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을 뽑아 줄 귀인

살짝 열린 문으로 먼저 얼굴이 보인 건 2층 복도를 지키고 있던 영음 재단 직원.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임 교수님, 손님께서 잠시 뵙고 싶다고 해서요···.”
직원의 말에 힐끔 문 쪽을 바라본 임선희, 금반지라도 잃어버린 듯, 당황스레 몸을 일으키며 문 쪽으로 달려갔다.
“어머, 미안, 내 정신 좀 봐! 끝나자마자 올라가 본다는 게···.”
여직원이 몸을 비키자 이 층에 있던 서양인 남자가 성큼 문 안으로 들어선다.
청바지 차림에 목에는 스카프를 걸친 벡커.
“익스큐즈 미!”
영어로 심사위원들에게 사과 인사를 건네더니, 자신의 시계를 가리키며 임 교수에게 독일어로 용건을 전했다.
“심사 중일 텐데 미안. 내가 이제 가 봐야 할 거 같아. 미리 잡아놓은 약속이 있어서. 그리고 오늘 고마웠어. 콩쿠르가 꽤 흥미로웠어. 내가 다시 연락할게. 물어볼 것도 있고.”
“미안은 내가 할 소리지. 정말 미안해. 내가 먼저 올라가야 했는데···내가 지금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서.”
아닌 게 아니라 임선희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하다.
독일어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그런데 여기가 어딘가, 아니 임선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다들 유학파 출신에 음대 교수로 적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다.
임선희만 독일어를 하는 것도 아니고, 임선희만 벡커를 아는 것도 아니었다.
최선대학교 김 교수가 유창한 독일어로 물었다.
“혹시···한스 벡커 교수님 아니세요?”
“아, 저를 아시나요?”
“네, 저 독일에 유학 가 있을 때, 선생님 마스터 클래스에도 참가했었어요.”
“아, 그래요. 죄송합니다. 제가 못 알아봤네요.”
“···무슨 말씀을요. 못 알아보시는 게 당연하죠. 제가 벌써 나이가···그런데 한국에는 언제 오셨어요?”
“여기 임선희 교수가 불러주셔서요. 덕분에 한국의 젊은 유망주들을 직접 보게 됐습니다.”
벡커의 말에 갑자기 당혹스러운 임선희.
이렇게 여러 사람들에게 벡커를 소개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로 만들어진 자리니, 드러내놓고 불편한 속내를 드러낼 수도 없는 상황이다.
‘아, 오늘 왜 이렇게 일이 꼬이지?’
그러나 임선희의 꼬이는 속을 알 리 없는 심사위원들은 뜻밖의 만남을 갖게 된 이 상황이 영광스럽기만 하다.
사실 이 자리의 모든 심사위원이 벡커의 얼굴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니다.
음악계에서는 세계적 인물이지만, 무대에 서는 일이 별로 없는 작곡가 벡커의 얼굴이 그리 많이 알려진 건 아니니까.
하지만 얼굴은 몰라도 한스 벡커라는 이름만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독일어를 모르는 미국 유학파 심사위원까지도.
“어머, 그 벡커? 아, 벡커 선생님?”
“아, 정말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스타일도 음악만큼이나 멋지시네요.”
남자의 신원이 밝혀지자 비로소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진다.
그러자 임 교수가 창백한 얼굴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정식으로 벡커를 소개시켰다.
“다들 아실 거예요. 이 분은 한스 벡커 씨. 독일 국립음대 교수시고, 아츠 앤 마이어(Arts & Meyer) 재단의 위원장이기도 하세요. 유학 시절 제게는 정말 많은 도움을 준 친구이자 선배님이기도 하고요.”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한국 예술학교에서 피아노 가르치는 이선정이에요.”
“최선 대학 피아노과 강현미예요.”
“한국 대학 김가은이에요.”
심사위원들이 다들 벡커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악수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콩쿠르 내내 어디 계셨어요? 일 층에선 전혀 못 봤는데?”
벡커의 마스터 클래스에 참가했다던 최 교수가 물었다.
독일 유학파의 질문에 임선희가 대신 답했다.
“이 층에 계셨어요. 처음에는 심사위원석으로 모실까 생각도 해 봤는데, 그건 여러분도 불편하실 거 같고 해서. 그렇다고 학부모들 떠드는 일 층에 모실 수도 없고 해서.”
말을 줄이면서도 임선희의 속은 자꾸 뒤집어진다.
이런 일이 안 생기게 하려고, 이 층에 꼭꼭 숨겨두었던 건데.
그러나 남의 속도 모르고 한술 더 뜨는 심사위원들.
