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얘기에는 끝이 있는 법

자리에 앉은 사람보다 서 있는 사람이 더 많은 콘서트홀 일 층.
수상자 발표가 늦어져 소란하기가 시장통 같다.
잠시 후, 양복 차림의 콩쿠르 관계자가 무대 위에 모습을 나타내자 비로소 조용해지는 홀.
서 있던 학부모들 일부는 다시 자리에 앉아 마이크 앞에 선 남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올해는 참가자들의 역량이 그 어느 해보다 뛰어나서 심사 논의가 오래 걸렸습니다. 보통 심사 결과 발표와 시상식은 심사위원장님이 맡으셨지만, 올해는 긴급한 사정으로 제가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시간도 많이 늦었으니 예년과 같은 시상식 절차는 생략하고 상장 전달도 저희가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조용했던 장내가 또 술렁거렸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심사 결과를 발표할 때는 심사위원장이 인사말을 겸하고, 입상자들 또한 한 명씩 무대 위로 올라와 심사위원장으로부터 상장을 받은 뒤, 나란히 무대에 모여 기념 촬영을 하는 게 관행이었다.
“무슨 긴급한 사정? 심사위원장이 부친상이라도 당했나?”
“에이, 그래도 우수상 정도 받으면 무대 위로 불러 줘야지.”
“아까 구급차가 가더니 무슨 사고라도 있었나 봐요.”
사람들의 말이 길어지자 사회자가 곧바로 발표를 시작했다.
“그럼 지금 바로 제10회 <영음 전국 학생 피아노 콩쿠르> 수상자 명단을 호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장려상 수상자입니다. 참가번호 4번, 영음 예술고등학교 2학년 김누리, 참가번호 11번 영음 예술고등학교 3학년, 한보람, 참가번호 29번 대선 예술고등학교 이정현! 이상 3명입니다.”
수상자 발표가 시작되자 장내가 다시 조용해졌다.
혹시나 자녀의 이름이 불리는 걸 놓칠세라 도서관처럼 조용해진 관객석.
장려상을 받은 참가자들이 무대로 올라왔고, 별다른 의례도 없이 영음 재단의 다른 직원에게 상장을 건네받았다.
남자의 수상자 발표는 마치 원고를 읽는 것처럼 건조하게 이어졌다.
우수상이나 대상을 호명할 때, 잠시 발표를 머뭇거리거나 뜸을 들이면서 사람들의 조바심을 들썩이게 하는 흔한 액션도 없었다.
흡사 대기 번호를 불러주는 듯한 결과 발표에 시상식장의 긴장감은 거의 느낄 수 없었다.
그나마 장려상을 받은 학부모들의 웃음과 이를 지켜보는 부러운 시선들이 오갈 뿐이었다.
“어떡해? 장려상은 물 건너갔으니 우수상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우수상이면 동메달이죠. 최우수상이 은메달이고. 대상은 금메달! 이름만 다르지, 영음 콩쿠르 수상자는 장려상 위로는 딱 3명이 다예요! 올림픽 메달처럼!”
올해로 영음 콩쿠르 참가 3년 차라는 학부모가 또 아는 척을 했다.
그러나 학부모들의 설왕설래는 길게 가지 못했다.
혹시 자녀의 이름을 놓칠까, 귀를 쫑긋 세워야 했다.
다시 이어지는 발표.
이번에도 남자는 마치 고객 대기 번호를 불러주는 것처럼 무미건조하게, 쉼표도 없이 수상자들을 발표했다.
***
“다음, 우수상! 참가번호 49번! 대선 예술고등학교 2학년 노유미!”
마이크를 통해 들려온 수상자 이름에 장내가 잠시 술렁였다.
“노유미라면 심사위원장 딸 아냐?”
제법 이 계통 정보에 밝은 학부모가 아는 척을 했다.
곧바로 맞장구 발언.
