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 투 런, 하드 투 마스터 (Easy to Learn, Hard to Master)

모든 준비 절차가 끝나고 드디어 시작된 콩쿠르 본심.
무대 위에는 피아노를 중심으로 두 대의 카메라와 마이크, 그리고 1층 부스에 무대 전경을 담을 카메라가 배치되어 있었다.
객석 맨 앞부분은 임시로 꾸며진 심사위원석.
1열과 2열, 그리고 옆의 통로 등을 이용해 임시 심사위원석으로 운영하고 있다.
방청객은 5열 이후부터 앉도록 통제선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심사위원석의 대화 소리가 방청객들에게 들리지 않게 조치한 좌석 배치다.
콩쿠르 진행을 맡은 영음 재단 직원이 마이크로 콩쿠르의 시작과 주의 사항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제10회 영음 전국 고등학생 피아노 콩쿠르 본심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참가자는 사전에 알려드린 대로···.”
장내 방송이 끝나고 참가번호 1번의 여학생이 무대 위로 조심스레 걸어 들어왔다.
꾸벅 심사위원석을 향해 허리를 숙인 뒤, 긴장된 표정으로 피아노 앞에 앉은 참가자.
잠시 의자를 당기는가 싶더니 곧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 ♬ ♬ ♩ ♬ ♬ ♩ ♬ ♬ ♩ ~
참가번호가 1번이라 그랬을까, 마음이 너무 급했다.
템포가 급해지며 미스 터치가 연속된다.
급히 서둔 만큼 중단을 알리는 벨 소리도 빨랐다.
‘땡!’
오늘 연주할 카푸스틴의 피아노 소나타 7번 1악장은 평균 속도로 연주할 경우 약 8분이 조금 넘는다.
물론 콩쿠르에서 한 악장을 다 듣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싹수 있는 연주는 3분 넘게 듣기도 하지만 심사위원들의 기준에 못 미치는 연주라면 1분도 안 돼서 땡, 소리가 울린다.
영음 콩쿠르는 스크린 오디션을 통한 예심을 거쳤다.
때문에 본선 참가자는 어느 정도 수준이 걸러진 상태.
그런데도 어떤 참가자들은 제대로 쳐 보지도 못하고 땡, 소리와 함께 조기 하차한다.
본선 지정곡에 대한 연습이 부족했든, 원래 실력이 모자랐든, 긴장으로 손이 굳었든.
방금 1번 참가자처럼.
* * *
그렇게 저마다 긴장된 표정의 참가자들이 하나, 둘 자기 순서를 마치고 이제 참가번호 14번, 민채린의 순서다.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여서일까, 다른 참가자들보다 훨씬 여유로운 표정으로 무대에 올라서는 민채린.
그도 그럴 것이 채린 스스로도 이번 콩쿠르는 어느때보다 자신감이 넘쳤다.
이유? 간단하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연습을 했으니까.
입상이 욕심나서가 아니라, 머릿속을 맴도는 그 소리,
분명 내 피아노에서 났던 소린데, 나는 못 냈던 소리,
기껏해야 스무 살 정도밖에 안 되는 조율사의 피아노 소리.
채린은 자기도 그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자존심으로 수도 없이 이 곡을 쳤다.
그리고 이제는 실전.
의자에 앉은 채린이 잠시 손을 한번 풀어본 뒤, 첫 화음을 때린 뒤, 곧바로 능숙하게 연주를 시작했다.
~ ♬ ♬ ♩ ♬ ♬ ♩ ♬ ♬ ♩ ~
“호오”
관객들 사이에서 탄성이 새 나온다.
지금까지 들었던 연주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연주.
심사위원석에서도 놀란 표정이 보였다.
연주 시간도 가장 길었다.
1악장의 중반까지 가서야 벨이 울렸다.
땡!
채린이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서자 사람들 사이에서 살짝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뉘 집 딸인지 잘 치네.”
술렁거리기는 심사위원석도 마찬가지였다.
“민채린이 실력 엄청 늘었네? 레슨 티처를 바꿨나?”
영음 예고에서 특강을 자주 해, 민채린을 잘 알던 심사위원이 먼저 운을 뗐다.
그러자 다들 한마디씩 덧붙였다.
“그러게요. 저 정도면 이사장님 입김 없이도 대상인데!”
“너무들 하십니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대상을 찍어놓으시다뇨. 호호”
농담 반, 진담 반을 나누던 심사위원들이 급히 입을 다문다.
심사위원장 임선희 교수를 의식해서다.
채린의 얘기에 휩쓸려 그녀의 딸 노유미 역시 콩쿠르에 나왔다는 걸 깜박했다.
