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시간석을 구해주세요. (6)

불혹의 재수강. 31화. 시간석을 구해주세요. (6)
2층에 고립된 윤두광과 고유환을 뒤로 하고, 나는 박광수를 들쳐 업고 계단을 올랐다.
등 뒤로 마시멜로맨의 발광하는 소리와 나를 따라 올라오는 쌕쌕이들의 계단을 뛰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3층..
4층..
5층이랬나?
탈칵.
“여기야.”
한층 위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윤태진의 목소리가 차례대로 들려왔다.
5층 도착.
“여기는 우리가 막고 있을 테니, 안으로 들어가. 다들 기다리고 있어.”
다행히 5층에는 쌕쌕이들이 거의 없었던 듯싶었다.
나를 따라 올라온 몇 마리의 쌕쌕이와 싸움을 시작한 윤태진과 2조장을 뒤로 하고 나머지 일행들이 숨어 있는 5층 아동복 매장으로 들어갔다.
나는 서둘러 박광수를 등에서 내렸고, 도끼를 내려 놓은 2조 힐러 아저씨가 그를 받아 눕혔다.
박광수는 이동중에 생긴 쇼크때문인지 의식이 없었지만, 다행히 숨은 쉬고 있는 듯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다.
“장기가 손상된 것 같습니다. 안에 피가 고였는데, 일단 출혈부터 막고 자세한 것은 좀 더 안전을 확보하고 살펴봐야겠습니다.”
설명할 시간에 치료를 해!
화를 낼 필요는 없었다. 힐러 아저씨도 처음이다. 수술대나 실험실이 아닌 곳에서 뼈가 부러지고, 살이 갈라지고, 장기가 손상된 중환자를 마주할 거라고···.
헌터가 되기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진이 때문에 보기 시작한 웹소설에서는 ‘힐!’ 하고 주인공이 스킬만 외치면 바로 회복하던데···. 현실에서 그의 치료 작업을 보니, 야전병원 수술실 풍경이나 다름없었다.
손끝으로 상처 부위를 찾아 벌리고, 수술이 필요한 부위를 스캔한 다음 혈관을 이어 붙인다. 부러지며 흩어진 뼈 조각의 위치도 하나하나 찾아 결합한다.
무기력하게 박광수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소리없이 등 뒤로 다가온 함정술사 소녀가 내 손을 잡았다.
“미안해요···. 나 떄문에···.”
어린아이···. 나를 선생님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훈련소의 다른 군인이나, 지휘관들에게 하던 것처럼?
어른스럽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했을 노란색 염색머리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다.
아니, 우리 모두 머리 안쪽은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다.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감싸 안는다.
아이는 떨고 있었지만, 나의 무심한 손길에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괜찮아. 아무도 안 죽어. 오늘은.”
나는 작게 읊조리고, 계단의 쌕쌕이들을 정리하고 들어오는 윤태진과 눈을 마주쳤다.
“여기는 안전해?”
“우리가 있는 동안 한 두 마리씩 계속 나오기는 했는데, 그 정도면 다시 이동하며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나랑 2조장이 교대로 싸우면 휴식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고.”
다들 눈치가 빠르다. 말을 하지 않아도 윤태진은 내가 다시 아래로 내려갈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반대편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면 될 거야. 괜찮은 거 맞지···?”
누구? 나? 아니면 아래층?
“물론이지. 안전하게 도망가는 거 내가 봤으니까, 금방 데려올게.”
1층부터 옥상까지 천장 없이 뻥 뚫려있는 로비를 통해 2층에서 우리가 서로 갈라지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눈치로 내가 빈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
나는 윤태진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매장을 벗어났다. 옆의 또 다른 아동복 명품매장에서 쌕쌕이가 천천히 걸어 나온다.
‘느려.’
나는 신경질적으로 놈의 머리통에 장도를 꽂아 넣었다.
안 죽어?
장도를 들지 않은 반대 손을 녀석의 이마에 올려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장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긁어내렸다. 살이고 뼈고 할 것 없이 얼굴부터 아랫배까지 차례대로 갈라지는 것이 손 끝으로 느껴졌다.
‘괴물을 찾아. 걔들 잡는 게 제일 쉬워.’
유진이의 장난같은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할 게 없는 게이트에서 마주칠 수 있는 모든 상황 중에 가장 쉬운 일은 괴물을 사냥하는 것이다.
헌터는 포식자여야한다.
그래서 헌터다.
두어 마리의 쌕쌕이를 더 죽이며 이동하자 반대편 에스컬레이터 앞, 카페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커다란 통 유리창으로 백화점의 바깥 모습이 한눈에 펼쳐져 있었다.
