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멕케인의 피라미드 제국.

불혹의 재수강. 22화. 멕케인의 피라미드 제국.
“나 안한다고.”
헌터 사이에는 나이나 서열, 그 따위 것 없다.
네가 대표면 뭐. 어쩌라고.
“월급이 마음에 안드셔서 그런 것 같은데, 초봉일 뿐입니다. 소득세, 지방세, 건보료, 국민연금. 전부 해당사항 없이 전액이 현금입니다. 게다가 분기별로 지급되는 기타 수당도 전부 마찬가지로 면세입니다.”
“안. 한. 다. 고.”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20년만 늦게 제안했으면 잠시나마 고민이라도 해보겠지만, 지금 내 통장에는 교수님이 보내주신 소소한 11억이 고이 잠들어 있다.
아저씨, 1,770,800원으로 11억 모으는데 얼마나 걸리는 줄 알아? 600개월이 넘게 걸려. 전부 저축을 해도 50년이 걸린다고.
“지금···.”
내가 단호히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이었다. 멕케인의 낮지만 다급만 목소리가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 문을 여시면, 보안규정 때문에 앞으로는 그 뒤에 나올 다른 조건들을 들으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저 들으시면, 지금 그렇게 자리를 박찬 것도 후회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멕케인은 한국말을 너무 잘했다. 그리고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고 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잡이를 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꼈다. 한 손으로 테이블 위 유리잔의 커피를 입에 가져가며 멕케인에게 턱짓을 했다. 계속 해보라는 뜻이다.
“앞서 말씀드린 월급은 대한민국 정부가 제공하는 것입니다. ROKGO의 모든 비헌터 직원이 받는 급여입니다. 뭐, 호봉은 똑같이 적용되지만, 형식적인 겁니다.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지만, 정부가 국제사회에 자신들도 세계를 지키는 것에 일조하고 있다는 증거로 활용하기 위한 수단이죠.”
계속 해봐.
“엄밀하게 말해 ROKGO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WGO의 산하기관입니다. 대통령실 소속이기는 해도 대통령에게는 명령권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한민국의 행정부, 사법부, 나아가 국방부까지 움직여야 합니다. 순수 헌터를 제외한, 록고와 헌터 관련자만 해도 전국에 수만명입니다. 해당 금액은 그에 들어가는 지출을 숨기기 위한 수단이고요.”
사설이 길다··· 혓바닥이 길면 실속이 없는 법인데···.
“장현곽씨가 소속될 헌터관리팀만 말씀드리자면, 대통령의 긴급명령과 동일한 권한을 가진, 수사권이 주어집니다.”
수사권? 경찰이나 검사가 하는 그거? 그러니까, 일이 더 많다는 거잖아···.
“검찰총장이 할 수 있는 수사지휘권한과 동일합니다. 대한민국 검사나 경찰이라면 누구에게든 명령하고 수사지시를 할 수 있습니다. 수사뿐 아니라 압수나 구금 영장도 법원의 검토 없이 즉시 발부됩니다.”
대··· 대박인데?
“마찬가지로 비선출직 공무원에게 업무지시도 가능합니다. 거기에 더해, 대한민국 국군 한정, 최대 사단급 군사 병력의 동원과 독자적 작전 권한도 주어집니다.”
뻐··· 뻥이지? 그 정도면 그냥 대통령이잖아.
“확인하고 싶으시면 계약서에 싸인만 하시고 바로 나가셔서 전화 한통만 하시면 됩니다. 51사단 연결해서 전병력에 내곡동 앞마당으로 부대이동 명령을 내리시면 한 시간 안에 확인 가능할 겁니다.”
“헌터 관리팀이라는 말단 부서 직원이 정말 그런 게 가능··· 하겠습니까?”
마침내 내가 굳은 표정으로 꾹 닫고만 있던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절대 을이 되지 않겠다는 각오로 하던 반말도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멕케인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헌터 한 명이 작정하고 문제를 일으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음···. 내가 아는 헌터라고는 아직 둘 뿐이다. 마법사 안유진과 기사 천인국. 유진이는 싸우거나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지만 하늘을 막 날아다니고···.
천인국은···.
“···고작 사단 병력으로 막을 수 있을까요?”
“이해하셨군요. 뭐 모든 헌터가 제4의 기사처럼 단 칼에 빌딩을 무너트리고 미사일 폭발에도 살아남지는 못하겠지만, 싸울 수 있는 헌터들에 비한다면, 딱 말단 사무직이 가져도 되는 정도의 권한이죠.”
이해는 가는데···. 그 거미인간 영화에 보면, 좋은 대사가 있거든?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였던가?
“해외 체류시에는 전세계 어디든 외교관 대우를 받게 됩니다. 면책특권은 기본이고요. 거기에 전화 한 통이면 전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설 멤버십에 VIP로 등재할 수 있습니다.”