“역시 심사위원장 딸이라고 그냥 넘어가지는 않는군.”
다시 반론.
“뭘 그렇게 고깝게 봐요? 아까 보니 진짜 잘 치던데. 솔직히 우리 아들보다 백 배는 잘 치는 것 같더라. 난 부럽기만 하네.”
“그래 봐야 아까 저분 말대로면 3등이네. 동메달!”
“에이그, 학생들을 꼭 그렇게 줄을 세워야 좋겠어요?”
“무슨 소리? 참가비까지 내고 여기 나온 이유가 바로 그건데요! 줄 한번 제대로 서보자는 거. 그래서 내 자식 자리가 어디쯤인지 한번 확인해보고 싶은 거, 그거 아녜요?”
자식의 이름이 불리지 않은 학부모들이 줄줄이 한마디씩 토를 달았다.
사실 노유미의 우수상 결정에는 잠깐 심사위원들 간에 의견이 갈렸었다.
그런데 갑자기 심사위원장이 구급차에 실려가는 상황이 되자, 심사위원들이 의견이 급히 한곳으로 모였다.
어차피 도토리 키재기였던 터.
구급차에 실려 간 심사위원장의 쾌유에 조금이나마 마음을 보탰다.
수상자로 노유미의 이름이 불렸지만, 무대 위로 올라올 사람은 없었다.
대신 남자의 음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수상자가 사정으로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상장은 추후 전달하겠습니다.”
살짝 술렁이는 장내.
남자가 곧바로 다음 수상자를 발표했다.
“최우수상! 참가번호 14번 영음 예술고등학교 2학년 민채린!”
이번엔 좀 더 큰 술렁거림.
민채린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아는 척하느라고, 모르는 사람은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느라 더 술렁거렸다.
“이사장 딸내미잖아요.”
“심사위원장 딸에, 이사장 딸까지? 그래서 올해 상금이 그렇게 올랐나?”
“이사장 딸이라면 한영그룹 회장 딸인데 돈이 없어서 그랬겠어요? 명예겠지. 자기 엄마, 아빠 체면 봐서.”
“심사가 오래 걸릴 만했네. 누굴 먼저 챙겨 줘야 되나 고민들 하느라고. 이래서 우리나라가 발전이 안 되는 거예요.”
자기 자식이 못 받았으니 조롱이라도 해 주기로 한 학부모.
“어디 이사장 딸내미 얼굴이나 보자, 재벌집 금수저는 어찌 생겼나?”
그러나 이번에도 수상자는 무대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남자의 음성이 수상자를 대신했다.
조금 전 멘트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최우수상 수상자 역시 사정으로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상장은 추후 전달하겠습니다.”
연이어 수상자가 불참하자 방청석 사이에서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다들 한끗발 하는 집 애들이라 시상식에는 아예 나오지도 않나 봐···.”
“누구는 나가고 싶어도 이름을 안 불러줘서 못 나가는구먼.”
학부모들 사이에서 부러움인지 짜증인지 모를 대사들이 흘러나온다.
차가 밀리기 전에 후다닥 주차장으로 달려갈 생각에 홀 입구 쪽에 모여선 학부모들이다.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혹시나, 만에 하나, 자식의 이름이 불릴까 해서 선 채로 지켜보고 있던 학부모들.
“그나저나 그럼 누굴 대상 준 거야? 혹시···?”
“아, 나도 찍었던 애가 있긴 해요. 아까······.”
올해도 시상식에서 자녀의 이름을 듣는 건 포기했지만, 마지막 남은 궁금증에 차마 자리를 못 떠나고 콘서트홀 안에 남은 학부모들.
마지막 수상자의 이름이 호명됐다.
“대상! 참가번호 43번, 우정고등학교 2학년 이원영!”
* * *
심사위원들에게 책정된 심사비는 이미 계좌로 입금됐겠지만, 주최 측에서 비공식적으로 제공하는 거마비(車馬費)는 행사가 모두 끝난 뒤, 현금 봉투에 담겨 직접 전해졌다.
