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보니 한숨만

힘겹게 눈을 떴다.
반쯤은 물에 잠겨 있다.
다행스럽게도 어디 다치거나 이상이 있는 건 아니다.
배고 별로 안 고프고, 그런대로 상태는 나쁘지 않지만 속이 조금 더부룩 하다.
어제의 기억도 또렸하게 생각났다.
기억에도 문제 없다.
죽는가 했는데 살아 있는 거 보니 죽을 팔자는 아니었나 보다.
주위를 둘러보니 섬인 거 같다.
태양이 하늘에서 내리 쬐는 거 보니 정오가 다 되어 가나 보다.
어제의 난폭했던 바다는 어느새 잔잔함이, 마치 떨림이나 일렁임이 하나도 없이 너무나 고요했다.
하늘은 너무나 푸르고 맑았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이 공간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그 동안의 슬픔도, 아픔도 다 씻겨 나가고 호흡 가득 즐겁기만 하다.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먼저 주변 상황부터 살피자'
자그마한 섬이다.
사방 2~300m 쯤 되는 거의 직 사각 모양의 섬이었다.
작은 모래 해변과 자그마한 갯벌도 있다.
섬의 뒤편으로는 제법 높은 산도 있고, 약간의 평지도 있다.
'일단, 정찰부터 하고 쉴 곳도 찾아보고, 먹을 것도 챙겨보자'
산으로 올라가기 전에 지팡이나 뭔가 손에 쥘 만한 몽둥이부터 구했다.
제법 괜찮은 크기의 나무들이 군데 군데 보였다.
그 중 쓸만한 막대기를 주워 들고 섬을 둘러 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맨 위로 가서 주위를 둘러 보자 싶어 조심스레 올랐다.
완만한 경사로에 처음 보는 나무들과 풀들이 제법 보였다.
대충 살피며 평지에 발을 들였다.
'누군가 사는 곳인가?'
전형적인 밭의 모양과 과수원 같다.
'앗~ 그런데 너무 넓은 공간이다.
아까 저 밑에서 볼때는 약간의 경사진 곳에 평평한 곳이 조그마 했는데
올라 와서 보니 너무나 넓다.
섬도 그렇게 크지 않더니.
'이게 웬일이래'
도깨비 장난도 아니고, 내 눈이 이상한건지 아무리 비벼봐도 바뀌는 거 없다.
수천 평은 되어 보인다.
아니 수만 평이려나?
땅의 면적 가늠에는 젬병이라서 헥타르나 정보라고 해 봐야 잘 모른다.
'내가 무릉도원이 왔나? 설마 여기 잠깐 있다가 나가면 벌써 몇년은 흐른거 아니겠지?'
이왕 이렇게 됐으니 주인도 만나 보고 싶어서 밭과 괴수원으로 나뉘어진 중간 길을 가로 질렀다.
30분을 걸은 거 같다.
아무도 없다.
근처에 집도 오두막도 보이지 않는다.
앞에는 또 다른 산 중턱이다.
일단 산을 오르고 보자는 생각에 산을 올랐다.
뭔 나무인지는 모르겠지만 특이한 열매가 달린 나무가 여러 종류다.
한쪽은 바위가 많은 험지로 되어 있고, 한 쪽은 과실수가 많은 곳이다.
산을 오르니 정상 부근에 돌로된 건물이 보였다.
사방이 탁 트여 전경이 아주 시원했다.
나는 대한민국의 예절 빼면 시체인 사람이라 정중하게 불렀다.
"계세요?"
"실례합니~"
-왈칵
검은 머리에 약간 이국적으로 생긴 할배가 나왔다.
옆에는 여자 아이인지 남자 아이인지 잘 구별이 안가는 열서너살로 보이는 아이와 함께였다.
