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숙제

같은 날, 잘츠부르크 호텔, 임선희의 방.
벡커와 이십 여년 만에 만났지만 과거의 감회는 잠깐이었다.
임선희를 더 두근거리게 하는 건 미래에 있었다.
임선희가 선뜻 잠을 못 이루며, 이런저런 공상에 빠지기 시작했다.
무릇 위대한 이야기들도 시작은 한 줄의 상상이다.
시간을 여행할 수 있는 자동차가 있다면?
고릴라가 천 배쯤 커진다면?
미래의 인류가 로봇에게 멸망을 당한다면?
죽은 시체를 이어붙여 사람을 만든다면?
외계인이 지구에 온다면?
임선희도 한 줄의 상상을 시작했다.
"벡커의 낙점을 받게 된다면···?"
피아니스트 임선희의 숨은 창작욕구가 발동했다.
호텔방에서 잠을 잊은 채, 상상의 나래를 펼친 임선희.
“···그게 누구든 한스 벡커의 별이 된다는 거지?”
음악 도시 잘츠부르크에서 스타 탄생을 주제로 한, 작가 임선희의 첫 시나리오가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 * *
#1
시나리오의 첫 장면은 잘츠부르크에서 돌아온 직후, 임선희의 집.
딸 노유미의 책상 위에 몇 장의 CD와 악보 책들이 놓여 있다.
“이게 뭐야, 카푸스틴? 이런 작곡가도 있었나?”
노유미가 비닐 랩핑도 뜯지 않은 CD의 앞뒷면을 살피며 물었다.
“내일부터 연습 시작해. 일단 레퍼런스 음반부터 들어보고.”
“나 이제 곧 중간고사야!”
“중간고사? 그 악보는 네 인생을 건 시험일 수도 있어. 잔말 말고 거기에 전력투구해. 대신 남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고. 학교 선생이건, 친구들이건.”
“그건 왜?”
“글쎄,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해! 넌 네 인생 성적표를 다른 애들이랑 같이 받고 싶니?”
“언제까지 해야 하는데? 오디션이라도 보는 거야?”
유미의 말에 보일 듯 말듯 희미한 미소를 짓는 임선희.
“너 어릴 때 했던, 걸스카우트 구호가 뭔지 기억하지?”
“걸스카우트? ··· 아, 준비! 이거?”
유미가 걸스카우트의 경례 동작을 장난스럽게 해 보였다.
“미리 준비하라는 거야!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니까.”
설명이라고 뒷말을 붙여주기는 했지만,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지날 때까지도 유미는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준비!’만 해야 했다.
* * *
#2.
시나리오의 두 번째 장면은 올해 1월. 시내의 고급 식당이다.
배경은 올해부터 심사위원장을 맡게 된 임선희와 콩쿠르의 고정 심사위원들의 신년하례회, 또는 취임 축하 자리.
“중책을 맡게 됐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사실 저나 여기 계신 분들이나 이미 서로 잘 알고 있고, 또 콩쿠르에서도···”
의례적인 인사가 오갔다.
“축하드립니다. 교수님. 이제 진짜 영음 콩쿠르의 대들보가 되셨네요.”
“진즉부터 맡으셔야 했는데!”
의례적인 답례도 오갔다.
신년하례회란, 취임 축하 자리란 건 늘 그런 자리였으니까.
그런데, 임선희 입에서 의례적이지 않은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 영음 콩쿠르도 이제 좀 달라졌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너무 다람쥐 쳇바퀴처럼 콩쿠르를 꾸려온 건 아닌가 싶어서요. 마침 올해가 10주년이니 뭔가 획기적인 변화가 줄 때가 된 것 같기도 하고요···.”
흔히들 ‘취임 일성’이라고 하는 첫 멘트가 심상치 않다.
변화라는 말에 설렘보다 걱정이 앞서는 심사위원들.
어떤 변화를 말하려나 싶어 눈과 귀가 한 곳으로 모인다.