“흐흠.”
헛기침으로, 또는 괜히 평가지를 뒤적거리며 표정을 굳히는 심사위원들.
채린의 연주를 들은 임 교수 역시 초반부엔 얼굴이 살짝 굳었었다.
이 정도까지는 예상 못 했다는 표정.
그러나 이내 평정을 되찾은 듯한 얼굴이다.
채점표에 체크를 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임 교수의 입가가 슬쩍 올라간다.
그 표정이 미소인지, 조롱인지 모호하다.
* * *
연주를 마친 채린이 방청객들이 있는 객석 대신 복도로 나왔다.
끝내 자신이 들었던 이수의 피아노 소리는 못 찾았지만, 본인이 생각해도 오늘 연주는 나쁘지 않았다.
조율사에게 지기 싫어 미칠 듯이 연습한 덕분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지난 삼 개월의 짐을 벗어 던졌으니 홀가분한 채린.
그냥 나갈까 싶다가 노유미 생각에 발이 멎는다.
한때 국내 정상의 피아니스트 자리를 다투었던 서 이사장과 임선희 교수.
그리고 엄마들의 뒤를 이어받아 나란히 피아노를 전공한 민채린과 노유미.
두 사람은 같은 학교에 다닌 적도, 서로 어울려본 적도 없어 잘 아는 사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엄마들 탓에 늘 서로를 의식해 온 사이다.
정작 당사자들끼리는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모호한 사이.
채린 역시 노유미의 연주가 궁금하기는 했다.
채린이 주머니를 뒤져 접어 넣었던 팸플릿을 펼쳤다.
콩쿠르의 주의 사항과 참가자들의 이름, 순서 등이 기재된 팸플릿이다.
노유미의 순서를 확인하던 채린, 눈이 찡그려진다.
"얘는 콩쿠르 나올 거면 일찍 일찍 하지, 왜 이렇게 신청을 늦게 한 거야?"
이번 콩쿠르 참가자의 순서는 접수 순서를 기준으로 정해졌다.
참가자 명단 속 노유미의 참가번호는 44명 중 44번.
마지막 순서다.
채린이 투덜거렸다.
44번까지 기다리려면 아직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 터.
나갈까 말까 망설이던 채린이 콘서트홀 2층으로 향했다.
* * *
아까도 말했듯이 오늘 콘서트홀 2층은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채린이 이 층으로 올라가자, 입구로 향하는 통로에는 금빛 차단봉과 통제선이 가로놓여져 있다.
그리고 그 옆,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영음 재단 직원.
채린이 계단에 올라서자, 말을 건네기도 전에 이미 채린을 알아본 직원.
묻지도 않았는데 차단봉을 밀어 길을 열어준다.
그런데 살짝 곤란한 표정이다.
“···저, 2층 좌석에 손님이 한 분···계세요.”
“손님이요?”
“네. 그게···심사위원장님이 부탁하셔서···.”
“어떤 손님인데요?”
“외국 분이신데, 아마 심사위원장님과 사전에 약속이 돼 있던 것 같았어요. 1층에 모시기에는 너무 혼잡하다고 2층에 자리를 좀 마련해 달라고 하셔서요···.”
여직원의 말투로 봐 아마도 비공식적인 방문 같았다.
“그러면···저는 들어가면 안 되나요?”
“아니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까 보니 그분은 C구역에 앉아계시더라고요. 그냥 알고 계시라고요.”
“네. 전 상관없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영음 홀의 여직원에겐 임선희의 외국인 손님보다 이사장 따님이 더 황송한 존재다.
여직원이 채린을 앞서가더니 A구역과 연결된 문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채린이 나직한 인사와 함께 간단히 목례를 한 뒤, 2층 좌석 가장 앞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여직원의 말처럼 반대편 C구역 쪽에 키가 큰 서양인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객석 중앙에서 왼쪽으로 살짝 치우친 곳이었다.
멀기는 하지만 피아노를 연주하는 참가자의 손 모양까지 볼 수 있는 각도다.
안으로 들어서는 채린의 기척에 남자도 잠깐 채린 쪽을 쳐다봤지만, 이내 무대 위, 피아노로 시선을 돌렸다.
채린은 남자와 거리를 두기 위해 오른쪽 중앙 쪽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야 어디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다른 연주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자리에 앉은 채린은 곧바로 아이팟에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넣은 뒤, 눈을 감았다.
* * *
콩쿠르는 이제 막바지.
참가자들의 순서는 어느새 40번대로 접어들었다.
드디어 끝에서 두 번째로 자신의 차례를 맞은 원영.
무대 위로 천천히 걸어나가는데 가슴이 쿵쾅거렸다.