"안녕하세요. 무단으로 남의 사유지에 들어 왔습니다. 조난 당해서 여기가 어딘지도 모릅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허~. 여기는 누구도 들어 올 수도 없는 곳인데 어떻게 들어 왔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 갑시다. 내 집에 온 손님이니 박대하지 않으리다. 아주 극진히 대접해 드리지.허허허"
"감사합니다.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사실 젊은이가 쓰러져 있는 걸 보았소. 잠시 다른 일 하다가 가 볼려고 했는데 먼저 오셨구려.허허허"
"아. 제 이름은 정우입니다.이정우요. 정우라고 불러 주세요.그리고 말씀 편하게 해 주세요. 아직 많이 어립니다"
"허허. 그럼 말 편하게 놓겠네.정우 젊은이~. 여기는 내 손녀일세. 이름은 이리나일세. 일단 들어 가세나"
돌로 된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니 거실도 아닌게 휑하다.
내부의 공간이 사방 50미터는 되는 거 같다.
바닥이 기하학적인 아름다운 문양이 그려져 있고 희미하게 야광인 거 같은빛이 나온다.
천장이 무려 30미터는 되는 것도 같은데 점점이 박혀있는, 빛이 나는 전구 같은게 박혀있다.
굉장히 밝다.내부는 쾌적하고 은근 시원하다.
옆으로 계단이 있고 계단으로 올라 가니 전망이 시원한 거실이 나왔다.
넓은 거실에는 소파와 그림이....있고, 주방인 듯 싶은 곳과 기묘한 조형물들. 화분 몇개로 굉장히 심플하면서도 고급진 인테리어가 나름 조화를 이룬다.
또, 안 쪽으로는 복도인 곳에 방인 듯 싶은 문이 8개가 있다.
3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개방감이 확 눈에 들어 온다.
소파에 앉자, 어느새 시원한 음료수를 챙겨온 할배가 손녀와 맞은편에 앉았다.
"한잔 들게나. 내 집에 외부인이 처음으로 방문했네. 인상이 나쁘지 않고 선한 것 같으니 여유를 좀 두고 쉬다 가도 좋네. 바로 간다면 바로 돌려 보내 줄 수고 있네. 자네의 처지가 어떤지는 모르겠네만."
"감사합니다. 형편이 형편인지라 여유롭지 못해서 딱히 이 한 몸 불러 주는 데는 없지만 가고 싶은 곳은 너무 많습니다. 하루만 신세 지다 가겠습니다."
"그럼 편하게 쉬시게. 리나야 쉴 방으로 안내 해 주고 오너라~"
"네. 할아버지~. 아저씨 이리 오세요. 저는 리나라고 불러 주시면 돼요."
"고마워~"
복도 안으로 들어가서 제일 끝 방의 문을 가르켰다.
"저 방에서 쉬시면 돼요~. 쉬시다가 식사 때가 되면 불러 드릴께요. 꾸벅"
"고마워~. 이쁜 숙녀님~
너무도 깜찍한 아이였다.
요정이 있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어도 혹여 싫어 할까 봐 차마 쓰다듬지 못하고 보내고 말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 와서 둘러 보니 침대와 옷장 같은 것과 TV도 보였다.
혹시 옷장을 열어 보니 옷이 셀수도 없이 가득 걸려 있다.
이상함을 느끼지도 못하고 무난한 옷으로 꺼내어 옷을 갈아 입었다.
마음대로 남의 옷장의 옷을 입었다고 뭐라 할지도 모르는 걱정을 털어 내고 침대에 몸을 늬어서 몇 번 뒤척이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리나야~"
"네. 할아버지~"
"우리 리나가 그동안 혼자 쓸쓸 했지? 이 할애비가 잘못하는 바람에 그만 리나를 너무 힘들게 했지~"
"할아버지. 나 괜찮아요.할아버지만 옆에 있으면 다른 건 다 필요 없어요."
"한창 재롱 떨며 행복해야 할 나이에 우리 리나가 철이 들어 버렸구나. 이 할애비가 니 장난감을 하나 만들어 주마. 저놈을 니 하인으로 만들어서..."
"앗~ 안돼요. 그렇게 하면 나쁜짓이에요. 가끔 바깥 세상에 놀러 가면 돼요. 저 오빠도 많이 힘들어 하는 거 같았어요. 느껴졌어요. 저는 괜찮아요"
"이쁜 내 손녀. 너무 착해서 어찌할꼬~"
살며시 손녀를 안아 주며
"저 놈한테 갔다 잠시 살펴 보고 오마."
