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천마의 비고(4)

“저기, 저 녀석. 혈교도로군...”
“...기운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겁니까?”
배 위에 올라탄 두 사람을 내려다보던 진천성이 손을 들어 흑의를 입은 녀석을 가리켰다.
나 또한 흑의를 입은 녀석이 혈교 녀석이라 짐작은 했지만, 진천성이 데려온 녀석의 동료들처럼 흑의만 입은 무고한 시민일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생각했다.
허나. 확신에 차 말하는 진천성을 보건데. 저 흑의를 입은 자가 혈교의 끄나풀이요, 산적이 수채가 된 현 사건의 흑막이었다.
“너와 백랑은 저기 옆에 있는 산적 놈을 맡아라. 저 흑의인은 내가 맞지.”
“...잠깐.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습니다만?”
진천성은 분명, 내가 혈교도의 끄나풀일지도 모르니, 나를 향한 의심이 풀릴 때까지 옆에 있으라 했다.
허나, 지금 진천성이 한 말은 단독행동을 하자는 말이었고. 이는 이전에 했던 말과 어긋나는 부분이 있었다.
“뭐가 이해가 안 된다는 거지?”
“...저를 의심하고 있던 것 아닙니까?”
“그렇지. 하지만, 내가 저 흑의인을 혈교도라 지목했을 때. 네가 보인 살기는 진짜였다.”
“...살기요?”
‘...내가?’
살기.
진천성은 내게서 살기를 보았다 말했다.
“...제가 꾸며 낸 것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네 분노에선 케케묵은 썩은 내가 진동했다. 그건, 오랜 세월 동안 속에서 썩히고 살아야만 볼 수 있는 냄새였다.”
‘...냄새?’
나는 내 옷소매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땀 냄새와 먼지 냄새만 날 뿐. 다른 냄새는 나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냄새가 아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다.”
진천성은 검지와 중지로 제 두 눈을 가리켰다.
“너는 우연히 혈교를 만났고, 그들이 네 일을 방해 했기 때문에 녀석들을 쫓는다고 내게 말했지. 하지만, 네 옆에 보이는 냄새가 너는 그것 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녀석들을 증오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어.”
딱히 집히는 게 아예 없진 않았다.
‘하오문주가 혈교 녀석을 만난 것 같았으니까...’
하오문의 잡일꾼이었던 시절.
너무 많은 개죽음을 보아, 더 이상 화 조차 나지 않게 되었다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속 깊은 곳에서 타오르고 있던 분노.
하오문주가 언급한 요람에 대해 진천성이 알고 있고, 요람이 혈교와 연관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하오문주의 죽음으로 방향을 잃은 내 분노는 혈교를 향하게 된 듯 했다.
‘...그렇다고 이걸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 치죠. 하지만, 그렇다고, 저를 너무 얕보시는 것 아닙니까?”
진천성이 한눈에 봐도 약해 보이는 녀석을 나에게 주고, 혈교인을 제 몫이라며 못을 박았다.
“대협이 강하다는 건 한눈에 봐도 알겠습니다만... 산적 하나에 저와 백랑 둘이 붙다니요...”
초절정 경지에 들어선 나.
적어도, 절정 이상의 경지에 있을 것 같은 백랑.
이 둘에 비해, 산적 두목은 절정 수준으로 밖에 안 보였다.
아무리 적이라도 그렇지,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닐까 싶었다.
“저 흑의인이 내뿜는 기운은 한 개가 아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흡성대법이라고 아느냐?”
알다마다.
상대의 기를 흡수하여 제 것으로 만들고, 기가 모두 빨린 상대는 죽거나 산송장이 되어버리는. 마교와 혈교의 술법...
‘...근데, 그걸 왜 지금 말하는 거지?’
진천성이 흑의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이 바로 흡성대법을 본인의 역량보다 더 많이 사용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빠른 시간 안에 너무 많은 내기를 흡수한 나머지,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한 거지. 그렇기에, 녀석들의 주위엔 제 것이 아닌 기들이 여럿 돌아다닌다.”
“...아.”
진천성이 말하길.
흑의인에게서 풍기는 여러 개의 기운은 제각기 다른 사람의 것으로, 이것은 오직 흡성대법을 무분별하게 사용한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증상이라 했다.
“...얼마나 많이 죽인걸까?”
“글쎄다. 적어도 한 백은 넘겠지.”
내 혼잣말에 진천성이 답했다.
진천성이 말한 백 명.