헐리웃 영화, 악마의 변호사에 나오는 알파치노처럼 그가 나를 유혹한다. 모르긴 몰라도 나는 지금 탐욕에 젖은 키아누리브스의 표정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만약 미국 라스베가스로 놀러 가신다고 하면, 퍼스트 클래스로 갈까요? 아닙니다. 뭐하러 좁고 답답한 대중교통을 이용합니까? 전용기를 징발하면 되는데···.”
싸인··· 싸인 해야 한다. 이건 무조건 싸인을 해야 한다. 계약서 어딨어?
단아한 김비서씨? 거 일 똑바로 안 하네. 계약서부터 딱 내 앞에 놔뒀어야 할 거 아냐?
···.
몇 가지 권한과 설명은 더 이어졌지만, 그것들을 전부 듣기 전에 내 마음은 이미 90% 이상 기울어 있었다.
“좋네요. 개인적으로 유용할 수 있는 활동비조차 무제한이라니···. 근데, 여기까지는 제가 록고 직원인 동안 가지는 권한인 거고. 순서가 반대로 된 것 같은데, 제가 해야 하는 구체적인 일, 그리고 정년은 어떻게 되나요?”
“꼼꼼하시네요. 하하.”
당연한 거다. 라스베가스 최고급 멤버십? 쓸 시간이 없으면 있으나마나한 것 아니겠는가?
천인국만 해도 살면서 LA를 일주일 다녀온 것이 전부다. 그 마저도 일 때문에.
내가 천인국만큼 바쁘다면, 그러니까 앞서 말한 특권들을 일로만 써야 한다면, 결국 나는 공무원 월급 1,770,800원만 내 손에 쥐게 되는 것이다.
“헌터관리팀이라고 만들어 두었지만, 사실 하실 일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현국씨가 처음에 말씀하신 뒤치닥거리라고 하는 일들도 2차장실이 아닌 1차장실의 헌터관리팀이 하는 일입니다.”
“··· 이거 사기죠? 사람을 뭘로 보고···. 저 보증 안 섭니다. 대출도 안 받을 거고요.”
“주 업무는 ‘헌터관리’라고 보고하시고, 평소에는 최대한 많은 헌터들과 노시면 됩니다. 친하게. 재미 있게. 최선을 다해서. 이미 놀고 계시지만, 더 열정적으로 놀 수 있게.”
“···최대한 많은?”
···.
몇 가지 부연 설명을 더 듣고 나자 내가 해야 하는 업무가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나는 게이트를 경험해 보았다. 끔찍했다.
비록 격정적인 전투는 없었지만, 그 보라색으로 흘러내리는 세상만으로도 내 정신이 덩달아 무너져 내렸다.
다행스럽게도 그 때 뒤따라 들어온 기사 천인국이 게이트와 정말 가까운 곳에 있었고, 끊임없는 LA타령으로 내게 잡생각 할 틈을 주지 않았으며, 겁나 강해서 게이트도 금방 공략해주었다.
하지만 만약 이 중에 하나라도 부족했다면. 내가 아직까지 지금과 같은 정신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헌터들은 누구나 반쯤 미쳐있다고 했다. 정상인들과는 다르다. 무너지지 않으려면 정서적으로 유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이 겪는 세상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게이트 밖에도 존재해야 했다.
더 이상 게이트를 들어갈 수 없는 망가진 헌터들이 세상에 숨어서, 방구석에서 웹소설이나 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헌터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근데 왜 전가요?”
전 제가 그렇게 사교성이 좋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만···.
“천인국. 안유진···.”
둘의 이름을 말하는 멕케인의 눈빛에서 웃음기가 전부 사라지고 진지해졌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미친놈들인, 기사와 마법사가 교대로 찾아와, 먼저 안부를 묻고, 어떻게든 스케쥴에 틈을 내서, 병문안을 가는 초보 헌터가 또 있을 것 같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 두 사람에게 현곽씨가 보증 서 달라고 부탁하면 별 고민 안 하고 서 줄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멕케인··· 고향땅을 버리고 이 먼 타지까지 온 이유가··· 네트워크 마케팅···.
즉, 피라미드 제국을 건설하려는 것이었냐?
나는 계약서에 싸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전에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나의 원대한 회귀 라이프의 제일 중요한 계획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 생각났다.
“저기 혹시···, 제가 제일건설 주식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멕케인은 나를 ‘회귀한 게이트 헌터 힐링 액션 웹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아직 ‘회귀 경영 성공물’의 주인공이 되는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
ROKGO 본부 건물을 벗어난 나는 방금 받은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입력했다.
각종보안에 관련한 동의만 수백번을 해야 했던 계약서에 싸인을 하고 단아한 김비서씨의 안내를 따라 내 사무실을 구경했다.
개인 사무실이라지만, 멕케인의 대표실보다 조금 작은 방에 아무것도 없는 네모 반듯한 공간이었다. 그러고는 앞으로 업무에 관련한 지시나 문의는 전부 내 담당 사무실 매니저에게 전화로 지시하면 된다며 포스트잇에 적어온 번호를 내밀었다.
