 병원 식당에서 게딱지를 핥아 먹던 유진의 얼굴과 오버랩된다.
···
“현곽이 형은 약해.”
“왜? 나도 시체개 한 마리 잡았거든? 아직은 그래도···.”
“시체개 백마리 정도는 나도 마법 없이 1분안에 다 잡을 수 있어. 마법 쓰면 0.1초? 처음부터 그랬음. 지금은 시체개 따위 게이트 입장만 해도 사라질 걸? 형이 들어간 게이트는 사실상 보스 1인만 있는 게이트야. 그래서 인원제한도 2명뿐인거고.”
···
“현곽씨···.”
오버랩 되었던 유진의 얼굴이 다시 메케인의 얼굴로 돌아온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넥타이를 풀어 헤친다.
그리고 옅은 핏줄이 드러난 구릿빛의 목 아래부터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나간다.
단정했던 그의 슈트가 서서히 벌어진다.
마침내 바지춤에서 꺼낸 셔츠의 마지막 단추까지 모두 해체한 그는 나에게 슬픈 눈빛으로 말한다.
“자, 보세요.”
이상한 상상하지 마라. 이거 여성향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나. 장현곽 사십일세.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이 방을 나가는 순간 목을 매달거다.
이게 웹소면 당장 연재 중단이고, 드라마면 조기 종영이다.
어디 주인공 없이 잘 해봐···라···.
“제 주능력이 자가회복입니다. 단일 능력으로는 전 세계 탑 쓰리는 됩니다. 보셨다시피 온 몸이 불타도 숨만 붙어 있으면 머리카락 한 올까지 그 전 길이로 돌아옵니다.”
난 그의 도발에 놀라 질끈 감았던 눈을 서서히 떴다.
분명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완벽하게 탄탄한 그의 몸에는···.
가슴 털이 수북했다. 금색이었다.
시이발. 연중이다! 연재 중단이라고!
···.
그의 몸은 마치 난자당한 것과 같은 상처가 무수했다.
일부는 아물었지만, 채 아물지 않은 것처럼 꿈틀대는 상처도 워낙 가득해서, 상처 사이에 요즘 흔하게 하는 레터링 타투 하나 넣을 공간조차 부족해 보였다.
“이게 능력이 부족한 헌터의 현실입니다.”
***
멕케인의 도발은 나의 여자화장실 광란의 나체쇼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병원에 입원한 이후 보기 시작한 다른 헌터들의 판타지 웹소설을 보며 키워왔던 헌터 라이프에 대한 꿈을 무너트리기에 충분했다.
게이트 안에서 시체개나 마시멜로맨을 처음 만났을 때의 공포가 다시 느껴지고 있었다.
‘이게 헌터 트라우마?’
주학문 원장의 칠성급 리조트(병원) 생활로 인해, 잠시 잊고 있던 공포가 다시 나를 잠식해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유진도 칭찬했던 나의 강한 정신력은 이내 그것을 이겨내고, 꼼꼼하게 옷을 정비하고 자리에 막 앉은 멕케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물었다.
“내근직이 되면, 월급은 나오나요?”
“다행히 헌터는 완전 면세가 되어, 공제항목 없이 전액 현금으로 지급됩니다.”
그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좋다.
“초봉은 월 1,770,800원. 9급 1호봉 공무원 월급과 동일···.”
“나, 안 해.”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나 장현곽 41세(-20세).
이번 생은 한국제일대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남자다.
거기서 얻은 인맥으로 게이트 안쪽이 아닌, 게이트 밖에 있는 악惡(예를 들면, 박기태나 그 여자)을 물리치고, (미래의 유재석보다 먼저)제일건설을 차지해서, 마침내 이 소설(이라면)을 회귀 경영 성공물로 만들어 낼,
상남자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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