“어머, 불편하긴요. 저희야 그랬으면 더 좋았겠죠. 세상에! 콩쿠르 심사에서 한스 벡커 선생님과 자리를 같이 하다니.”
심사위원들의 오지랖이 더 번지기 전에 서둘러 상황을 마무리하려는 임선희.
조심스럽게 손을 모으며 창백해진 얼굴로 벡커에게 다시 양해를 구했다.
“정말 미안. 내가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실수가 많네. 그런데 어떡하지? 내가 멀리는 못 나갈 거 같애. 우리가 아직 심사 결론을 내지 못해서···. 내가 내일이든, 모레든 따로 자리를 마련할게.”
“천만에. 괜히 내가 심사 중에 불쑥 들어와서 미안. 그럼 나중에 전화로 얘기해.”
벡커가 왼손을 귀에 올리며, 통화하는 시늉을 하고는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끼어든 독일 유학파 최 교수의 엉뚱한 제안.
“아니, 그럴 게 아니라 벡커 선생님 의견도 한번 들어보고 싶은데. 안 그러세요 여러분?”
“맞다. 처음부터 다 보셨다면서요.”
제안이 나오고, 재청까지 이어졌다.
바늘방석의 바늘을 뽑아 줄 귀인의 등장에 심사위원들은 재청에 재청을 거듭했다.
“괜찮으시면 벡커 선생님 의견은 어떠신지 정말 듣고 싶네요.”
“네. 이것도 저희한테 마스터 클래스 해주신다 생각하시고···.”
“선생님 생각에는 오늘 콩쿠르 위너가 몇 번 같으세요?”
용감한 건지, 현명한 건지 결국 직설적인 질문까지 나왔다.
심사위원들의 부탁이 엉뚱하긴 했지만, 뜬금이 없는 건 아니었다.
모두의 눈에 한스 벡커의 손에 들린 콩쿠르 팸플릿이 보였기 때문.
반쯤 접힌 팸플릿에는 독일어로 흘려 쓴 깨알 같은 메모의 흔적들이 빽빽했다.
심사위원들의 요청이 잇따르자 다시 한번 시계를 확인하는 벡커.
“글쎄, 제가 콩쿠르 위너를 고를 자격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곧바로 요청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몸짓은 이미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눈치 빠른 한 심사위원이 다시 한번 벡커의 옆구리를 찔렀다.
“부담 갖지 마시고 그냥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물론 저희도 어느 정도 결정은 됐죠. 그래도 선생님 의견이 궁금하네요.”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다는 듯 벡커가 팸플릿을 뒤적였다.
“카푸스틴의 곡이 쉽지 않았을 텐데도 학생들치고는 모두 잘 연주해내긴 하더군요. 그중에 특히 관심 가는 학생이 있었는데···.”
벡커에게 한글로 적힌 참가자 이름은 구별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찾는 사람은 마지막 순서에 가까운지라 참가 순서로 구별해도 어렵지가 않았다.
“전 43번을 오늘 콩쿠르의 위너로 고르고 싶네요. 이 학생 이름은 어떻게 읽나요?”
“43번이요? 어머, 저랑 같은 의견이시네요. 이원영이라고 읽어요.”
눈치 없는 심사위원이 벡커의 의견에 공감부터 드러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울고 싶은 심정으로 마지못해 미소를 짓고 있는 임선희 교수.
그러자 비로소 창백한 표정의 임선희를 의식한 새끼 교수.
넌지시 질문을 추가했다.
“혹시 그 외에도 비교할만한 다른 학생은 없었나요? 그 학생 번호 주변으로···.”
노골적으로 단서까지 붙였지만 벡커의 대답은 단호했다.
“네. 후반부에서 지켜볼 만한 연주는 이 친구 하나였어요. 그전까지는···.”
벡커가 다시 팸플릿을 뒤적거렸다.
“여기, 앞쪽이네요. 14번 여학생. 43번을 듣기 전까지는 이 학생이 가장 뛰어났어요.”
“아, 그렇게 보셨구나.”
추가 질문을 던진 심사위원이 머쓱한 표정을 짓자, 한 심사위원이 용기 있게 퍼스트 펭귄으로 나섰다.
“뭐, 벡커 선생님도 이렇게 들으셨다니 답은 다 정해진 셈이네요. 대상 43번, 최우수 14번! 제 평가지도 이렇거든요.”