수상자 발표까지 모두 끝내고 심사를 하던 방에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심사위원들.
“역시 현금 받는 기분이 다르긴 다르네.”
“그런데 임 교수님 껀 어떡해? 누가 대신 받았다 전해줘야지? 김 선생이 받아두지 그래? 학교에서 만날 거잖아?”
“아뇨. 주최 측에서 직접 전해주겠다던데요. 병원 치료비도 포함해서.”
“그래? 하여간 올해 심사는 정말···어휴, 내년에도 이러면 난 못한다고 할 거야. 심사비 그거 얼마나 된다고···.”
“내 심사하다 구급차 뜬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원, 콩쿠르 심사가 올해 같아선 심사위원 노릇도 못해 먹겠어. ”
“우리가 뭐 돈 보고 이거 해요? 선생님도 그런 말씀 마시고 이 줄 꼭 잡고 계셔야 돼요. 나중에 자기 새끼들 챙기려면 다 필요한 거라고요.”
“맞아. 오늘도 봐. 심사위원장 얼굴이 있으니 유미 걔도 결국은 수상자 명단에 들었잖아.”
“맞아, 이사장 딸 민채린이도!”
“에이, 노유미는 몰라도 채린이야 빽 때문에 받은 건 아니지.”
“근데 노유미는 오늘 초반에 왜 그렇게 헤맨 걸까요?”
“맞아요. 임 교수가 고작 영음 콩쿠르에 우수상이나 받자고 딸을 내보냈겠어요? 자기가 심사위원장이라 말 나올 게 뻔한 걸 알면서?”
“진짜 이상해요! 임 교수가 카푸스틴을 그렇게 고집한 걸 보면, 노유미도 지정곡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
“너무 자신만만했거나 연습을 덜 했거나, 아니면···그 집 식구들이 어제 뭘 잘못 먹었나 보지. 임 교수도 저렇게 구급차 신세를 진 걸 보면.”
그러자 그중 서열 2위쯤 되는 심사위원이 다들 입을 닫으라는 포즈와 함께 선고 판결을 내리듯 못을 박았다.
“내가 보기엔 운이 없었어. 무엇보다 참가 순서가 문제였지.”
“참가 순서요?”
“그래. 대상 받은 애가 바로 노유미 앞이었잖아. 앞에서 그렇게 쳐 버리면 다음 사람은 손가락이 굳어버린다니까! 먼저 친 민채린이도 잘 친 마당에, 일반고 출신 남자애가 그렇게 쳐버렸으니, 노유미는 부담이 따블로 왔겠지.”
“게다가 하필 연주 직전에 엄마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으니.”
“임 교수는 그때 이미 알았어. 지 딸은 틀렸다고 본 거지. 평가를 안 하겠다고 나간 게 아니라 열 받아서 나간 거야. 열 식히려고.”
“그럼 노유미하고 민채린이가 순서를 바꿨다면 상장도 달라졌을까?”
“어쩌면 그럴 수도···?”
원영의 다음 순서가 달라졌다면 두 사람의 순위가 바뀌었을 거라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사람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곧바로 반론이 나왔다.
“제 생각은 달라요.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은 민채린이 훨씬 좋았어요. 내가 가끔 영음 예고에서 특강을 해서 걔를 좀 알 거든요. 오늘 연주는 아마 걔 인생 베스트였을 걸요?”
“나도 동감! 오늘 민채린이 진짜 잘 치더라. 그 남자애만 아니었으면 나는 민채린이한테 대상 줬을 거야.”
“그랬다가 이사장 딸 특혜라고 하면요?”
“무슨 소리야? 올해는 카메라로 증거도 남겼잖아. 나중에 공개할 수도 있다며?”