보라색으로 흘러내리는 하늘과 도시.
그리고 저 멀리, 도마뱀?
이라기에는 너무 크고. 영화에서 보던 초식공룡··· 이라기에도 훨씬 거대했다.
강철로 만들어진 것 같은 거대한 괴물.
잠실의 종합운동장 정도 되어야 사육이 가능할 법한 빌딩만 한 괴물.
괴물도감에서 봤는데, 너무 대충 봐서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줌인.’
쌩큐글라스의 증강현실이 수 킬로미터 밖의 괴물을 확대해 보여준다.
거대한 도마뱀의 위에는 전에 사당역에서 보았던, 가면 같은 걸 쓴 또 다른 작은 괴물이 올라서 있다. 그리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날듯이 뛰어다니며, 그것들에게 칼을 먹이는 완전무장한 제4의기사의 모습도 보인다.
‘형··· 빨리···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거 아는데···. 그래도 좀만 빨리 해줘요.’
천인국이 질 수도 있다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가뜩이나 나의 불안감을 자극하고 싶어하는 보랏빛 세상에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
난 시선을 돌려 아래층을 향해 멈추어 버린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
2층에는 백화점에 남아있는 거의 모든 괴물이 몰렸던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마시멜로맨은 반대편의 내가 올라갈 때 이용한 비상계단 앞에 멍하니 서 있다는 것이었다.
수십구의 쌕쌕이 시체가 로비 가득 널부러져 있다. 사이사이 아직 살아 있는 쌕쌕이들도 있지만, 내 눈에 띄었으니, 죽으면 된다.
‘피?’
쌕쌕이들도 피는 흘린다.
하지만 괴물의 피는 바닥에 남지 않고 증발해버린다. 마치 죽을 때까지 계속 싸울 수 있도록 그들의 몸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하지만 쌕쌕이들 시체 사이로 붉은 피가 어딘가로 길게 이어져 있다.
따라간다.
구석의 엘리베이터 앞까지 이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QUID EST VERITAS
끼데스트베리타스
아까 에스컬레이터에서 멀리 보였던 그래피티다. 가까이서 보니 글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알 수 없는 제법 많은 그림들이 겹쳐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이질적으로 뜯겨진 사람의 팔 하나가 쌕쌕이 시체 사이에 슬쩍 보인다.
‘설마··· 아니겠지?’
“으아아아악!”
잘려있는 팔을 확인하기 위해 뻗던 손을 멈추고 비명 소리가 들린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너무 많은 쌕쌕이의 시체들이 높은 무덤이 되어 쌓여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헤치고 올라가 반쯤 열려있는 엘리베이터 안쪽을 보았다.
“혀..현곽!”
사람으로 돌아와있는 고유환의 목소리였고, 그의 품에 안겨 다시 비명을 지르려던 윤두광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까무러쳤다.
“흑흑. 현곽아.”
오른팔이··· 없다.
소드마스터는 머리부터 발 끝까지 온 몸이 찢겨 있었다. 눈도 하나 없고, 크게 갈라진 배에서는 내장이 일부 흘러나와 있었다. 두 다리는 모두 부러진 듯 반대로 꺾여 있다.
고통 때문에 기절한 상태에서도 그의 하나 남은 왼손에는 마치 원래의 신체 일부라고 주장하듯, 롱소드가 강하게 쥐어져 있었다.
헌터는 죽는 것도 쉽지 않다.
일반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정신력과 신체, 회복력은 어쩌면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다.
숨이 완전히 멈출 때까지, 자신이 주었던 고통을 돌려받으며, 차라리 죽고 싶다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쉽게 안식을 허락받지 못한다.
“혼자··· 엘리베이터에서···. 흑흑. 혼자··· 나는 도울 수가···. 쓰러져서도 계속···.”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보인다. 등 뒤에 고유환을 두고, 두 다리가 부러져 서 있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 남은 팔로 마지막까지 문틈으로 칼을 박아 넣었을 윤두광.
처절한 소드마스터의 모습이 충분히 그려진다.
살릴 수 있을까?
5층까지 들고 가는 동안 숨이 붙어 있을 수 있을까?
초보 힐러가 게이트가 완전히 공략되는 순간까지 그의 숨을 붙들고 있을 수 있을까?
윤두광은··· 그때까지··· 살아 있고 싶을까?
너무 많은 생각들이 머리속을 어지럽힌다.
누가 결정을 해줬으면···.
기사란 놈은 뭐하고 있는 거냐.
게이트 공략 리더라면 그깟 좀 큰 괴물하고 힘 자랑하고 있을 시간에 중요한 결정과 판단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
또 다시 내 안의 분노와 원망이 사방으로 뻗어 나온다.