"나쁘게 하지는.마세요~. 할아버지"
"오냐~. 허허허"
정우가 잠들어 있는 방문이 슬며시 열리고 노인이 들어 왔다.
잠이 들어 있는 정우의 이마에 손을 들어 올리고 기억을 들여다 보았다.
성장 과정과 초등과 중등을 지나 학창 시절을 보고 결혼과 이혼을 보며, 가게의 시작과 끝을 지나 오늘이 오기까지 .....
'...흠! 행복한 시절도 힘든 시절도 있었지만, 생각은 바르게 컷구먼. 심성이 아주 괜찮은데 조금 물러 터졌고, 끈기가 부족하지만 습득이나 창의성은 아주 뛰어 나구먼'
다음날.
빈 속에 허기를 느끼며 잠에서 깨었다.
주변 정리를 하고 어제 벗어 둔 옷을 챙겨서 화장실에 넣고 거실로 나왔다.
"마침 깨우러 갈려고 하는 중이었는데 딱 맞게 일어 났구먼"
"네. 감사합니다. 잘 자고 일어 났더니 몸도 마음도 상쾌합니다. 이리나 꼬마 숙녀님도 잘 잤어요?"
"리나라고 불러 주세요. 저는 오빠라고 부를께요.괜찮죠?"
"정말 그래도 괜찮아요? 나는 오빠라고 불러 주면 너무 좋죠~"
그렇게 의견 일치를 보고 아침을 해결했다.
"정우 젊은이~. 어디 정해 놓은 곳 없으면 당분간 여기서 생활 해 보는게 어떤가? 일도 하고 내 실험도 도와 주고 겸사 겸사. 월급도 팍 팍 눈 돌아 가게 주겠네. 보너스에 휴가에 ...."
"그런데 할아버지! 먼저 궁금한게 있어서요.
"말 해 보게. "
"먼저 여기는 어디인가요? 그리고 할아버지는 ....한국 사람인지 서양사람인지 ..... 또 여기는 뭐하는 곳인가요? 제가 여기 지낸다면 뭘 해야 하는지도..."
"정우 젊은이가 궁금한 것에 대한 답을 알려면 먼저 계약에 사인을 해야만 하네. 비밀스럽지만 흔히 세상이 말하는 불법적인 것은 없네. 다만 여기는 외지이다 보니 월급은 아주 아주 많이 주네만. 그 조건에는 내 손녀의 친구도 필요 하다네. 조금은 힘든 일도 있을 거네만. 자네한테는 손해가 아닌 이익만 가득 할거네. 물론 인내가 필요 한 일도 있네. 계약기간은 3년 단위로 하지. 어디 한번 해 볼 텐가?"
"음.음.음......"
"한 삼년만 일 해도 세상에 나가면 넉넉 할 걸세. 보상이."
옆에서 초롱 초롱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지켜 보는 리나를 보니 나도 모르게...
"네. 할께요. 계약!"
해 버렸다.
계약서를 읽어 보고 사인을 했다.
몇 가지 요상한 종목이 맘에 걸렸지만 불법적인 건 없다는 말과 설마 손녀도 있는데 손녀와 이야기 동무라고 했는데 별 다른 일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하루의 일과표를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세세하게 짜인 계획표가 첨부 된 계약서였다.
대충 살펴 본 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에는 각 종 교육(?)과 오후에는 연구실 보조 및 실험참여(?)와 가끔 밭과 과실수 관리 및 수확. 토요일은 교육과 리나와 놀아 주기.일요일은 휴무와 리나와 놀아 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알게 된 노인의 정체와 이 섬의 정체와 손녀의 정체는 한마디로
혼이 안드로메다로 가출해 버렸다.
노인과 손녀는 용생이란다.
이세계에서 로드와 같이 차원 연구 하다가 제각각 흩어진 후 겨우 손녀와 도착한 곳이 여기였단다.
대한민국의 동해에 떨어졌다가 해저 땅을 솟구쳐서 섬을 만들었단다.
