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感)의 승부

다가오던 걸음도 일시 정지한 상태.
그녀의 시선은 정확하게 이수를 향해 꽂혀 있다.
상대가 이수를 확인하기에는 먼 거리였지만, 이수는 상대의 미간까지 이미 확인했다.
이수에게도 매우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사람.
정 선생과 함께 조율하러 갔던 집의 그녀, 민채린이다.
‘아, 그렇지. 쟤도 카푸스틴을 연습하고 있었지.’
때마침 원영이 부스 밖으로 나왔다.
“형, 다 됐어.”
이수가 급히 원영을 잡아끌었다.
“원영아. 이쪽으로!”
“왜? 연습실은 이쪽인데?”
“어디든 빨리 가.”
이수가 원영의 팔을 당겨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뒤를 돌아보니 채린도 이쪽으로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이수가 속도를 높였다.
걷는 속도가 꼭 경보 선수 수준이다.
헉헉대며 뒤따라오는 원영.
다시 한번 뒤를 확인했다.
다행히 채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형, 왜 이렇게 빨리 가? 연습실은 저쪽이야”
“연습실?”
“그래 저쪽 건물인데, 거기 교실에서 콩쿠르 피아노와 똑같은 모델로 연습할 시간을 준대.”
“그럼 참가 학생들은 모두 거기로 가는 거야?”
“아마 그렇겠지. 기다리는 순서대로 연습 시간을 준다니까. 역시 큰 콩쿠르는 이런 게 다르네. 같은 모델 피아노에 적응할 시간도 주고.”
혹시라도 순서를 놓칠까 싶어 마음이 바쁜 원영이 이수를 재촉했다.
그런데 자리에 멈춰 선 이수.
“난 안 가.”
“왜?”
“그냥. 연습은 너 혼자 해도 되잖아.”
“왜 안 가는데? 형이 그래도 내 연주를 듣고 판단은 해 줘야지? 제자의 최종 리허설인데!”
“지적할 부분은 이미 다 했는데 뭘 더해? 내가 가르친 건 머리에 다 있잖아? 손이 안 되는 거지!”
“그래도 마지막으로···,”
“참가자들이 전부 거기서 기다린다며?”
“어. 연습실 순서도 콩쿠르 참가번호대로라고 했어. 홀수는 1번 교실, 짝수는 2번 교실.”
“그럼 오늘 참가하는 애들은 거기 다 모여 있겠네?”
“그렇겠지.”
“···그러니까 난 여기 있을게.”
“왜?”
평소의 이수답지 않게 뚜렷한 이유를 대기가 곤란했다.
할 수 없이 핑계라는 걸 사용했다.
“사람들 북적이는 거 싫어서. 내가 얘기했잖아! 얼마 전까지 나 심한 자폐였다고! 많이 좋아졌지만, 갑자기 안 좋아질 때도 있어.”
느닷없이 과거의 자폐를 언급하는 이수.
곤란한 일에 대한 핑계가 마땅치 않을 때는 과거의 병력이 도움이 된다.
이수도 이제 제법 사람 물을 먹었는지라, 급히 댄 핑계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수가 자폐를 들먹이니 더는 고집을 피울 수도 없게 된 원영.
“여기도 사람은 많은데···? 알았어. 할 수 없지. 대신 형이 기도나 해 줘. 정말 살이 되고 피가 되는 리허설이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 그, 그래.”
“고마워. 형! 나 그럼 먼저 연습실로 가볼게. 이왕이면 다른 애들 치는 것도 한번 들어보고.”
손가락 브이를 펼치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원영.
하지만 긴장된 표정이 숨겨지지 않는다.
원영이 연습실이 마련된 건물로 향하자, 이수는 아예 인적이 드문 숲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연습실이 위치한 건물에서는 벌써 학생들의 연습이 시작됐는지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이수가 핑계까지 대가며 연습실에 가지 않았던 건 당연히 채린을 마주치기 싫어서였다.
사실 이수가 딱히 채린과의 만남을 피할 까닭은 없었다.
다만 조금 전, 채린을 본 순간, 이수에게 지난번 채린의 연습실에서 만났던 기억이 번개처럼 떠올랐을 뿐이다.
이수의 청각을 매우 심하게 자극했던 앙칼진 그 목소리.
이수가 처음 실수로 건반을 세게 두드리자 기다렸다는 듯 쏘아붙이던 소리.
기억을 떠올리자 저장됐던 목소리가 한 음절도 빠뜨리지 않고 고스란히 재생된다.
“최 기사님!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예요? 누군데 함부로 틀렸다, 맞았다, 지랄하다가 남의 피아노를 부서뜨리냐고요!”
엄마 조 여사의 목소리에서는 감지되지 않았던 날카로운 적대감과 분노가 섞인 목소리.
오늘 채린을 다시 본 순간, 이수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바로 그 목소리였다.