‘설마 심사위원 교체 같은 걸 의미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임선희, 얼른 대답이 없다.
성미 급한 심사위원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변화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구체적으로···.”
기다리던 말을 잡아챈 임선희.
곧바로 준비된 멘트를 날렸다.
“이를테면 지정곡부터 아주 파격적으로 가보는 거죠. 예를 들자면···음···뭐가 있을까···.”
의도한 쉼표.
생각하는 척, 떠올리는 척.
잠깐의 침묵 사이, 심사위원들의 눈과 귀가 임선희의 입에 집중되어 있을 때.
“말하자면 카푸스틴 같은 작곡가는 어떨까 싶은 거죠.”
“카···푸스틴···이요?”
“카푸스틴??!”
“애들한테는 너무 무리 아닐까요?”
여기저기서 놀라거나 반대의 의사를 전해오면.
“사실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아이들한테 베토벤의 소나타 완성을 요구하는 게 의미가 없는 거 같아요. 사춘기 갓 넘긴 얘들이 베토벤을 알면 얼마나 알겠어요? 어차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게 아니라면 베토벤이든 카푸스틴이든 상관이 없지 않겠어요?”
한스 벡커와 독일어로 나눴던 대화를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번역한다.
“하지만 기교적으로도 카푸스틴은 소화하기가 좀···아직 아이들이 재즈를 표현하기에는···.”
그나마 카푸스틴의 곡을 아는 심사위원이 한 번 더 제동을 걸어보겠지만, 그 대답의 번역판도 이미 준비되어 있다.
“그러니까 더더욱 카푸스틴이죠. 가능성을 보자는 거예요. 앞으로 얼마나 발전할지! 원래 콩쿠르가 그런 거잖아요. 특히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우리 콩쿠르는 더욱 그래야죠! 어려운 숙제지만, 그걸 던져놓고 풀이과정을 보자는 거예요. 완성된 걸 평가하는 게 아니라 가능성을 평가하자는 거죠! 어려운 숙제를 어떻게 풀어내는지!”
이쯤 목청을 높이면 다들 고개만 끄덕일 터.
게다가 아까부터 떠먹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음식 그릇들이 자꾸만 심사위원들을 재촉한다.
(인제 그만! 그 입으로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시라고요!)
그럼 이쯤에서 임선희도 마무리에 들어간다.
카푸스틴이란 마치 잠시 스쳐 지났던 생각이었던 것처럼.
“뭐, 당장 결정하자는 건 아니고요. 그냥 한번 이런 방향도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는 거죠. 이런, 음식 다 식겠네. 어서들 드세요.”
콩쿠르는 초가을이고, 지정곡 발표는 3개월 전쯤인 6월 초에나 있을 일.
반년이나 남았다.
아직 멀었다.
심사위원들은 입 본연의 역할에 충실히 음식들을 떠넣고, 씹고, 맛보고, 즐긴 뒤 만족스럽게 자리를 마무리할 것이다.
식당을 나설 때쯤,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서 카푸스틴은 지워져 있을 것이다.
그건, 한참 뒤, 다른 장면에서야 다시 떠올릴 것이다.
* * *
#3.
시나리오의 세 번째 장면은 인서트 화면, 짧게 삽입된 단편들이다.
임선희가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독일 베를린에 있는 한스 벡커의 동향을 알아보는 노력을 담은 장면들.
전화로, SNS로, 혹은 메일로.
“벡커 일정 좀 알아볼 수 있어? 한국에 언제쯤 온다든지. 한국이 아니어도 홍콩이나 일본이나 중국 투어나 방문 일정 정도.”
"같은 베를린에 있는데 그렇게 알기가 힘들어?"
“아시아에 오긴 온다고? 언제? 그건 모르고?”
“걔는 작곡가지, 스파이가 아니잖아? 뭐 그렇게 비밀이 많대?”
등등의 SNS와 전화와 메일.