‘너는 대체 뭘 한 거냐! 동료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데 짐밖에 되지 않는 놈!’
내 눈을 들여다보는 고유환의 눈이 공포로 물든다.
“나는··· 나는···.”
반짝.
뭐지?
윤두광을 끌어안고 울고 있는 고유환의 손에 쥐어진 무언가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살릴 수 있어···. 살 수 있어···.”
뭐야? 뭐냐구.
이 감정···.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 기분.
고유환이 손에 쥔 주먹만 한 붉은 보석을 높이 든다.
마석이다.
고유환의 마석을 쥔 손이 바닥을 향해 힘차게 떨어진다.
“안돼!”
나는 손을 뻗어 엘리베이터 바닥과 고유환의 주먹 사이에 손을 밀어 넣었다.
끄윽···.
날카로운 보석이 고유환의 내리친 힘에 의해 내 손의 근육을 찢고 박혀들었다.
누군가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으면, 폭력이 아니라는 뜻인가? 거, 되게 법률적인 AVS다.
마석은 귀환석으로 알려져 있다. 한 명의 목숨을 대가로 나머지를 게이트 밖으로 귀환시키고 게이트를 닫는다.
WGO는 초보 헌터들에게 딱 거기까지만 정보를 공개했다. 단 한 명의 희생을 막기 위해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까 봐. 혹은 반대로 너무 쉽게 그것을 사용할까 봐.
그러나, 그 한 명은 게이트에 들어온 전체에 의해 선택된다. 랜덤이 아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희생 가능성이 거의 없는, 기사나 마법사가 아니면 대부분이 알지 못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어차피 그 한 명은 윤두광이 된다.
나머지 인원들이 모두 부정적으로 보는 인물.
유대감이 낮아 가장 먼저 죽어도 될 인물.
마석을 깨트려서 사용해도 어차피 윤두광이 죽는다면, 아직 죽지 않은 윤두광 하나를 살리기 위해 마석을 사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살릴 수 있어!”
이성을 잃은 듯, 고유환은 내 손에 박혔던 마석을 다시 뽑아 든다. 마석이 뽑힌 내 오른손에서 피가 뿜어져 나온다.
‘세이버!’
나는 팔꿈치까지 아려오는 고통을 참으며 이번에는 왼팔을 뻗는다.
Saver Watch에서 수백개의 실처럼 가는 촉수가 뻗어 나와 높이 든 고유환의 주먹을 감싼다.
‘회수해!’
[시간석 발견, 스캔을 시작합니다.]
촉수는 고유환의 손을 파고들어 마석을 감쌌다. 고유환의 팔은 그가 아무리 힘을 주어도 움직이지 않는다.
[스캔중···.]
[시간대를 확인합니다.]
[연속가능성을 확인합니다.]
[정상. 위험도. 없음]
[시간석을 회수합니다.]
그전의 게이트에서 한차례 보았던 메시지 알림과 함께, 시간석을 고유환의 손에서 빼았은 촉수가 내 손에서 장갑으로 변하더니 시간석을 회수해버렸다.
“대체 왜....”
“나중에 설명해줄게.”
나는 허탈해하는 고유환에게 아무 대답도 해줄 수 없다. 그냥 지금은 윤두광을 살릴 방법을 최대한 빠르게 떠올려야 할 뿐이다.
쿠르릉 쾅!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충격이 연속으로 이어졌다.
나는 엘리베이터 천장에서 쏟아지는 잔해를 막기위해 고유환을 당겨 윤두광과 겹쳐서 둘을 내 몸으로 덮는다.
퍼엉. 콰앙.
충격음이 백화점 안에서 연속으로 들려오며 엘리베이터가 다시 크게 흔들린다.
‘아 거, 마시멜로새끼, 나가면 넌 뒤졌어. 중환자도 있는데···.’
흔들림이 멈추자마자 나는 바닥에 내려놓은 나의 장도. 장도粧刀연을 집어 들었다.
거대괴수와 홀로 싸우고 있는 천인국이 생각났다.
지금 기분이라면, 나도 그처럼 마시멜로맨과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씹어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고양감이 충만했다.
이 아저씨가, 지방 빼고 다 씹어먹어주마···.
일순 각오를 다지는 내 앞으로 보랏빛을 날려버리는 은빛 섬광이 스쳐 지나갔다.
“다 끝났다. 바실리스크 라이더. 역대 최단기록. 오늘 세웠다.”
제 4의 기사 천인국이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의 표정으로, 엄지 손가락을 세우고 내 앞에 서 있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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