“맞아요. 그래서 우리 오늘은 정말 냉정하게, 진짜로 냉정하게 점수 체크 했잖아요. 안 그래요?”
“그럼. 그럼. 이제 세상이 많이 달라졌어. 옛날처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처신했다가는 아주 매장되는 수가 있어요. 조심들 해요.”
“여기 계신 분들이야 다들 잘 알아서 하시겠지요.”
심사위원장이 있을 동안 눈치 보느라 꾹 참았던 수다여서일까.
심사위원들의 뒷얘기가 끊어질 줄 모른다.
“하여간 오늘 대상이 물건은 물건이에요.”
“맞아요! 고등학생이 어떻게 그렇게 카푸스틴 곡을 정확하면서도 풍부하게 칠 수 있는지. 내가 며칠 전에 아믈랭하고 리흐테르가 친 걸 들어봤는데, 진짜 리흐테르의 청년 시절을 떠올리게 하더라니까요.”
“김 선생, 공부하고 왔구나?”
“···이번엔 공부했어야죠. 어렵잖아요. 카푸스틴! 그래도 명색이 심사위원인데······”
“맞아, 나도 아는 척은 했지만, 실은 엄청 듣고 왔어! 호호!”
“이제야 고백들 하시네.”
“호호호호호!”
바늘방석에 앉았다 나온 만큼 후련함이 더해져서일까?
아니면, 시어머니 같기도, 군기반장 같기도 한 임선희 교수가 자리에 없어서였을까?
심사위원들의 대화는 그 어느 심사 때보다 화기애애했다.
그래선지 심사가 끝나고 거마비까지 챙겼지만, 심사위원들의 수다는 쉽게 끝을 맺지 못했다.
그만큼 얘깃거리가 많은 콩쿠르이기도 했고.
그래도 모든 얘기에는 끝이 있는 법.
“그런데 임 교수님한테는 따로 안 가봐도 되나?”
“아까 영음 직원 말로는 병원 가니까 많이 좋아지셨다는데요? 어쩜 벌써 퇴원하셨을 수도 있고요.”
“그럼 심각한 건 아니었나보네요?”
“혹시 뒷얘기가 궁금해서 나한테 전화라도 하시려나?”
다시 임선희 교수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정신을 차렸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나 오늘 밤에 레슨 있는데! 선생님들 죄송해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비록 구급차 신세를 지고, 자리를 비웠지만, 군기 반장의 포스만은 여전했다.
“같이 가요. 나도 가봐야 돼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다들 수고하셨어요.”
심사위원들이 비로소 저마다 가방과 자신의 짐을 챙기며 하나, 둘, 바쁜 순서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사위원들이 나가는 것과 동시에 방으로 들어온 미화원.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그런데 바닥에 떨어진 스카프 한 장.
미화원이 스카프를 들고 주차장으로 가고 있던 심사위원 일행을 향해 소리쳤다.
“선생님! 여기 스카프 놓고 가셨는데요! 어느 분 거예요?”
“아, 그거~ 위원장님 거 같은데? 임선희 교수님이요!”
“아~”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성 복통 탓에 주인을 잃은 스카프.
버릴 수는 없으니, 미화원은 청소를 하다 말고, 일단 사무국 직원을 찾아 스카프부터 전달했다.
참가자들과 학부모로 붐볐던 콘서트홀은 이제 청소를 시작한 미화원들의 기척만 들린다.
무대에 배치됐던 카메라와 마이크도 모두 철수하고 무대 위 현수막들도 모두 사라져 고요하기까지 한 콘서트홀.
예년과 많이 달랐던 영음 콩쿠르가 그렇게 마무리를 짓고 있었지만,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아직 돌아가지 않은 채, 콘서트 홀 주변을 산책하듯 서성이고 있었다.
이수와 원영도 거기, 등나무와 소나무가 제법 숲의 흉내를 내고 있는 곳의 벤치에 앉아 대상의 소감을 나누고 있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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