하지만 세계적 인물이 된 탓일까.
벡커의 스케줄 알아내기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사이 5월도 이미 중순을 넘겼다.
6월이 되면 콩쿠르의 지정곡을 발표해야 한다.
이제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임선희는 결국 자신이 나서기로 했다.
시나리오의 네 번째 장면이다.
#4.
콩쿠르까지는 약 석 달 반 정도 남은 올해 오월 말.
베를린에 있는 한스 벡커의 작업실.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고 있던 벡커에게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임선희?”
작년 가을 잘츠부르크에서의 만남 이후 잊고 있던 임선희였다.
임선희의 메일은 인사도 생략한 채, 짧고 간결했다.
[지난해 잘츠부르크에서 말했던 ‘어려운 숙제’ 기억나? 9월에 한국에 오면 그거 확인할 수 있어.]
모니터를 쳐다보던 벡커가 기억을 떠올리느라 고개를 기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어려운 숙제? ···아, 카푸스틴?”
[이번에 내가 우리나라 학생들한테 어려운 숙제를 냈거든. 한번 확인해보고 싶지 않아? 카푸스틴으로 정말 가능성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지?]
모니터에 시선을 둔 채 살짝 미간을 찡그리는 벡커.
당시에는 일종의 비유로 했던 말이었지만, 임선희의 메일을 받고 보니 호기심이 발동하기는 했다.
이것도 일종의 임상시험이니까.
유럽에서도 유명한 한국의 ‘클래식 키즈’들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실험을 해 보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한국까지 방문해야 하는 건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메일의 마지막 줄이 걸렸다.
[아시아에 올 계획 있다고 들었어. 그렇다면 9월 중순쯤, 콕 짚어 15일, 내가 좌석 하나 마련해줄까 해. 가능하겠지? 웬만하면 와 주길 바래. 예전에 내가 네 숙제 도와준 적 있었는데··· 기억하지? 이번엔 네 차례라고 생각하고.]
“예전 숙제···?”
한동안 골똘해지는 벡커.
잠시 후, 무슨 생각을 했는지 벡커의 표정이 굳어진다.
어느새 창밖은 어두워져, 벡커 앞에 놓인 모니터의 푸른 빛이 한층 선명해지고 있었다.
[답 기다릴게. 어려운 숙제 출제자, 선희로부터.]
호기심과 과거의 기억까지 소환한 임선희의 메일은 결국 통했다.
벡커는 4개월 뒤의 스케줄 표에 한국행 일정을 급히 끼워 넣었다.
#5.
벡커에게 메일을 보낸 지 사흘째 되던 날.
임선희의 교수연구실.
벡커의 답신이 왔다.
9월 15일, 콩쿠르 일정에 맞춰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고맙긴 하네. 의리든, 빚이든, 옛정이든.”
벡커의 답 메일을 확인한 임선희, 만면에 미소를 띠며 급히 영음 재단에 전화를 걸었다.
“이번 주 내로 심사위원 회의 잡아주세요.”
벡커의 답신을 기다리느라 미뤄뒀던 심사위원 회의였다.
벡커가 끝내 안 오겠다면, 예년처럼 쇼팽이나 브람스를 지정곡으로 올리고 다음을 기약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다행히 숙제 검사를 하러 오겠다니, 이젠 진짜로 숙제를 내야 했다
영음 재단 사무국에서 심사위원들에게 급히 회의소집을 알렸다.
안건은 올해 콩쿠르의 지정곡 선정 건이었다.
#6.
콩쿠르가 열리기까지 정확히 석 달이 남은 유월 중순.
영음 재단 사무국 회의실.
임선희를 포함해 모두 다섯 명의 심사위원과 재단 사무국 직원이 원탁에 둘러앉았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임선희가 테이블 위에 악보 책부터 올렸다.
카푸스틴의 7번 소나타 악보집이었다.
‘진짜로 저걸 하자고?’
