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중하니까

부우우우우움 부우우우우움
폰의 진동이 계속된다.
원영은 일단 폰을 무시한 채 연주를 계속 이어갔다.
그런데 잠깐씩 끊어지기도 하던 폰의 진동은 쉴 줄을 모른다.
부우우우우움 부우우우우움
잠시 끊어지기도 하지만 곧 다시 울린다.
쉬지 않고 떨어댄다.
의자에서 울려대는 폰의 진동은 원영의 엉덩이를 거쳐 전신으로 전해지며 끝내 몸서리가 쳐지게 만든다.
결국, 멈추고 마는 원영의 두 손.
원장의 용건이 뭘지 짐작은 갔다.
신경도 쓰이고, 마냥 무시할 수만도 없어 폰을 집어 든 원영.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요란한 도 원장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박격포탄으로 넘어온다.
원영의 귀에서 폭발하듯 터지는 원장의 목소리.
[야, 너 왜 학원에 안 나와? 콩쿠르 나간다면서 연습 안 해?]
당연히 원영의 콩쿠르를 걱정해서 한 전화는 아니었다.
“연습하고 있어요.”
[연습하고 있다고? 어디서?]
“지난번에 조율···, 아니, 친구네서요.”
급하게 둘러댄 원영.
[조율은 왜? 학원 피아노 조율이 이상해서 안 나온다는 거야?]
“아뇨. 피아노는 문제없죠. 소리도 훨씬 좋아졌고.”
[근데 왜 안 나와?]
“그냥, 친구네가 편해서요.”
[네가 피아노 치는 친구가 어딨어?]
“있어요. 원장님이 제 친구 다 알아요?”
[야, 너 그럼 다 망치는 거야. 친구인지 뭔지, 걔도 피아노 치는 애인가 본데, 애들끼리 모여서 무슨 연습을 한다고 그래! 시시덕거리고 놀기나 하지. 학원에서 해야 내가 가끔 봐주기라도 하지. 안 그러냐? 흠흠.]
자기가 말해놓고도 찔리는지, 도 원장의 말끝에 헛기침이 따라붙는다.
하긴, 학원에서 원장이 원영이를 봐준 적은 있다.
연습실 창문 너머로 빼꼼히 쳐다보고 간 적이 몇 번 있었으니까.
말 그대로 봐 준 적만 있다.
“······.”
원장이 저렇게 나오니 원영은 말문이 막힌다.
딱히 할 말도 없어 아예 대꾸를 포기하자, 잠시 침묵.
결국, 성미 급한 도 원장이 사탕 껍질 까듯 먼저 본심을 까보인다.
[야, 네가 없으니까 애들 스케줄이 꼬이잖아. 콩쿠르는 콩쿠르고 네가 봐 주던 애들은 계속 봐 줘야지. 넌 애가 왜 그렇게 책임감이 없니?]
열정페이 한 푼 준 적 없는 도 원장이 책임감 운운하니 원영도 듣고만 있을 순 없었다.
가뜩이나 연습이 중단돼, 통화하면서도 짜증 게이지가 마구 오르던 중이었다.
원영의 목소리 톤이 급격히 포르테로 바뀌었다.
“네! 그래서 저도 이젠 책임 좀 지고 살려고요! 저한테나, 피아노한테나. 학원 애들한테나!!”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애들이 원장님한테 교습비 냈지, 저한테 낸 거 아니잖아요? 그리고 저 이제 콩쿠르 끝나면 바로 입시 준비해야 돼요. 학원에서 애들 데리고 바이엘 칠 시간 없어요!”
[뭐? 야! 너···]
도 원장이 흥분을 못 참고 부들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원영은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생각지 않았던 원영의 격한 반응에 원장도 찔리는 게 있는지 바로 또 전화를 해오진 않았다.
다만 분을 참느라 씩씩거리고는 있을 것이다.
* * *
옆에서 원영의 통화를 듣던 이수.
“방금 입시라고 했어?”
“아, 그건 그냥, 둘러대다 보니까.”
원영의 감정이 격해지니 생각지도 않았던 입시 얘기까지 튀어나왔다.
정해진 계획도 없는데 그냥 튀어나온 말이다.
사실, 원영도 피아노를 전공하고 싶기는 하다.
그래서 음악예술종합학교든 음대든 가고 싶다.
장학금 제도가 있으니 형편이 어려워도 궁리를 잘 하면 아예 길이 없지는 않다.
다만 장학금을 확보하려면 그만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해야 한다.
실기든, 필기든.
원영이 이번 콩쿠르에 목숨을 걸다시피 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어떻게든 콩쿠르에서 입상만 한다면, 음예종에 비벼볼 커리어는 될 거야!’