그 중, 악인은 얼마나 되겠고, 또 그 중엔 아무 죄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만약 그 사람들이 내 사람들이었다면..?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죽이실 겁니까?”
많은 이를 죽인 탓일까. 아님, 사파에 물든 탓일까. 나는 혈교 녀석이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했다.
“...혹, 네가 죽이고자 하느냐? 아서라. 지금 너로서는 감당하지 못한다.”
진천성은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나를 비웃었다.
기분이 나쁘지만, 진천성의 말대로... 나는 아직, 혈교인들을 죽일 수준이 되지 않았다.
‘...소설에서 밖에 나온 혈교인은 영약과 흡혈을 쉼 없이 해댄 녀석들 뿐이었지.’
즉, 저 흑의인은 혈교에서 알아주는 실력자일 것이다. 그런 자를 내가 직접 상대하는 건 무리였기에,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여기는 진천성에게 맞기는게 좋았다.
“...감정이 네 몸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라. 안 그러면, 너 또한 저 녀석의 제물이 될 수 있다.”
“...압니다.”
옆에서 나를 흘끗 쳐다보던 진천성이 조언 아닌 조언을 해왔다.
나 또한 안다. 나 같은 녀석이 혈교의 실력자에게 덤비면 눈 깜짝할 새에 죽는다는 사실을.
뭐... 어차피, 나 같은 녀석의 내공을 뺏어봤자, 아무런 도움이 안 되겠만...
‘하다 못 해, 진천성의 방심을 이끌어 낼 순 있겠지...’
제 아무리 사이코패스라 할 지라도, 바로 코앞에서 사람이 죽으면 시선이 가기 마련이었다.
그것이 1초... 아니, 0.1초라는 아주 찰나의 시간이라 하더라도. 고수들의 세계는 그 1초에서 이루어졌다.
“알면 됐다.”
진천성은 이 말을 끝으로,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흑의인과 산적 두목이 동시에 하늘을 쳐다봤고, 진천성과 눈이 마주친 흑의인이 제 옆에 있던 산적 두목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자... 잠깐만..! 이건, 약속이랑 다르잔...”
산적 두목은 끝내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흑의인이 산적 두목의 얼굴에 손을 올려놓자, 산적 두목의 얼굴이 터질 듯 시뻘겋게 타올랐다.
-쿠우우!!!
“끄아아아아!!!”
산적의 주변으로 붉은색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연기가 흑의인에게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더니, 산적의 온몸에 핏기가 사라졌다.
서 있을 조차 힘이 없어진 산적 두목이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같은 편 아니었나?”
“어차피 여기서 빠져나가면 처리하려 했다.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결과가 똑같다면. 지금 죽는 게 더 가치가 높은 죽음이지.”
-싸아아아!!!
흑의인에게 검은 사기(邪氣)가 실처럼 흘러 나오더니 시체가 된 산적과 이어졌다.
우드득. 두둑..! 뼈가 괴기하게 뒤틀리며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던 산적 두목이 천천히 일어섰다.
-끄어어어어어...
사람의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녹황색의 피부.
근육을 따라 파인 볼, 앙상한 팔다리.
“...강시인가?”
사령술(醉司命).
마교의 사악한 기운으로 시체에 조종자의 기를 집어넣어, 살아있는 것처럼 시체를 조종하는 사악한 술법이었다.
살아있을 때는 고통으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행동에 제약을 걸게 되지만.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지금은 살아있을 때보다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혈교의 사령술사라면... 저 흑의인은 이가희인가?!’
혈교의 3대장 중 염제(炎帝)라 불리는 사마천의 제자이자, 강시술의 귀재(鬼才) 이가희.
원작 후반에선 천이 넘는 강시들을 홀로 다루어, 천마와 그의 일행에 큰 방해가 되었던 자였다.
‘그런 녀석이 왜 지금..?!’
이가희가 진천성을 애먹일 만큼 강하긴 하지만, 그건 후반부의 이야기지... 지금은 초절정의 경지로, 나보다 조금 강한 정도였다.
‘분명 그래야 하는데...’
나는 경련하는 내 손을 내려다 봤다.
이가희에게서 느껴지는 살벌한 기운과 내 안에 있는 무당의 선기가 반응하듯 온몸이 떨려 왔다.
“컹!”
‘...도와주는 건가?’