악보의 표지를 본 일부 심사위원들의 눈이 동그래진다.
심사위원들의 뇌리에 비로소 올 초, 나눴던 얘기가 긴급히 소환됐다.
‘빈말이 아니었네?’
카푸스틴의 악보를 본 심사위원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당시에도 이미 임선희의 소신을 충분히 들었던 터.
모두가 알고 있다.
같은 얘기 반복해 봐야 입만 아플 뿐, 결과가 달라지진 않는다는 걸.
임선희가 저렇게 악보 책까지 가져올 정도로 준비를 했다면, 이견을 내 봐야 좋을 거 하나 없다.
이사장 친구라는 것도 묵직한데, 이제는 심사위원장이다.
이 자리에 임선희의 무게를 감당할 심사위원은 없었다.
임선희가 제안한 지정곡은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결정됐다.
이제 임선희의 시나리오는 막바지로 향해간다.
혹시 모를 사람들의 시비를 우려한 회심의 카드.
아직은 참가 접수 전이지만, 자신의 딸인 노유미가 참가를 신청하게 되면 어떤 뒷말이 오갈지 눈에 선한 임선희.
이번 경기의 심판 위원장이라 할 수 있는 임선희가 공정성이란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한 가지 더. 올해부터는 심사의 공정성을 위해서 콩쿠르의 모든 참가자 연주를 동영상으로 남기는 게 좋겠어요.”
“동영상이요?”
“요즘 웬만한 국제 콩쿠르는 다 생중계를 하는 추세잖아요. 반 클라이번도 그렇고, 쇼팽 콩쿠르도 그렇고. 심사위원과 현장 관객뿐만이 아니라 너튜브 같은 서비스를 통해서도 언제 어디서든 콩쿠르의 경연을 확인할 수 있는 시대에요. 그러니까···.”
제안인지 설득인지 강의인지 애매한 임선희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임선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덥석 환영으로 받지는 않는 심사위원들이다.
‘이게 뭐 나라를 대표하는 국제 콩쿠르도 아니고, 규모가 크다 해도 고등학생 대상 콩쿠르인데 구태여 동영상 촬영까지···?’
기존에도 콩쿠르 무대 전경을 잡는 촬영은 자료용으로 시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선희는 참가자들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근접 촬영 카메라와 피아노 소리까지 제대로 잡을 수 있는 무대 마이크까지 준비하자는 것.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번 콩쿠르에 참가한 모든 참가자의 연주가 기록으로 남는다는 얘기.
지인 찬스, 은밀한 가산점, 혹은 건너건너 서로의 레슨 교습생들에 대한 우대 등등은 아예 꿈도 꾸지 않아야 한다는 얘기.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나는 아니지만, 올해는 아니지만, 내년엔 또 어떨지 모르니까.
만에 하나 자신의 채점표에서 책 잡힐 일이 생기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지레 제 발이 저린다.
살인죄도 시체가 없으면 유죄를 묻기가 쉽지 않다.
콩쿠르 영상을 남기는 건 괜히 긁어 부스럼일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도 별 탈이 없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은 게 심사위원 다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괜히 그랬다가 학부모들이 민원이라도 제기하듯 결과를 따지고 들면 어쩌나요?”
한 심사위원이 용기를 내서 임선희에게 조심스럽게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단호박 여사, 임선희다.
“콩쿠르 심사가 스포츠 경기 비디오 판독이에요? 개나 소나 맞다 틀리다 따지고 들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일은 내가 용납 못 해요. 그리고 별일이 없는 한, 동영상은 공개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이미 결정을 내린 말투다.
별일이란 게 어떤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심사위원 그 누구도 임선희의 시나리오를 읽어보지 못했다.
고로, 그들은 모두 봉황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는 황새와 같았다.
이대로 회의가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심사위원 중 한 황새가 제일 만만한 핑계인 예산을 거론하며 한 번 더 태클을 걸어봤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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