이수는 그런 느낌을 굳이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물론 채린에게 오늘도 같은 소리를 듣게 될 거란 근거는 없다.
그러나 분명하게 이유를 밝힐 수 없어도 왠지 꺼려지는 게 있었다.
인간의 몸을 쓰면서부터 종종 겪는 현상이다.
원영이는 이런 걸 감(感)이라고 했다.
언젠가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하자면서 했던 말이다.
“형! 가위바위보는 감의 게임이야, 감!”
“감?”
“그래. 형은 대체 가위바위보도 안 해 봤어?”
원영의 말에 곧바로 가위바위보를 빠르게 검색했던 이수.
바로 반론을 냈다.
“가위바위보라는 건 심리적 게임의 일종 같은데. 승패의 확률은 3분의 1로 동일하고, 게임 이론으로 보자면···”
“그딴 말 필요 없고오~. 심리적 게임이란 게 뭐야? 내가 상대방 속마음을 알 수가 없다는 거 아냐? 그럴 때 감이 필요한 거라고, 감! 탁 상대방 표정을 보니 보자기 낼 거 같은 감! 그런 감이 오면 난 가위를 내지.”
“네 말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혀 없어 보이는데?”
“형! 그럼 지금 나랑 가위바위보 한번 해 볼까? 삼 판 이승!”
원영이 느닷없이 가위바위보 경기를 제안했다.
무모하게.
“가위~바위~보!!!”
원영이 가위바위보 선창이 끝나자마자 동시에 뻗은 원영과 이수의 두 손.
원영이 느낀 감의 결과로 내놓은 건 가위였고, 이수는 주먹을 냈다.
원영의 짧은 탄식.
“아이 씨, 형, 좀 늦게 낸 거 같은데?”
“아냐, 비슷하게 냈어.”
“좋아, 다시! 이제 연승 간다!”
한층 커진 원영의 가위바위보 소리.
더욱 힘차게 뻗은 원영의 손.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내놓은 손까지.
원영은 이번에도 가위를 냈고, 이수는 이번에도 주먹을 냈다.
인상만 찡그리고 있는 원영을 대신해 이수가 승부를 발표했다.
“끝났네.”
“아이, 치사하게 똑같은 걸 내냐~.”
“너는?”
“······, 한 판만 더 해보자!”
“그러지 마. 결과는 마찬가지야.”
“아니 더 해보자니까. 가만, 우리 이번엔 뭐라도 걸고 할까? 아이스크림 하나씩?”
원영이 자꾸 무모한 제안을 거듭한다.
원영이 떼를 써 그 뒤로도 몇 판의 게임이 이어졌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원영의 감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원영의 감은 절대 이수의 셀론이 제어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가위바위보가 시작되기 직전, 이수는 지난번 불량배들을 상대했을 때처럼 셀론의 반응 속도를 100배 정도 높였다.
이제 원영이의 손은 느린 그림이 된다.
원영이 무엇을 낼지 마음의 결정을 내리는 순간, 미세하게 손 표면의 움직임이 변하고, 동시에 앞으로 손을 내뻗으며 바뀌는 손의 모양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수의 눈에 들어온다.
그 사이, 이수는 원영이 파악할 수 없는 속도로 손의 모양을 바꾼다.
휙
한마디로 인간의 신경계로는 대처 불가능.
외계지능 이수에게 감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는 인간들의 이상한 버릇 중 하나로 느껴졌다.
인간이 말하는 감이란 것이 매우 불안정한 근거에 기초해 있음에도 확신하는 경우를 자주 봤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주 중요한 결정조차도 감에 의존하는 일도 있을 정도로.
그런데 이상한 건, 이수도 점점 감이라는 게 느껴진다는 것.
아무런 근거 없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느낌.
가위바위보 승부에서 원영의 감은 형편없이 무너졌지만, 이수가 인간의 ‘감’이라는 말을 아주 무시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몸을 사용하면서부터 생겨난 이상한 느낌.
뚜렷한 근거 없이도 생겨나는 느낌.
인간들이 예감이라고 표현하는 느낌들에도 신경을 써 보기로 했다.
그래서 이수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고, 아는 길도 물어서 가라는 매우 이상한 속담들을.
* * *
원영과 달리 민채린은 연습실에서의 리허설은 제꼈다.
이미 여러 번 같은 피아노를 연주했던 채린에게 짧은 적응 연습은 별 의미 없는 절차다.
대신 손의 근육을 풀어줄 핫팩을 매만지며 콘서트홀 내의 복도를 산책하듯 걸었다.
다만 아까부터 채린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기억이 있었다.
“꼭 그 조율사 같은데···?”
복도를 거닐며 혼잣말을 뱉는 채린.
채린의 머리에서 좀 전에 봤던 사람에 대한 기억이 쉽게 떠나지 않는다.
거리가 멀어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쳤던 피아노 소리 때문에 이번 콩쿠르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연습했었다.