만약 이수가 원영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 그쪽에도 자신의 셀론을 넣어줬으면 좋았을 거라고 탄식했을 터.
쿵쾅거리는 심장을 잠재우려 심호흡을 길게 내쉰 원영.
심사위원석을 향해 크게 인사를 하고, 피아노 의자에 앉은 뒤, 곧 연주를 시작했다.
~ ♬ ♬ ♩ ♬ ♬ ♩ ♬ ♬ ♩ ~
신기했다.
연주를 시작하자 쿵쾅거리던 심장 소리는 완전히 잊혀졌다.
원영의 손끝이 연습 때와 다를 바 없이 건반 위를 종횡무진 누볐다.
많은 참가자들이 뭉개고 지나간 빠른 음들이 원영의 손끝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제 음을 울렸다.
소리도 다르다.
이전에 친 참가자들과 같은 피아노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소리.
관객석에서 나직한 탄식 소리들이 들려오고, 막바지라 몸을 비비 꼬았던 사람들의 허리가 펴지고, 꼬았던 다리가 가지런해졌다.
이론상으로 피아노의 건반은 누가 눌러도 같은 소리를 내준다.
다섯 살 꼬마가 누르든, 아흔 살 할머니가 누르든, 피아노는 같은 소리를 내준다.
플루트나 트럼펫, 바이올린처럼 초보자에겐 소리조차 내기 힘든 악기가 아니다.
전형적인 이지 투 런, 하드 투 마스터 (Easy to Learn, Hard to Master)형 악기.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지만, 수련은 쉽지 않은 악기.
그런데 누가 눌러도 같은 소리 같지만, 훈련된 연주자와 초보자가 울리는 피아노 소리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이 차이는 프로로 활동하는 콘서트 피아니스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신만이 낼 수 있는 피아노 소리를 위해 호로비츠 같은 피아니스트는 베이스의 울림을 강조하기 위해 반향판을 덧대어 튜닝한 피아노를 가지고 다니며 공연을 하기도 했다.
물론 원영의 연주가 아직 그 정도 수준에 이른 건 아니었지만, 다른 고교생 참가자들에 비하면 확실히 느낌이 다른 소리였다.
술렁이던 관객석은 어느새 침묵 모드.
마치 정식 콘서트장이라도 온 듯 원영의 연주를 감상하는 분위기다.
심사위원들의 눈동자도 크기가 달라졌다.
특히나 가장 크게 표정이 달라진 건 심사위원장 임선희 교수.
고교생의 연주라고 믿어지지 않는지 팸플릿의 참가자 이름과 원영의 얼굴을 계속 번갈아 확인하고 있다.
팸플릿을 든 임 교수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낯빛까지 매우 어두워진다.
그런 원영을 콘서트홀의 일 층 구석진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수.
같은 위치 바로 위의 2층 객석에서는 채린이 어느새 이어폰을 빼고 상체를 앞으로 내민 채, 무대를 지켜보고 있다.
다행히 앞으로 돌출된 2층 객석의 구조상 채린의 시야에서는 일 층 뒤쪽에 앉은 이수의 자리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무대 위, 원영의 연주를 유심히 보던 채린에게 이상한 감(感)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도 채린은 오늘 아침 얼핏 본 것 같은 조율사에 대한 생각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지금까지 노유미에 대한 관심만 있었을 뿐, 다른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쟤는 누구야?”
지루하게 노유미의 순서를 기다리던 채린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한 연주.
채린은 원영이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눈동자가 커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팽팽하게 당겨야 했다.
~ ♬ ♬ ♩ ♬ ♬ ♩ ♬ ♬ ♩ ~
그렇지 않아도 귀가 밝은 채린.
저 소리, 많이 듣던 소리다.
실제가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서 수도 없이 들었던 소리.
자신이 그렇게 찾았던 소리, 연습 때 머릿속에 기억해뒀던 그 소리와 매우 흡사한 소리.
채린이 급히 주머니 속 팸플릿을 꺼내 들었다.
손가락으로 참가자들의 이름을 훑어가던 채린.
“···43번, 이원영? 우정고? 뭐야, 대선 예고도 아니고 일반고?”
채린이 이번엔 시신경의 레벨을 잔뜩 높이기 위해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피아노 앞 원영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래, 봤어. 저 얼굴!’
오늘 아침, 콘서트홀로 걸어올 때 이전에 만났던 조율사를 본 것 같았을 때였다.
채린이 조율사라 생각했던 사람은 금방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지만, 그 옆에 저 학생이 있었다.
채린이 상체를 앞으로 쑥 내밀며 일 층 방청석을 급히 살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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