마법으로 공간을 비틀어서 유리창 너머에서 보는 것 같이 실체가 공간 속에 숨었단다.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하지만 어떤 물리력도 기운도 못 찾는 공간이란다.
어렵다.
유지는 언제까지 인지,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아무튼 영원 지속 하단다.
세월이 흘러 차츰 적응이 되기도 하지만 오만 욕이 노인에게 붙을 때도 있었다.다만 리나의 할배라는 것 때문에 입 밖에 내 뱉지 못하고 입안에 웅얼 거리고 막상 입 밖으로는 망할 영감이 최고 수위의 욕이었지만.
오전에는 마법 교육과 검술과 체술을.
오후에는 육체 개조라나 뭐라나. 그냥 시술 아닌 시술과 현대 용품과 무기는 물론 배와 우주선까지 제작하랴. 각종 영양제부터 발모제 살빠지는 약들.
병균과 질병 관련 의약품 등 안가리는게 없었다.
물론 리나까지 엄청난 능력을 보였다.
들의 풀(?)과 과실수는 지가 알아서 잘 컷고 병균이나 해충도 없이 홀로 청청하네.
나만 죽어 나는구나.
맞고 터지고 엎어지고 구르고, 온갖 영약(?)은 다 맛보고.....
털이 빠지다가 다시 나고, 말랐다가 살이 찌고,기절도 몇 번을 했는지 기억도 다 안 난다.
국방부의 시계는 그래도 돈다고 하듯이 여기 동해의 숨겨진 섬에도 시계는 잘 돌아 간다.
하늘 볼 시간은 없어도 땅만 보면 시커멓고, 곧 죽을거 같아도 아침만 되면 또 활력이 넘치네.
하루 하루 쌓이고 월급은 한 번에 몰아 준다고 하는데 맛보기만 보았다.
한 달 1kg은 될 거 같은 금덩이 한 개씩.
'ㅎㅎㅎㅎㅎ'
웃다가 울다가...이러다가 미치는 건 아닐거고.
어느 덧, 시간이 흘러 3년간의 계약 만료일이 다가 왔다.
이제는 돌아 가고 싶었다.
리나의 애교와 슬픈 눈빛을 보니 절대로 못 벗어 날 거 같다.
노인도 이제까지는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앞으로는 많이 편할 거라고 했다.
그만큼 기초가 중요 했고, 이제는 내가 봐도 폼이 많이 올랐다.
'혹시 나 천재일지도....'
손에서 불덩이가 나가고 얼음 화살과 불 화살이,전기가 날아 가고
검에서 기운이 나오고, 10미터 절벽은 두 번 디딤으로 올라 갔다.
100m달리기도 7초도 안 걸리는 거 같다.
하지만, 리나는 사랑스럽다.
한번도 못 이겼다.
3년 더하면 마법으로는 못 이겨도 검이나 체술로는 이길 수 있을 거 같다고 노인이 말했다.
결국 연장 계약 했다.
기념으로 일주일간의 휴가를 얻었다.
반지와 팔찌와 목걸이를 선물로 받았다.
아공간과 섬을 오갈수 있는 팔찌, 방어를 위한 반지와 항상 처음과 같은 상태를 만들어 주는 힐링 목걸이였다.
아직 마법의 성취가 낮아서 인첸트가 된 기물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공간에는 한국 돈과 달러가 가득했다.
연구의 완성품인 것들도 몇가지 들어 있다.
야영 장비들.
물놀이 장비들.
의식주에 필요한 것들.
심지어 탈 것도 있다. 자전거나 오토바이와 자동차도 있다.
보트도 있다.
아공간이 운동장 만 하단다.
'일단은 집으로 가자~'
텔러포트로 마을의 한적한 냇가로 이동했다.
시골은 젊은 사람들이 거의 다 떠나고 나이가 많은 분들만 남아 있는 마을이 거의 태반이 넘는다.
그러다 보니 낮이고 밤이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이 없다.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변한 것이 눈에 뜨지 않는다.
아마도 세월이 많이 흐르지 않은 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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