하지만 그동안 눈으로만 봐 주는 학원 원장 밑에서 독학하는 피아노 연습으로 입상을 바라기는 쉽지 않았다.
원영의 재능이 아무리 특별하다 해도 혼자 하는 공부는 느리다.
그리고 한국의 입시 제도는 느린 공부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사이 이수는 입시에 관련된 사항을 찾아보기 위해 머릿속에 네트워크의 화면을 띄워놓고 있었다.
“입시라는 게···경쟁이 상당히 치열하네. 어떤 데는 콩쿠르보다 경쟁율이 더 센데?”
“당연하지. 콩쿠르야 꼭 나올 애들만 나오지만, 입시는 너나없이 덤벼드니까. 근데 형, 어딜 보면서 얘기하는 거야?”
허공을 오가는 이수의 시선에 이상함을 느낀 원영이 물었다.
이수가 급히 화면을 지우고 원영에게 시선을 붙였다.
음악을 함께 사랑하는 동료이자, 동생이라 부르는 사이라지만 거기까지.
정체를 의심받아선 안 된다.
“아, 그냥. 생각 좀 하느라. 습관이야. 생각할 때 괜히 허공을 두리번거리는 거.”
원영이뿐만 아니라 조 여사한테도 자주 둘러댔던 말이라 익숙하다.
원영도 지금은 그 말에 매달릴 기분이 아니다.
무심코 도 원장에게 뱉은 말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괜히 마음이 어지러웠다.
아직 일 년이나 남았지만, 입시를 생각할 때마다 원영은 거대한 성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콩쿠르 연습에 전념하느라 잊고 있던 입시의 무거운 중량감이 갑자기 어깨 위로 내려앉는다.
입으로는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축 처진 원영의 양어깨.
“갑자기 왜 그래? 원장은 별 얘기 안 한 거 같은데?”
“형이 어떻게 알아? 통화 내용 듣지도 않았으면서.”
‘음. 듣긴 했는데···.’
이수의 남다른 청력에 대해서도 역시 밝힐 수는 없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게 정말 쉽지 않다.
“입시 때문에 그러는 거야? 경쟁률이 세서?”
“아냐. 그리고 걱정하지 마. 형한테 입시 준비까지 시켜달라고 조르지는 않을 테니까. 나도 자존심, 아니 책임감 있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별말도 안 했는데 괜히 발끈하는 원영.
이럴 땐 끓어오르는 감정을 분출할 곳이 필요하다.
이수가 다시 악보를 가리켰다.
“입시는 아직 멀었잖아! 콩쿠르는 열흘 뒤고!”
이수의 지적에 다시 시작된 원영의 연주.
~ ♬ ♬ ♩ ♬ ♬ ♩ ♬ ♬ ♩ ~
며칠 사이에 또 늘었다.
* * *
한영그룹 민회장의 자택.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가 놓인 채린의 연습실.
원영이 연주하던 카푸스틴 소나타가 나란히 울려대고 있는 곳.
~ ♬ ♬ ♩ ♬ ♬ ♩ ♬ ♬ ♩ ~
아무리 튼실하게 방음 공사를 한 연습실이어도 스타인웨이 그랜드 C-227의 소리를 감출 순 없다.
연습실 옆을 지나다 문 앞에서 잠시 채린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채린의 엄마이자 한때 국내 정상급 피아니스트였으며, 현재는 영음 학원을 이끄는 서지영 영음 재단 이사장이다.
“쟤 피아노 치는 게 좀 달라졌네? 웬일이야? 완전 전력투구네? 어차피 좀 실수해도 웬만하면 봐 줄 텐데···웬일로 저렇게?”
한때는 연주회 때마다 신문 비평이 달릴 정도의 피아니스트였지만, 이제는 피아노 건반을 만져본 게 언제쯤인지 가물가물한 서 이사장.
재혼 상대라는 힐난을 무릅쓰고 재벌가의 며느리로 들어온 이후, 서지영은 피아노 의자에 앉을 일이 별로 없었다.
남편이 그룹 회장에 취임한 뒤로는 덩달아 바빠졌다.
이제는 자신의 주도로 만들어진 영음 재단을 꾸려가는 이사장 업무만으로도 스케줄이 빡빡하다.
물론 그녀가 작심한다면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을 시간 정도는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재벌가의 사모님이라고 해서 워라밸을 포기할 수는 없다.
나는 소중하니까.
그녀는 더 소중하니까.
상위 0.1%의 워라밸은 특히나 더 소중하니까.
그러므로 그녀를 위한 투자 시간과 워라밸에 필요한 사교 시간 등을 빼고 나면 채린의 피아노조차 봐 줄 시간이 없다.
어차피 본인도 원하지 않고.
그저 실력 좋은 레슨 티처를 붙여주는 게 서지영의 최선이다.