헌터이자, 하루아침에 ROKGO직원이 된 나는 헌터 관리자. 즉, 매니저가 되었는데, 헌터 매니저의 매니저가 있다니···. 문득 이러다 헌터 매니저의 매니저의 매니저가 또 있는 것은 아닐까 궁금했다.
어쨌든 번호를 입력한 나는 이곳에 올 때처럼 버스를 타고 집에 가려다가, 몇 시간 안되는 시간만에 덜컥 노예계약을 체결하려는 악마의 속삭임에 현혹된 것은 아닐까 의심되어, 확인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아무 택시에 올라탔다.
그리고 학교 근처 낡은 아파트 대신, 남산 아래에 있는 5성급 호텔 이름을 댔다.
“빠르게 갈까요?”
기사님의 질문에 별 의미 없이 ‘그러세요’라고 대답했더니, 내곡동에서 호텔 정문까지 10분도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나도 이십년 가까이 운전을 해왔지만, 내곡동에서 이태원까지 경부고속도로와 한남대교를 이용해, 이정도 속도로 이동이 가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한민국에서 비밀이 가장 많은 내곡동, 그 안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록고 본부 건물 앞에 택시가 서 있을 때부터 의심해봐야 했다.
의심 많은··· 아니, 의심이 많다고 믿었던 나는 몇 가지 확인을 위해 호텔에 온 것이다.
그래서 로비에 앉아 휴대폰에 저장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통화연결음 두 번 만에 상대쪽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네, 말씀하세요.]
무미건조했다. 하지만 유일한 내 부하직원 같은 사람이다.
“남산 하이얀호텔. 예약해줘. 제일 좋은 방으로. 지금. 로비야.”
앞으로 많은 일을 함께할 직원인데, 나이 어린 신입이라고 무시당하면 안 되기에, 나 역시 고저 없는 목소리로 용건만 말했다.
[···네.]
짧은 대답만 남긴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헌터관리자님. 저는 앞으로도 관리자님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할 매니저의 매니저 OOO입니다. 시키실 일은 더 없으신가요?’
같은 자기소개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네, 알겠습니다’나 ‘네, 즉시 처리하겠습니다.’라는 두 마디도 아니고···.
‘네’하고 먼저 전화를 끊어버리다니. 괜히 심술이 났다. 언젠가 따끔하게···.
··· 따위의 쓸 데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호텔직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장현곽님?”
“네?”
“저는 하이얀호텔 VIP 전담 매니저 하이연이라고 합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편하게 말씀하세요. 혹시 다른 짐이나 일행분은 안 계신가요?”
VIP 매니저라는 호텔리어는 내 매니저와 달리 상냥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나를 최고급 스위트룸으로 안내했다.
***
야경은 좋았다. 하지만 그 외 시설은 나름 고급스러웠지만, 철원에 있던 헌터 병원에 비하자면 그냥 편한 숙박업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도 야경은 좋았다. 게이트 따위 먼 얘기 같은 평화로움···.
우리 인류 중 누군가는 이 평화로움을 위해 계속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문득 서글퍼졌다.
넓은 스위트룸 거실에서 계속 야경만 보고 있자니, 문득 낡은 아파트로 돌아가 침대 옆 좁은 통로에 상을 펴놓고, 유진이랑 라면에 밥이나 말아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머리를 흔들어 씻었다. 무슨 그런 무서운 생각을···.
그래도 이왕에 수백만원이나 하는 호텔에 왔으니, 내일 아침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에서 버티고 말겠다.
톡톡.
어? 톡이 왔네···.
톡창을 열어보니 타이밍 좋게도, 유진이었다. 괜히 반갑다.
[록고 직원 하기로 했다며? 그거 귀찮은데···. 그냥 게이트나 가자. 괴물 잡는 게 제일 쉬워.]
아니야··· 그거는 네가 천재라 그렇다니까···.
톡톡.
답장을 보내려는데 또 다른 메시지가 와서 열어 보았다.
[록고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난 방금 게이트에서 나와서 다음 게이트로 이동중이다. 오늘만 세 번째다. 다음에 만나면 USGO의 LA지부 직원 스티브와 있었던 이야기를 해줘야겠군.]
멕케인과 대화를 하고 났더니 두 사람의 문자에 귀찮음보다는 약간의 감동이 밀려오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들 때문에 취업이 된 것인데···. 다음에 만나면 내가 밥을 꼭 사야겠다.
톡톡.
뭐야 또 있나?
톡톡.
멕케인이다. 더 할 말이 있나? 귀찮은데···.
톡톡.
이건 누구야? ‘단아한 김비서’? 스스로 자기 별명을 저렇게 썼다고?
톡톡.
톡톡.
톡톡···.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톡에 새로운 친구로 계속 등록되고 있었다.
토도도도도도톡.
내 번호가 록고 데이터베이스에 공유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밤새도록 울리는 톡톡 소리때문에 1박에 수백만원짜리 호텔에서 역대급 불편한 잠자리를 보내야 했다.
톡톡.
[대한민국 대통령 김명신]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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