“저도 비슷해요, 아니 사실 같은 의견이네요. 43번, 14번 순으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세계적인 명성의 한스 벡커가 콕 짚어 오늘의 위너를 지목한 상황이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더는 임선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퍼스트 펭귄의 소신 발언을 필두로 심사위원들의 채점 발표가 속속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비공식 참관인인 한스 벡커의 의견을 포함해, 대상 수상자는 한 사람의 번호로 통일됐다.
임선희마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결정된 만장일치.
대상이 정해지자, 미적거리던 심사 결과도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심사위원장 임선희의 머릿속은 마구 엉키고만 있었다.
머릿속에는 그동안 써왔던 시나리오의 장면들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어디가 처음이고, 어디가 끝이었는지, 결말이 먼저인지, 시작이 결말이었는지···.
분명 시나리오의 순서가 있었건만, 지금은 모든 게 엉켜버린 기분이다.
모든 게 풀어진 실타래가 되어버렸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엉켜버린 것이었을까?
분명 영광은 미리 준비한 자의 것이었다.
그래서 노유미에게 남들보다 훨씬 먼저 카푸스틴 소나타를 준비시켰다.
벡커가 한국에 오겠다고 답장을 보내왔을 때는, 하늘을 향해 성호를 긋기까지 한 임선희였다.
최대한 주변의 의심을 덜 사려고, 접수 마감일까지 기다렸다가 노유미의 참가신청서를 냈다.
마치 참가할 계획이 없었는데 뒤늦게 생각이라도 난 것처럼.
뒷말이 나올 걸 대비해서 사전에 의심을 덜 수 있는 장치도 충분히 해 뒀다.
최소한 남들이 보기에 정정당당해야 했으니까.
심사위원장 딸이라 대상 받았다는 말이 안 나와야 했으니까.
그래서 비디오 판독용으로 모든 참가자의 연주를 카메라에 담자고 요청했다.
콩쿠르 이후에 꼼꼼히 확인해도 아무런 이견이 없도록.
벡커에게도 자신의 딸이 콩쿠르에 참가한다는 사실은 전혀 밝히지 않았다.
내 딸이니까 한 번 더 봐 달라는, 그런 아첨은 필요 없었다.
딸의 소개는 대상을 받은 뒤에, 꽃다발을 들고 해도 늦지 않으니까.
원래도 또래에서 최상위권이던 노유미다.
오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 왔던가.
대상을 놓칠 확률은 로또 번호를 맞추기보다 희박하다고 봤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부터?
대체 무엇 때문에?
꼬이고 꼬인 실타래가 어느새 배꼽에서도 느껴진다.
뭐가 꼬이는지 배 속의 창자가 끊기듯, 명치 아래가 뒤틀렸다.
장려상의 마지막 수상자가 결정된 것과 거의 동시에, 임선희가 갑자기 배를 움켜쥔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 * *
수상자 발표가 늦어지자 휴일을 반납하고 자식 응원을 온 관객들 사이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5시가 다 됐는데 아직도야? 큰일 났네. 여섯 시에 약속이 있는데?”
“아유, 이 인간아! 당신은 지금 저녁 약속이 중요해요? 난 지금 맘이 졸여 죽겠구만!”
“올해는 심사가 작년보다 훨씬 오래 걸리네요. 우리 딸이 벌써 여기 세 번째라 내가 빠삭하거든요.”
“하여간 올해 콩쿠르는 요란하구만. 카메라까지 뻗쳐놓고!”
“방금 보니 건물 뒤에 구급차도 오는 거 같던데?”
“구급차? 누가 다쳤나?”
“그건 그냥 응급상황에 대비해서 대기하는 거 아녜요?”
“에이, 여기가 무슨 잠실운동장도 아니고···.”
“누가 또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발작이라도 한 거 아냐? 재작년에도 그런 비슷한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하긴, 나도 방금 사이렌 소리를 들은 거 같긴 한데.”
* * *
영음 콘서트홀, 후문 앞에 구급차가 도착하더니, 급히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구급대원들.
대원들이 향한 곳은 심사위원들이 모여 있던 대기실이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래?”
“선생님, 괜찮으세요?”
“비켜주세요.”
들것에 실린 채 구급차로 옮겨지고 있는 임선희 교수.
배를 움켜쥔 채, 일그러진 얼굴로 고통을 참고 있다.
들것이 구급차에 실리고, 이래저래 또 눈이 붉어진 딸 노유미도 엄마를 따라 구급차에 함께 올랐다.
콘서트홀 밖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구급차에 실리는 임선희를 쳐다보던 벡커.
다시 한번 시계를 확인하더니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피해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구급차가 떠난 직후.
임선희 심사위원장을 대신해 영음 재단 직원이 늦어진 수상자 발표를 위해 서둘러 무대 위로 향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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