어린 시절, 채린이 엄마를 찾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때도 서지영은 바빴다.
늘 양손을 비벼가며 서지영 이사장을 원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수두룩했으니까.
자신이 낳지도 않은 두 오빠를 챙기는 척하는 것만으로 이미 육아에 질린 서지영이다. 게다가 채린은 어려서부터 고집이 드셌다.
남들처럼 자신에게 빌거나 아양을 떨지도 않고 오히려 떼만 쓰는 고집쟁이 딸아이였다.
육아에 열심이었어도 다루기 쉽지 않은 딸이었다.
“얘는 정말 왜 이래??!! 무릎을 꿇고 빌어도 해줄까 말까인데 뻗대기는 왜 이렇게 뻗대냐고!”
서지영 이사장의 가슴은 좁았다.
딸에게 내어줄 마음자리가 넓지 않았다.
연습실 앞에서 채린의 연주를 듣다 잠시 채린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던 서 이사장.
~ ♬ ♬ ♩ ♬ ♬ ♩ ♬ ♬ ♩ ~
여전히 연습실 밖으로 들려오는 채린의 격렬한 연주.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던 서 이사장.
이내 바쁜 걸음으로 연습실 앞을 떠났다.
잠시 후.
- 콰아아아아아앙
폭탄이라도 터지는 듯한 피아노 소리.
채린의 두 손이 닿을 수 있는 모든 건반 위에 한꺼번에 폭발하듯 내려꽂힌다.
“아냐! 아냐! 이 소리가 아냐!!!”
한창 연습에 몰두하던 채린은 연습을 중단한 뒤, 다시 고개를 가로젓는다.
채린은 그날 이후, 이수가 들려줬던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어떻게 친 거지?”
똑같은 악보, 똑같은 피아노다.
그런데 채린의 피아노에서 나오는 소리는 이수의 소리와는 달랐다.
누가 들어도 다른 사람이 치는 소리였다.
채린도 피아니스트였던 엄마의 재능을 닮아 귀가 밝다.
남들이 쉽게 잡아내지 못하는 소리의 차이도 그녀는 제법 구별을 해낸다.
그래서 견딜 수가 없다.
자신이 치는 소리와 이수의 소리가 다르다는 게 너무나 분명했기에.
머릿속에서는 녹음이라도 한 듯 이수의 소리가 리플레이되는데, 정작 채린의 손끝에서는 그 소리가 안 나온다.
아주 천천히 한 음씩 어루만지다 보면 어쩌다 비슷한 소리를 얻기는 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연주를 할 수가 없다.
연주는 거의 본능적으로, 습관적으로, 손이 따라가 줘야 한다.
한 프레이즈(악절)라면 모를까, 한 음, 한 음의 강약을 따져가면서 소나타 전체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칠 노릇이다.
머릿속에는 정답이 있는데 손으로는 자꾸 오답을 써내고 있으니까.
여우 귀를 가진 오디오 파일들이라면 공감할지도 모른다.
남의 집에서 들을 땐 만족스러운 소리를 뿜어주던 오디오 시스템이, 정작 나 혼자 들을 때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렇지 못할 때의 답답함.
케이블 하나 바뀐 게 없는데 소리가 달라졌을 때의 어이 없음 같은 답답함.
분명 모든 조건이 같은데, 남의 집에서 들었던 소리가 지금은 안 나올 때의 답답함.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대 피아니스트 리흐테르가 강림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서너 살 많아 보이는 청년이 냈던 소리를 나는 못 내고 있다니···.
그것도 내가 매일 몇 시간씩 두드려대는 피아노를 가지고.
채린의 연습이 다시 중단됐다.
“정말 미치겠네. 나도 어떻게든 그 소리를 내 보고 싶은데.”
채린의 콩쿠르 참가는 본인이 자청한 욕심이었다.
금수저 예고생이 아니라 정말 피아니스트로서 가능성이 있는지 스스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래서 장차 피아니스트로 독립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장식 없는 피아노 의자 대신 푹신한 이사장 의자를 택한 엄마의 전철을 밟기 싫었다.
금수저 중에는 피아노를 전공하는 이들이 꽤 된다.
하지만 그들 중 정작 전문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발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혹 유학이라도 다녀오면, 귀국 독주회라며 지인들에게 리사이틀 초대장을 돌리는 게 전부다.
그리고는 결혼과 동시에 피아니스트로서의 커리어는 끝.
적어도 채린이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경우는 그랬다.
자신의 친엄마, 서지영을 포함해서.
채린은 그런 시나리오가 싫었다.
그래서 피아노에 진심이었다.
그래서 지금, 미칠 것만 같았다.
콰광!
카푸스틴의 소나타 대신 천둥소리 같은 피아노 소리가 채린의 연습실을 쩡쩡 울린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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