청하지 않은 레슨을 받은 것처럼.
그만큼 그 이상한 조율사는 채린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내가 잘못 봤나? 하긴 조율사가 콩쿠르에 오진 않겠지. 나이도 고등학생 같아 보이진 않았고···.”
채린이 다시 핫팩을 말아쥐었다.
우연히 비슷한 사람을 보게 된 탓인지, 콩쿠르에 임하는 채린의 각오가 한층 더 단단해졌다.
* * *
콘서트홀 옆의 임시 연습실.
복도 밖에는 참가번호를 가슴에 단 학생들이 적당히 대열을 유지하며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 후, 자신의 차례가 된 원영이 연습실로 들어갔다.
주어진 연습 시간이 얼마 안 되기에 평소 잘 안되던 부분부터 먼저 손을 풀어보는 원영.
~ ♬ ♬ ♩ ♬ ♬ ♩ ♬ ♬ ♩ ~
그런데 본격적으로 연주를 하는 것도 아닌데 문밖이 수런거렸다.
~ ♬ ♬ ♩ ♬ ♬ ♩ ♬ ♬ ♩ ~
이윽고 원영의 연주가 점점 속도를 붙여가자 문밖의 수런거림이 더 커졌다.
“야, 쟤는 누군데 저렇게 잘 쳐? 어디 학교지? ”
“우리 학교 얘는 아닌데, 그럼 대선 예고?”
“예고가 아니라 유학파 아냐?”
“유학파는! 교복 입었던데? 근데 얼핏 보니 대선 예고 교복은 아니던데?”
“지방 예고인가?”
정작 원영은 피아노 연습에 집중하고 있어 바로 문밖의 소리도 전혀 듣지 못했다.
대신 멀찍이 숲에 있던 이수가 원영을 대신해 이들의 수런거림을 들었다.
진작부터 청각 신경을 확장해 연습실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던 이수.
학생들의 대화를 듣다 말고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그러자 갑자기 자기가 양 볼을 만져보는 이수.
“내가 언제 웃으려고 했었나?”
헷갈린다.
인간의 몸이란 이처럼 종종 의도하지 않는 동작이 일어나고는 한다.
* * *
영음 콘서트홀 이 층 복도.
오늘 콩쿠르가 열리고 있어, 이 층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상태다.
참가 학생들과 학부모, 기타 관계자들은 일 층의 객석만으로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다.
일 층에서 이 층으로 올라오는 길에는 파티장에서 흔히 보는 통제선이 처져 있었고, 이 층 복도에서 홀로 들어가는 복도에도 역시 같은 통제선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영음 재단에서 나온 사무국 여직원이 보초 서듯 복도 입구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이제 곧 콩쿠르가 시작될 시간.
그런데 심사위원장 임선희가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한 걸음 뒤에는 스타일리쉬한 백인 서양 남자가 뒤를 따르고 있었고.
우연히도 두 사람은 마치 커플처럼 모두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임선희를 알아본 여직원이 의자에서 일어나 복도 앞에 드리워진 통제선을 살짝 옆으로 밀었다.
“수고 많아요. 내가 부탁이 좀 있어서.”
“네, 어떤···?”
“이 분이 오늘 콩쿠르에 관심이 있으시다고 해서 제가 모셨는데, 일 층에 모시기는 좀 그렇더라고. 거기 학부모들이 오죽 시끄러워야지.”
“아. 네~”
여직원이 대충 임선희의 의도를 짐작했다.
“여기 이 층 객석에 자리를 마련해 드리면 될까요?”
“그래주시겠어요?”
왜 안 되겠는가.
콩쿠르 초대부터 지금까지 심사를 맡았고 이젠 심사위원장인데.
무엇보다 이사장과 말 놓고 지내는 사인데.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여직원이 열쇠를 돌려 육중한 출입문을 열고 두 사람을 이 층 객석으로 안내한 뒤, 본인은 출입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
“어때. 이쯤 앉으면 되겠어?”
“고마워, 선희.”
“천만에. 미안해. 더 좋은 자리를 만들어주지 못해서. 아래층에 레코딩 부스가 있기는 한데, 거긴 좀 답답해. 여기가 나을 거야.”
“여기쯤이면 아주 좋네. 이 홀, 꽤 괜찮네. 반향음도 좋고.”
‘이 홀의 주인이 너도 아는 그 서지영이야!’라는 말이 임선희의 수다 본능을 깨웠지만, 꾹 참았다.
시나리오 전개상, 지금 그런 코멘트는 잡소리요, 초 치는 소리였으니까.
“그럼 이따 봐. 끝나자마자 올라올게.”
의자 양쪽에 팔을 걸친 채 등받이에 한껏 몸을 기대는 남자.
어젯밤 서울에 도착했다는 벡커를 뒤로 하고, 임선희가 서둘러 일 층 심사위원석으로 향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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