백랑이 내 주변을 한바퀴 돌더니, 코를 내 손등에 지긋이 눌렀다. 축축한 감각이 손등에서 느껴지고, 부드러운 털이 손끝에서 느껴지자 호흡에 안정이 찾아왔다.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호흡에 기(氣)를 넣어 횡경막 아래에 있는 단전에 끌어모았다.
손에 떨림이 잦아들고 어지러웠던 머릿속에 안개가 걷혔다.
“...고맙다.”
“컹! 컹!”
백랑의 머리를 쓰다듬자 싫다는 듯 내 손아래에 있던 머리를 빼 도망갔다.
‘...누가 영물(靈物) 아니랄까 봐. 제 주인만 쓰다듬을 수 있다 이거지?’
방금전에 말린 육포까지 줬는데, 기를 안정시킨 것으로 제 빚을 다 갚았다는 듯. 백랑은 나와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저긴 해결된 듯 보이는 군. 그래서... 너는 그걸로 날 이길 수 있다 생각하는가?”
진천성의 기를 담은 목소리가 절벽 사이에 울렸다.
재수 없긴 하지만, 아직 초절정인 이가희가 초마의 단계에 들은 진천성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녀석의 말대로, 이가희가 어떻게 나올지 보고 있는데...
“아니...”
이가희는 제 몸을 덮고 있던 흑의를 벗어던졌다.
윤곽이 확 들어 나는 옷을 위에, 짐승의 발톱을 닮은 수갑구(手甲鉤)를 끼고 있는게... 암기(暗記)와 사술(詐術)에 능한 혈교의 인간 다웠다.
“그럼, 왜 웃고 있는거지? 실성이라도 한 건가?”
“신교의 소교주라 하나, 아직 싸움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구나.”
“...허!”
비웃는 듯한 이가희의 말에 진천성이 코웃음 쳤다.
이가희가 한 말처럼 진천성이 아직 젊어 경험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녀석에겐 그것을 뛰어넘을 재능과 내공이 있었다.
당연히, 이는 이가희도 알고 있는 내용일 터...
“싸움에서 이기는 것 외에 승리하는 법이 없는 건 아니거든..!”
이가희가 허공에 대고 손짓하자, 강시와 이어져 있던 실이 끊어졌다.
주인을 잃은 강시가 앞으로 꼬꾸라지더니 이내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덩치가 부풀어 올랐다.
[아수라이화귀(阿修羅離火鬼)]
지옥에서 온 불귀신.
혈교안에서 여우라 불리는 염제의 제자답게, 이가희가 부리는 강시의 몸에서 붉은색 불이 뿜어져 나왔다.
‘...뭐야 저건?!’
명백히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난 모습...
-끼이에에에에!!!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불귀신이 제 앞에 있는 진천성을 향해 절규 어린 비명을 질렀다.
불귀신의 눈에서 튀어나온 불똥이 진천성을 향해 날아가고, 이에 진천성은 귀찮다는 듯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이맛살을 찌푸린 진천성이 비소를 지었다.
“...천륜(天倫)을 저버리고, 기어이 마귀(魔鬼)가 되려 하는가?”
“네놈의 이해 따위 바라지도 않는다.”
[혈사심결(血蛇心結)]
몸 안에 있는 피를 내기로 전환시키는 사술(邪術).
이가희의 주변에 피어올랐던 붉은색의 사기가 강시안으로 들어가더니, 뼈만 남았던 강시가 그 몸집을 부풀렸다.
“가라!!!”
-끼아아아아!!!
이가희의 명령을 따라 불귀신이 진천성을 향해 뛰어올랐다.
“쯧. 귀찮게 됐군.”
진천성이 팔을 크게 휘두르자, 진천성을 향해 달려든 불귀신의 머리 위에 동그란 원이 생성되었다.
짐승의 것처럼 날카로운 불귀신의 손톱이 원에 닿자 폭발음과 함께 불귀신이 튕겨져나갔다.
절벽에 금을 내며 박힌 불귀신이 좁은 틈 사이로 빠져 나오고 양 절벽을 발판삼으며 진천성과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흠... 생각보다 질기구나.”
상대가 꽤 강하다는 듯, 진천성이 감탄을 하고 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럼 검을 꺼내라고!!!’
그렇다.
진천성은 지금 자신의 애검(愛劍)을 검집에 꽂아 둔 채, 맨몸으로 상대를 상대하며 이 싸움을 즐기고 있었다.
‘...에라이 이 미친놈아!!!’
짧은 단말마가 진천성의 웃음소리와 굉음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 작가의말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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